
아버지의 그림자_삼전도 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삼전도 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
- 1116
• 지은이 : 계승범
• 가격 : 17,000원
• 책꼴/쪽수 :
138x225mm, 264쪽
• 펴낸날 : 2024-06-07
• ISBN : 979-11-6981-205-4
• 십진분류 : 역사 > 아시아 (910)
• 도서상태 : 정상
• 태그 : #삼전도항복 #조선 #양반지배구조 #아버지의그림자 #국가정체성
저자소개
지은이 :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주립대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시대 정치·지성사와 한중관계사를 주로 탐구한다. 특히 양반 지식인들의 중화 인식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하여 조선을 빚어낸 양상 및 그 역사적 유산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양태에 관심이 많다.
대표 저서로는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2인 공저, 2023), 『모후의 반역: 광해군 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2021),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2014),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2011),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2009)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북학의』를 영어로 번역한 A Korean Scholar’s Rude Awakening in Qing China(2019)와 『북정록』(2018) 등이 있다.
대표 저서로는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2인 공저, 2023), 『모후의 반역: 광해군 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2021),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2014),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2011),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2011),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2009)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북학의』를 영어로 번역한 A Korean Scholar’s Rude Awakening in Qing China(2019)와 『북정록』(2018)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1637년 병자호란 패배와 1644년 명제국의 멸망
하늘이 무너지고 인간의 도리마저 잃어버린 세상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636년 12월, 한겨울 위태로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척화를 외쳤을까? 청군이 포탄을 퍼부으면 성벽은 곧 무너질 것이고, 포탄을 퍼붓지 않으면 성안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이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근왕병의 봉화가 피어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1637년 정월 초하루에 백관을 거느리고 북경에 있는 명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그들이 군신의 예를 다하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해 1월 30일, 마침내 임금은 삼전도로 나아가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중원의 황제는 오랑캐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적이 천하를 유린하여 인과 의가 끊어지고 충과 효가 무너진 세상에서 이제 조선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했나?
『아버지의 그림자』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은, 곧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양반 엘리트 지배층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분석하고, 그런 정체성이 당대의 양반 지배 구조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여러 측면에서 밝힌다. 또한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 항복의 후유증이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한중 두 나라의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했고, 그 속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 밖에도 1620년대에 임금과 신하가 목숨을 걸고 맞부딪친 주화 대 척화 이념 논쟁부터 1690년대에 온 나라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의리 현창 사업까지,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살아남아야 했던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이 무너지고 인간의 도리마저 잃어버린 세상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1636년 12월, 한겨울 위태로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무엇이 두려웠기에 그토록 척화를 외쳤을까? 청군이 포탄을 퍼부으면 성벽은 곧 무너질 것이고, 포탄을 퍼붓지 않으면 성안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이었다. 어느 한 곳에서도 근왕병의 봉화가 피어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조는 1637년 정월 초하루에 백관을 거느리고 북경에 있는 명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그들이 군신의 예를 다하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해 1월 30일, 마침내 임금은 삼전도로 나아가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중원의 황제는 오랑캐에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적이 천하를 유린하여 인과 의가 끊어지고 충과 효가 무너진 세상에서 이제 조선은 어떤 나라이며,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했나?
『아버지의 그림자』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은, 곧 조선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양반 엘리트 지배층의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분석하고, 그런 정체성이 당대의 양반 지배 구조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여러 측면에서 밝힌다. 또한 오랑캐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전도 항복의 후유증이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한중 두 나라의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했고, 그 속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조작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 밖에도 1620년대에 임금과 신하가 목숨을 걸고 맞부딪친 주화 대 척화 이념 논쟁부터 1690년대에 온 나라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의리 현창 사업까지, 책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살아남아야 했던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목차
