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모르는 아이 (학대 그 후, 지켜진 삶의 이야기)
- 788
• 지은이 : 구로카와 쇼코
• 옮긴이 : 양지연
• 가격 : 16,800원
• 책꼴/쪽수 :
135x205mm, 348쪽
• 펴낸날 : 2022-02-07
• ISBN : 979-11-6094-905-6
• 도서상태 : 정상
저자소개
지은이 : 구로카와 쇼코
도쿄여자대학 졸업 후 변호사 비서, 요구르트 판매원, 데생 모델, 잡지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가족 문제를 다루며, 가족이라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병리와 아동 학대에 관심을 쏟아왔다. 이 책은 학대당한 아이들이 살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 의연하고 따듯하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켜본 기록으로, 2013년 제11회 가이코다케시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쓴 책으로 『마음의 제염이라는 허구 — 후쿠시마현 제염 선진 도시는 왜 제염을 멈췄을까』, 『공립 고등학교의 재도전』, 『자궁 경부암 백신 부작용과 싸우는 소녀와 그들의 엄마』, 『싱글 맘, 그 후』 등이 있다.
옮긴이 : 양지연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언론학을 전공했다. 공공기관에서 홍보와 출판 업무를 담당했으며 지금은 기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아빠는 육아휴직 중』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어이없는 진화』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맨발로 도망치다』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학대당하다 죽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린다. 가해자를 향한 사회적 분노가 들끓고 재판 과정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어떤 아이는 무참하게도 법의 이름으로 남는다. 하지만 한 번쯤 떠올려본 적이 있던가. 뉴스가 되지 못한,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이 책은 엄마의 보이지 않는 학대를 겪고 자란 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으로 생활하며, 가족 살인과 아동 학대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 구로카와 쇼코가 생존자 아이들의 ‘그 후’를 정성스럽게 따라간 르포르타주이다. 패밀리홈,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폐쇄 병동 등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찾아가 말을 건네고, 그들을 보살피는 위탁 부모, 시설 교사