책머리에 — 05
1장 프롤로그: 왜 국가정체성 문제인가? — 13
2장 광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 29
후금과의 국서 교환 문제 — 32
요동 난민과 징병 칙서 — 42
존호 문제 — 55
정사 논쟁의 의미 — 59
3장 정묘호란의 동인과 목적, 1623~1627 — 63
정변 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 —68
맹약의 내용으로 본 침공 목적 —73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조선 정책 — 82
침공의 의미 — 90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 93
정묘호란과 척화의 이유 — 96
병자호란과 척화의 논리 — 102
존주의 모습들 — 114
척화론의 의미 — 119
5장 전쟁 원인의 기억 바꾸기, 1637~1653 — 131
국서의 교체와 ‘이상한’ 축약 — 135
침공 이유의 변개 — 138
병란의 귀책사유 변경 — 147
기록 조작의 의미 — 156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 161
효종 대 북벌 논의의 실상 —164
나선정벌 조선군 사령관의 심정 — 170
북벌의 성공 사례 만들기 — 181
기억 조작의 의미 — 185
7장 에필로그: 조선의 국가정체성과 ‘아버지의 그림자’ — 191
척화론: 조선은 왜 질 줄 알면서도 전쟁을 불사했을까? — 195
자구책: 역사 기억의 조작과 ‘조선중화’라는 자기 의식화 —203
현재성: 조선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 —224
주 — 228
참고문헌 — 250
찾아보기 — 255
1장 프롤로그: 왜 국가정체성 문제인가? — 13
2장 광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 29
후금과의 국서 교환 문제 — 32
요동 난민과 징병 칙서 — 42
존호 문제 — 55
정사 논쟁의 의미 — 59
3장 정묘호란의 동인과 목적, 1623~1627 — 63
정변 후 조선과 후금의 관계 —68
맹약의 내용으로 본 침공 목적 —73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조선 정책 — 82
침공의 의미 — 90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 93
정묘호란과 척화의 이유 — 96
병자호란과 척화의 논리 — 102
존주의 모습들 — 114
척화론의 의미 — 119
5장 전쟁 원인의 기억 바꾸기, 1637~1653 — 131
국서의 교체와 ‘이상한’ 축약 — 135
침공 이유의 변개 — 138
병란의 귀책사유 변경 — 147
기록 조작의 의미 — 156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 161
효종 대 북벌 논의의 실상 —164
나선정벌 조선군 사령관의 심정 — 170
북벌의 성공 사례 만들기 — 181
기억 조작의 의미 — 185
7장 에필로그: 조선의 국가정체성과 ‘아버지의 그림자’ — 191
척화론: 조선은 왜 질 줄 알면서도 전쟁을 불사했을까? — 195
자구책: 역사 기억의 조작과 ‘조선중화’라는 자기 의식화 —203
현재성: 조선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 —224
주 — 228
참고문헌 — 250
찾아보기 — 255
편집자 추천글
병자호란, 언제까지 한국사의 비극으로만 둘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는 매우 평면적이다. 큰 틀에서 보면 16세기 말에 대규모 국제전인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명이 구축해놓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틈에서 만주가 성장하면서 패권이 교체되었다. 병자호란은 만주의 후금/청이 중원의 명과 전면전에 나서기 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부수적 사건으로서, 이상의 전제 안에서 조선의 상황과 입장을 분석하는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한국사 관점에서 이 전쟁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실패하고 결국 오랑캐의 침략을 받게 된 사건’으로, 무엇보다 임금이 성 밖으로 끌려나와 땅에 아홉 번 머리를 찧으며 적에게 무릎 꿇은 ‘삼전도의 굴욕’은 1910년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한국사 최악의 순간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학계에서는 당대의 국제 질서 변동이라는 외부 요인에 주목하여 조선과 청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9년 출간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 까치)은 침공의 당사자인 홍타이지(청 태종)를 주인공으로 삼아 청의 의도와 전황을 정밀하게 재현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계승범의 새 책 『아버지의 그림자』 또한 전쟁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홍타이지’를 지목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의 앞과 뒤를 더욱 넓고 치밀하게 연결한다. 그는 광해군 재위 후반부에 조정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국왕과 신료 사이의 이념 논쟁에서 시작하여 주화론과 척화론이 어떻게 격돌했는지를 밝히고, 병자호란 시기에 청 태종과 인조가 주고받은 국서를 놓고 일어난 기록 변조 사건과 숙종 시기에 임금과 사대부가 함께 벌인 기억 조작 사건을 순서대로 추적한다. 이를 통해 임금보다 더 중요하고 오랑캐보다 더 두려웠던, 그래서 조선의 종묘사직을 무겁게 짓눌렀던 바로 ‘그것’의 실체를 역사의 전면에 꺼내놓는다.
효치국가의 최종 모델, 군부·신자 관계
먼저 계승범은 광해군 재위 후반부에 외교 노선을 두고 벌어진 척화 대 주화 논쟁의 양상을 주목한다. 1619년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 이하 1만 4000명의 조선군을 요동으로 보내 명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후금군에게 궤멸되었고, 조선군도 절반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은 명대로, 또 후금은 후금대로 조선의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후금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고, 회담 중에 조선의 사신이 구금되고 역관이 살해되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후금과 대화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겼으나, 조정 신료들은 임금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변방의 일은 장수에게 일임하고 국왕은 간여하지 말라”거나 “명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광해군)께 죄를 짓겠다”라고 능상하길 서슴지 않았다. 양쪽의 갈등은 1623년 인조반정, 즉 신하가 무력을 동원하여 임금을 쫓아내면서 종결되었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광해군의 주화론과 신료들의 척화론이 정사(正邪) 논쟁 구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앞서 그는 『모후의 반역』(역사비평사, 2021)에서 광해군 대 인목대비 폐위 논쟁이 마찬가지로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 뒤 “이제 효가 모든 가치의 우선순위가 되었고 조선은 효치국가의 길로 들어섰다”라고 의의를 밝혔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효치국가의 구조를 조선과 명의 국가 관계로까지 확대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황제(君)는 곧 아버지(父)이고 임금(臣)은 그의 자식(子)이 되는 군부·신자 관계이다.
나는 조명 관계를 중국적 질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특이한 관계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번국(조선)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국(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황제국이 완전히 멸망해 사라졌음에도 기존의 사대 의리를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유교 정치이론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책봉·조공 관계를 군신 관계로만 보지 않고 부자 관계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까지 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상 조명 관계가 유일하다. 즉 명을 대국이 아닌 상국, 더 나아가 군부로 보는 순간 이미 조명 관계는 춘추전국시대의 사대자소 관계에서 이탈한 셈이다. 더 나아가 한당 이래 중국적 책봉·조공 관계의 실제와도 다른, 몹시 변형된 관계일 수밖에 없다. _62쪽
사대교린의 이론을 아득히 초월하여 명을 천하에 유일한 상국(上國)으로 보고,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심지어 ‘군주와 아버지가 일체화된’ 군부의 나라로 섬기기 시작한 조선에서 광해군의 ‘주화론’은 현실 외교 정치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양반 사대부들은 그것을 사론(邪論)이고 사의(邪議)로 인식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정의(正義)이며 정론(正論)인 척화는 단지 조선이 청에 항복했다고 해서 그 의미와 방향이 달라지는 이념이 아니었다고 논의를 이어간다.
죽을힘을 다해 살아남은 조선의 정체성 정치, 기록과 기억 바꾸기 사례
1637년 1월, 조선은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에게 밀린 명은 1644년 내부 반란까지 겹치며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부르고 청에 세폐를 보낼지언정 복심에는 명의 권토중래를 품고 있던 조선에게 이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대사건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 서술은 이후의 조선 후기를 ‘북벌론’과 ‘북학론’으로 설명한다. 조선은 청에 복수를 기약하며 군사력을 증진했고, 청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내실을 다졌다는 것이다. 거기에 명청 교체로 인한 국제 질서의 변동이 조선에서는 신분제 변화와 상업·문화의 발달, 국학의 대두 같은 사회·문화적 전환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을 더한다.
반면 『아버지의 그림자』는 이 국면에서 ‘기록 전쟁’과 ‘기억 바꾸기’ 사례를 발견하고 그 내용과 의미 분석에 천착한다. 예를 들어, 청 사료에 따르면 남한산성 아래에 진을 친 청 태종은 자신이 천명을 받아 천하를 평정한 새로운 황제이니 조선은 하늘의 뜻에 순종하라는 권유와 함께 인조의 무모함과 실정을 질책하고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다(『청태종실록』, 1637년 1월 2일 기사에 실린 국서). 하지만 조선 사료는 그런 내용을 거의 다 생략한 채 최선을 다해 명에 대한 사대 의리를 지키다가 병란을 당했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인조실록』, 1637년 1월 2일 기사에 실린 국서). 똑같은 서신이 왜 이렇게 다르게 기록된 것일까? 계승범은 『인조실록』의 사관들이 ‘의도’를 가지고 홍타이지가 보낸 서신을 아예 다른 내용으로 실록에 기재한 사실과 서신을 축약할 때 침공의 원인을 조선의 기호에 맞게 의도적으로 조작한 정황을 세밀하게 밝힌다. 그리고 동일한 의도를 가진 기록 변조 증거를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곳에서 추가로 확인한다. 외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이, 그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부에서 치열하게 ‘역사 기록 전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핵심 주장인 ‘조선의 국가정체성’의 실체가 선명해진다.
이어서 ‘북벌론’과 ‘나선정벌’ 과정을 추적하며 논지를 뒷받침한다. 효종의 북벌 의지야말로 순수하고 절실했다고 보는 통설과는 달리, 효종조차도 북벌을 내부 단속용 ‘프로파간다’ 구호로 활용했다고 강조한다.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참여한 ‘나선정벌’의 의미가 처음에는 ‘청질서에 종속된 조선의 처지’를 드러낸 우울한 사건이었으나, 그 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조선이 육성한 강군이 북벌에 성공’한 영광의 기억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정체성 정치의 연장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북벌론은 삼전도 항복으로 발생한 국가정체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국제 정세가 변하면서 북벌론은 시의성을 잃어버렸다. 바로 그럴 즈음에, 국왕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북벌의 시대”에 치명적 오점이었던 나선정벌을 오히려 북벌의 큰 성과물로 둔갑시킨 것이다. 국가 권력이 주도한 집단적 기억 바꾸기요, 국가정체성의 회복이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있었기에, 조선왕조는 17세기 중후반의 국가 위기에서 벗어나, 이후 18세기에 꽤 안정을 취하며 어느 정도 부흥할 수 있었다. _190쪽
계승범식 사회과학적 역사 서술의 백미, 현재완료 진행형 역사
이렇게 해서 조선은 살아남았다. 병자호란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지만 인조와 그의 후예들은 270년이나 더 용상을 지켰다. 중국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조선 임금과 함께 죽겠다던 척화파의 후손들도 죽지 않고 살며 대대손손 권세를 누렸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척화파의 화신으로 그려진 김상헌은 오랑캐에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라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현실의 김상헌은 청에 무릎을 꿇지 않고도 살아남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관직과 녹봉을 지켰다.
계승범은 책의 말미에 이르러 역사에 대한 학계의 논의와 대중의 이해는 모두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배 당한 경험이 한국인에게 ‘병자호란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심리적 방어막을 만들게 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근대의 ‘합리성’을 교육받은 학자와 일반인들에게 유교적 문약과 현실을 도외시한 명분론 때문에 조선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는 통설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광해군을 정변(쿠데타)으로 쫓겨난, 그래서 구국의 기회를 잃어버리고만 영웅이자 개혁 군주로 추상한 일들은 당연히 그 반작용이었다.
정치한 고찰 없이 그저 척화론은 헛된 명분론이고, 주화론은 상황을 고려한 현실론이었다는 이해에 기초한 질문인지라, 분석보다는 다분히 감정이 섞인 질문이다. 특히 인간의 선택을 저런 양단 논리로 재단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네 개인의 인생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허다한 선택 이유를 명분이나 실리 어느 한 가지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대개 그 둘이 화학적으로 섞여서 결정에 이르지 않았는가? 세상사에 명분 없는 실리는 없고, 실리 없는 명분도 없는 법이다. 명분은 실리가 떠받쳐주어야 제대로 기능하며, 실리는 명분으로 잘 포장해야 작동하기 마련이다. 명분과 실리를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_194~195쪽
이제 현재로 시점을 옮길 차례이다. 계승범은 우선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 정의하고, 그것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재완료 진행형’의 사건으로 한 단계 더 가공한다. 일찍이 송시열은 삼전도에서의 항복을 용인한다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으며 결국 노비도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금수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에 따라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대외적/현실적으로는 청질서를 받아들이되 국내적/심리적으로는 계속 명질서 안에 머물며 “아버지의 그림자”를 조선의 새 국가정체성으로 단단히 뿌리박았던 것이다. 그림자 안에서 조선은 계속해서 정의(正義)와 정론(正論) 세계의 일원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비교하며 논의를 지금, 여기로 확장시킨다. 2023년 가을에 있었던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이나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건국절’ 논쟁 등은 모두 그 끝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닿아 있다고 가리키며, 이데올로기가 현실 정치를 지배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에서
현대인이 보기에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조건 싸우자는 주전, 곧 척화론이 헛된 명분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위정자에게도 그것이 과연 헛된 명분론에 지나지 않았을까? 무엇과 대조해 볼 때 헛되다는 얘기인가? 조선왕조라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헛되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우리 개개인은 항상 나라를 가장 중시하는가? 목숨이나 명예, 재산이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라야 망하건 말건 자기 잇속을 먼저 생각한 사례는 인류 역사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이라 몰아세우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판단 기준과 논증이 필요하다. 국가를 개인으로 축소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목숨을 기준으로 삼아 헛되다는 뜻인가? 하지만 지금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자살률은 한국이 세계 1등인 지 벌써 오래다. 그렇다면 자살은 모두 헛된 행위일까? (「책머리에」, 6쪽)
솔직히, 조선 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은 병자호란이 남긴 충격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자기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벌이니 소중화니 하는 시대적 담론은 삼전도 항복과 명청 교체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대표적 사례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왕조는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갈 때까지도 후유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항복의 후유증이 그토록 오랫동안 심각하게 작용한 이유는 그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날 치욕 정도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삼전도에서 행한 항례가 조선 조야에 훨씬 더 크고 깊은 충격을 주었다. (「1장. 프롤로그: 왜 국가정체성 문제인가?」, 22쪽)
1622년의 칙서 거부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가 은밀하게 명을 속이는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단계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 광해군의 태도는 꽤 단호하여, 칙서를 아예 받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 사신들이 받아 온 칙서의 영칙례를 자꾸 연기하며 사신과 칙서를 영은문 밖에 무한정 머무르게 하였다. 정변을 맞아 강제 폐위당할 때까지도 두 통의 칙서를 5개월이 넘도록 받지 않고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칙서를 이렇게 오랫동안 도성 밖에 방치한 왕은 오직 광해군뿐이다. 감군이 한양에 머물던 바로 그 시간에도, 황제의 징병 칙서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후금에는 우호적인 답서를 보내라고 독촉한 광해군의 태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52~53쪽)
조선의 사대부는 도통이니 학통이니 종통이니 하며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통을 따지는 주자학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가 정론과 사론으로 갈렸다면, 그 문제는 대화를 통해 절충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임을 뜻하였다. 대명 사대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조선 양반 엘리트의 눈에 ‘중립’은 그 자체로 군부의 나라에 등을 돌리는 패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문제의 핵심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조선의 ‘국가정체성’ 논쟁이었다. 또한 이것은 최근 한국 사회의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 논쟁 및 대북 정책 논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61~62쪽)
누르하치는 서부 전선에서 명과 대치하는 중에 후방의 조선을 공격한다면 조선의 태도도 더욱 분명해질 테고, 그리하여 앞뒤 두 개의 전선에 갇히는 꼴이 되면 후금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의 회신을 받기까지 2년이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이 점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품은 조선 정책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런 형세가 후금이 요동을 장악한 1621년 봄부터 정묘호란 발발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는 곧 누르하치 때나 홍타이지 때나 국내외 정세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등극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금은 최후통첩이나 선전 포고조차 없이 갑자기 조선을 침공하였다. 그렇다면 후금의 조선 침공 동인은 무엇이겠는가? (「3장. 정묘호란의 동인과 목적, 1623~1627」, 87쪽)
조선 후기에 정론의 대척점에 있던 논의를 표현하는 말은 사론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주화와 척화가 정면충돌한 상황에서 척화론을 정론으로 봤다면, 그 상대인 주화론은 이단사설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선이 외교적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척화론이 정론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명 황제와 조선 왕이 충과 효에 기초한 군부·신자 관계로 묶였기 때문이다. 서신을 주고받을 때 명의 연호를 쓰지 말라는 후금의 요구에 척화론이 들불처럼 일어난 이유도 바로 조선은 명의 신자라는 관계성, 곧 국제 무대에서 조선의 위상이자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87쪽)
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110쪽)
삼전도 항복 후 청의 징병에 대해 조선 조정이 보여준 태도는 광해군의 친후금 외교 노선에 반발했던 신료들의 숭명배금 의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그 이념적 뿌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명과 조선의 군부·신자 관계였다. 따라서 정명에 동참하라는 청의 요구에 조선은 지극히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남경에서 청군에게 붙잡힌 임경업이 조선으로 송환돼 처형당한 이후, 조선 사회는 그를 숭명배청 의리의 화신으로 추켜세웠다. 그를 기리는 사업과 전기류 소설이 널리 회자한 사실은 당시 양반 지식인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숭명배청 의식이 지배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119쪽)
16세기를 거치면서, 명과 조선 사이 기존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가 추가된 역사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의 새로운 국가정체성이었다. 부자 관계가 상황 논리를 초월하는 절대 가치로 자리 잡은 이상, 청이 새로운 천명을 내걸고 명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가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 명이라는 국가 하부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주권 국가로서의 정신적 자율성이 사실상 없다 보니, 외부 세계의 변화에도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5장. 전쟁 원인의 기억 바꾸기, 1637~1653」, 157쪽)
북벌 담론은 조선왕조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매우 중요하게 기능했다.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는 정치 선전에 가까웠지만, 북벌론은 한동안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곧 명질서가 무너지고 천자가 사라져버린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 속에서 국왕과 지배양반층은 이해관계를 함께해 절치부심의 북벌 담론을 생성하고 공유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를 다시금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전도 항복 이후 흐트러진 국내의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라는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다. 청을 상대로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기보다는 삼전도 항복 이후 위기에 봉착한 국내 통치 질서와 기존의 양반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내용 정치 선전이었다.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168쪽)
효종 재위 10년간 효종의 정통성을 받쳐준 큰 논리가 바로 북벌이었는데, 막상 그 북벌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벌의 대상이던 오랑캐의 요구에 따라 출정해 그 지휘를 받은 이율배반적인 문제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나선정벌은 북벌과 묘한 함수 관계를 맺으며 얽혔다. 북벌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17세기 말 숙종 때에 이르러 나선정벌을 대하는 조선 조야의 시각이 새롭게 바뀐 점이 바로 그것이다.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188~189쪽)
한국 사회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이해는 매우 평면적이다. 큰 틀에서 보면 16세기 말에 대규모 국제전인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명이 구축해놓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틈에서 만주가 성장하면서 패권이 교체되었다. 병자호란은 만주의 후금/청이 중원의 명과 전면전에 나서기 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부수적 사건으로서, 이상의 전제 안에서 조선의 상황과 입장을 분석하는 시도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한국사 관점에서 이 전쟁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실패하고 결국 오랑캐의 침략을 받게 된 사건’으로, 무엇보다 임금이 성 밖으로 끌려나와 땅에 아홉 번 머리를 찧으며 적에게 무릎 꿇은 ‘삼전도의 굴욕’은 1910년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한국사 최악의 순간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학계에서는 당대의 국제 질서 변동이라는 외부 요인에 주목하여 조선과 청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9년 출간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 까치)은 침공의 당사자인 홍타이지(청 태종)를 주인공으로 삼아 청의 의도와 전황을 정밀하게 재현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계승범의 새 책 『아버지의 그림자』 또한 전쟁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홍타이지’를 지목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의 앞과 뒤를 더욱 넓고 치밀하게 연결한다. 그는 광해군 재위 후반부에 조정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국왕과 신료 사이의 이념 논쟁에서 시작하여 주화론과 척화론이 어떻게 격돌했는지를 밝히고, 병자호란 시기에 청 태종과 인조가 주고받은 국서를 놓고 일어난 기록 변조 사건과 숙종 시기에 임금과 사대부가 함께 벌인 기억 조작 사건을 순서대로 추적한다. 이를 통해 임금보다 더 중요하고 오랑캐보다 더 두려웠던, 그래서 조선의 종묘사직을 무겁게 짓눌렀던 바로 ‘그것’의 실체를 역사의 전면에 꺼내놓는다.
효치국가의 최종 모델, 군부·신자 관계
먼저 계승범은 광해군 재위 후반부에 외교 노선을 두고 벌어진 척화 대 주화 논쟁의 양상을 주목한다. 1619년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 이하 1만 4000명의 조선군을 요동으로 보내 명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후금군에게 궤멸되었고, 조선군도 절반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은 명대로, 또 후금은 후금대로 조선의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후금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고, 회담 중에 조선의 사신이 구금되고 역관이 살해되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후금과 대화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책이라고 여겼으나, 조정 신료들은 임금의 명을 거부하고 오히려 “변방의 일은 장수에게 일임하고 국왕은 간여하지 말라”거나 “명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광해군)께 죄를 짓겠다”라고 능상하길 서슴지 않았다. 양쪽의 갈등은 1623년 인조반정, 즉 신하가 무력을 동원하여 임금을 쫓아내면서 종결되었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광해군의 주화론과 신료들의 척화론이 정사(正邪) 논쟁 구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앞서 그는 『모후의 반역』(역사비평사, 2021)에서 광해군 대 인목대비 폐위 논쟁이 마찬가지로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 뒤 “이제 효가 모든 가치의 우선순위가 되었고 조선은 효치국가의 길로 들어섰다”라고 의의를 밝혔다.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효치국가의 구조를 조선과 명의 국가 관계로까지 확대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황제(君)는 곧 아버지(父)이고 임금(臣)은 그의 자식(子)이 되는 군부·신자 관계이다.
나는 조명 관계를 중국적 질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특이한 관계로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번국(조선)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국(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황제국이 완전히 멸망해 사라졌음에도 기존의 사대 의리를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유교 정치이론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책봉·조공 관계를 군신 관계로만 보지 않고 부자 관계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까지 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상 조명 관계가 유일하다. 즉 명을 대국이 아닌 상국, 더 나아가 군부로 보는 순간 이미 조명 관계는 춘추전국시대의 사대자소 관계에서 이탈한 셈이다. 더 나아가 한당 이래 중국적 책봉·조공 관계의 실제와도 다른, 몹시 변형된 관계일 수밖에 없다. _62쪽
사대교린의 이론을 아득히 초월하여 명을 천하에 유일한 상국(上國)으로 보고,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심지어 ‘군주와 아버지가 일체화된’ 군부의 나라로 섬기기 시작한 조선에서 광해군의 ‘주화론’은 현실 외교 정치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양반 사대부들은 그것을 사론(邪論)이고 사의(邪議)로 인식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정의(正義)이며 정론(正論)인 척화는 단지 조선이 청에 항복했다고 해서 그 의미와 방향이 달라지는 이념이 아니었다고 논의를 이어간다.
죽을힘을 다해 살아남은 조선의 정체성 정치, 기록과 기억 바꾸기 사례
1637년 1월, 조선은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청에게 밀린 명은 1644년 내부 반란까지 겹치며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부르고 청에 세폐를 보낼지언정 복심에는 명의 권토중래를 품고 있던 조선에게 이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대사건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 서술은 이후의 조선 후기를 ‘북벌론’과 ‘북학론’으로 설명한다. 조선은 청에 복수를 기약하며 군사력을 증진했고, 청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내실을 다졌다는 것이다. 거기에 명청 교체로 인한 국제 질서의 변동이 조선에서는 신분제 변화와 상업·문화의 발달, 국학의 대두 같은 사회·문화적 전환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을 더한다.
반면 『아버지의 그림자』는 이 국면에서 ‘기록 전쟁’과 ‘기억 바꾸기’ 사례를 발견하고 그 내용과 의미 분석에 천착한다. 예를 들어, 청 사료에 따르면 남한산성 아래에 진을 친 청 태종은 자신이 천명을 받아 천하를 평정한 새로운 황제이니 조선은 하늘의 뜻에 순종하라는 권유와 함께 인조의 무모함과 실정을 질책하고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다(『청태종실록』, 1637년 1월 2일 기사에 실린 국서). 하지만 조선 사료는 그런 내용을 거의 다 생략한 채 최선을 다해 명에 대한 사대 의리를 지키다가 병란을 당했다는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인조실록』, 1637년 1월 2일 기사에 실린 국서). 똑같은 서신이 왜 이렇게 다르게 기록된 것일까? 계승범은 『인조실록』의 사관들이 ‘의도’를 가지고 홍타이지가 보낸 서신을 아예 다른 내용으로 실록에 기재한 사실과 서신을 축약할 때 침공의 원인을 조선의 기호에 맞게 의도적으로 조작한 정황을 세밀하게 밝힌다. 그리고 동일한 의도를 가진 기록 변조 증거를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곳에서 추가로 확인한다. 외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조선이, 그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부에서 치열하게 ‘역사 기록 전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핵심 주장인 ‘조선의 국가정체성’의 실체가 선명해진다.
이어서 ‘북벌론’과 ‘나선정벌’ 과정을 추적하며 논지를 뒷받침한다. 효종의 북벌 의지야말로 순수하고 절실했다고 보는 통설과는 달리, 효종조차도 북벌을 내부 단속용 ‘프로파간다’ 구호로 활용했다고 강조한다.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참여한 ‘나선정벌’의 의미가 처음에는 ‘청질서에 종속된 조선의 처지’를 드러낸 우울한 사건이었으나, 그 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조선이 육성한 강군이 북벌에 성공’한 영광의 기억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정체성 정치의 연장으로 제시한다.
요컨대, 북벌론은 삼전도 항복으로 발생한 국가정체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국제 정세가 변하면서 북벌론은 시의성을 잃어버렸다. 바로 그럴 즈음에, 국왕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북벌의 시대”에 치명적 오점이었던 나선정벌을 오히려 북벌의 큰 성과물로 둔갑시킨 것이다. 국가 권력이 주도한 집단적 기억 바꾸기요, 국가정체성의 회복이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있었기에, 조선왕조는 17세기 중후반의 국가 위기에서 벗어나, 이후 18세기에 꽤 안정을 취하며 어느 정도 부흥할 수 있었다. _190쪽
계승범식 사회과학적 역사 서술의 백미, 현재완료 진행형 역사
이렇게 해서 조선은 살아남았다. 병자호란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지만 인조와 그의 후예들은 270년이나 더 용상을 지켰다. 중국 황제에게 죄를 짓느니 조선 임금과 함께 죽겠다던 척화파의 후손들도 죽지 않고 살며 대대손손 권세를 누렸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척화파의 화신으로 그려진 김상헌은 오랑캐에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라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현실의 김상헌은 청에 무릎을 꿇지 않고도 살아남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관직과 녹봉을 지켰다.
계승범은 책의 말미에 이르러 역사에 대한 학계의 논의와 대중의 이해는 모두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제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배 당한 경험이 한국인에게 ‘병자호란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심리적 방어막을 만들게 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근대의 ‘합리성’을 교육받은 학자와 일반인들에게 유교적 문약과 현실을 도외시한 명분론 때문에 조선이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는 통설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광해군을 정변(쿠데타)으로 쫓겨난, 그래서 구국의 기회를 잃어버리고만 영웅이자 개혁 군주로 추상한 일들은 당연히 그 반작용이었다.
정치한 고찰 없이 그저 척화론은 헛된 명분론이고, 주화론은 상황을 고려한 현실론이었다는 이해에 기초한 질문인지라, 분석보다는 다분히 감정이 섞인 질문이다. 특히 인간의 선택을 저런 양단 논리로 재단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네 개인의 인생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허다한 선택 이유를 명분이나 실리 어느 한 가지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대개 그 둘이 화학적으로 섞여서 결정에 이르지 않았는가? 세상사에 명분 없는 실리는 없고, 실리 없는 명분도 없는 법이다. 명분은 실리가 떠받쳐주어야 제대로 기능하며, 실리는 명분으로 잘 포장해야 작동하기 마련이다. 명분과 실리를 분리해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_194~195쪽
이제 현재로 시점을 옮길 차례이다. 계승범은 우선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 정의하고, 그것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재완료 진행형’의 사건으로 한 단계 더 가공한다. 일찍이 송시열은 삼전도에서의 항복을 용인한다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으며 결국 노비도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금수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에 따라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대외적/현실적으로는 청질서를 받아들이되 국내적/심리적으로는 계속 명질서 안에 머물며 “아버지의 그림자”를 조선의 새 국가정체성으로 단단히 뿌리박았던 것이다. 그림자 안에서 조선은 계속해서 정의(正義)와 정론(正論) 세계의 일원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비교하며 논의를 지금, 여기로 확장시킨다. 2023년 가을에 있었던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이나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건국절’ 논쟁 등은 모두 그 끝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닿아 있다고 가리키며, 이데올로기가 현실 정치를 지배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에서
현대인이 보기에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조건 싸우자는 주전, 곧 척화론이 헛된 명분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위정자에게도 그것이 과연 헛된 명분론에 지나지 않았을까? 무엇과 대조해 볼 때 헛되다는 얘기인가? 조선왕조라는 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 헛되다는 의미인가? 하지만 우리 개개인은 항상 나라를 가장 중시하는가? 목숨이나 명예, 재산이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라야 망하건 말건 자기 잇속을 먼저 생각한 사례는 인류 역사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척화론을 헛된 명분론이라 몰아세우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판단 기준과 논증이 필요하다. 국가를 개인으로 축소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목숨을 기준으로 삼아 헛되다는 뜻인가? 하지만 지금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자살률은 한국이 세계 1등인 지 벌써 오래다. 그렇다면 자살은 모두 헛된 행위일까? (「책머리에」, 6쪽)
솔직히, 조선 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은 병자호란이 남긴 충격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자기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벌이니 소중화니 하는 시대적 담론은 삼전도 항복과 명청 교체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대표적 사례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왕조는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갈 때까지도 후유증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항복의 후유증이 그토록 오랫동안 심각하게 작용한 이유는 그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날 치욕 정도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그 자체보다는 삼전도에서 행한 항례가 조선 조야에 훨씬 더 크고 깊은 충격을 주었다. (「1장. 프롤로그: 왜 국가정체성 문제인가?」, 22쪽)
1622년의 칙서 거부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가 은밀하게 명을 속이는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단계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 광해군의 태도는 꽤 단호하여, 칙서를 아예 받지 않을 정도였다. 조선 사신들이 받아 온 칙서의 영칙례를 자꾸 연기하며 사신과 칙서를 영은문 밖에 무한정 머무르게 하였다. 정변을 맞아 강제 폐위당할 때까지도 두 통의 칙서를 5개월이 넘도록 받지 않고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칙서를 이렇게 오랫동안 도성 밖에 방치한 왕은 오직 광해군뿐이다. 감군이 한양에 머물던 바로 그 시간에도, 황제의 징병 칙서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후금에는 우호적인 답서를 보내라고 독촉한 광해군의 태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52~53쪽)
조선의 사대부는 도통이니 학통이니 종통이니 하며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통을 따지는 주자학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가 정론과 사론으로 갈렸다면, 그 문제는 대화를 통해 절충점을 찾기 어려운 사안임을 뜻하였다. 대명 사대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조선 양반 엘리트의 눈에 ‘중립’은 그 자체로 군부의 나라에 등을 돌리는 패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문제의 핵심은 정책 대결이 아니라 조선의 ‘국가정체성’ 논쟁이었다. 또한 이것은 최근 한국 사회의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 논쟁 및 대북 정책 논쟁과도 흡사한 면이 있다. (「2장. 해군 대 말엽 외교 노선 양상과 정사 논쟁, 1618~1622」, 61~62쪽)
누르하치는 서부 전선에서 명과 대치하는 중에 후방의 조선을 공격한다면 조선의 태도도 더욱 분명해질 테고, 그리하여 앞뒤 두 개의 전선에 갇히는 꼴이 되면 후금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조선의 회신을 받기까지 2년이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다. 이 점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품은 조선 정책의 결정적 차이였다. 이런 형세가 후금이 요동을 장악한 1621년 봄부터 정묘호란 발발 직전까지 이어졌다. 이는 곧 누르하치 때나 홍타이지 때나 국내외 정세에 특별한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등극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금은 최후통첩이나 선전 포고조차 없이 갑자기 조선을 침공하였다. 그렇다면 후금의 조선 침공 동인은 무엇이겠는가? (「3장. 정묘호란의 동인과 목적, 1623~1627」, 87쪽)
조선 후기에 정론의 대척점에 있던 논의를 표현하는 말은 사론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주화와 척화가 정면충돌한 상황에서 척화론을 정론으로 봤다면, 그 상대인 주화론은 이단사설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선이 외교적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척화론이 정론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명 황제와 조선 왕이 충과 효에 기초한 군부·신자 관계로 묶였기 때문이다. 서신을 주고받을 때 명의 연호를 쓰지 말라는 후금의 요구에 척화론이 들불처럼 일어난 이유도 바로 조선은 명의 신자라는 관계성, 곧 국제 무대에서 조선의 위상이자 국가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87쪽)
유교적 사대자소가 일반 상식이던 ‘중원’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군부·신자 관계로 이념화한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였다. 개인끼리라면 모를까, 냉혹한 국제 무대에서는 아무리 이념적으로 끈끈한 관계라 해도 시세 변화에 따른 다양한 합종연횡이 오히려 상식이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런 변화 곧 ‘황제 갈아타기’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명과 조선의 관계를 이념화하였다. 왜 그랬을까?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110쪽)
삼전도 항복 후 청의 징병에 대해 조선 조정이 보여준 태도는 광해군의 친후금 외교 노선에 반발했던 신료들의 숭명배금 의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그 이념적 뿌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명과 조선의 군부·신자 관계였다. 따라서 정명에 동참하라는 청의 요구에 조선은 지극히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남경에서 청군에게 붙잡힌 임경업이 조선으로 송환돼 처형당한 이후, 조선 사회는 그를 숭명배청 의리의 화신으로 추켜세웠다. 그를 기리는 사업과 전기류 소설이 널리 회자한 사실은 당시 양반 지식인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숭명배청 의식이 지배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4장. 척화론의 양상과 명분, 1627~1642」, 119쪽)
16세기를 거치면서, 명과 조선 사이 기존의 군신 관계에 부자 관계가 추가된 역사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의 새로운 국가정체성이었다. 부자 관계가 상황 논리를 초월하는 절대 가치로 자리 잡은 이상, 청이 새로운 천명을 내걸고 명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 문제가 필연적으로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 명이라는 국가 하부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주권 국가로서의 정신적 자율성이 사실상 없다 보니, 외부 세계의 변화에도 주체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5장. 전쟁 원인의 기억 바꾸기, 1637~1653」, 157쪽)
북벌 담론은 조선왕조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매우 중요하게 기능했다.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는 정치 선전에 가까웠지만, 북벌론은 한동안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곧 명질서가 무너지고 천자가 사라져버린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 속에서 국왕과 지배양반층은 이해관계를 함께해 절치부심의 북벌 담론을 생성하고 공유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를 다시금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전도 항복 이후 흐트러진 국내의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라는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다. 청을 상대로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기보다는 삼전도 항복 이후 위기에 봉착한 국내 통치 질서와 기존의 양반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내용 정치 선전이었다.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168쪽)
효종 재위 10년간 효종의 정통성을 받쳐준 큰 논리가 바로 북벌이었는데, 막상 그 북벌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벌의 대상이던 오랑캐의 요구에 따라 출정해 그 지휘를 받은 이율배반적인 문제가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나선정벌은 북벌과 묘한 함수 관계를 맺으며 얽혔다. 북벌 이데올로기가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17세기 말 숙종 때에 이르러 나선정벌을 대하는 조선 조야의 시각이 새롭게 바뀐 점이 바로 그것이다. (「6장. 북벌론의 실상과 기억 바꾸기, 1649~1690」, 188~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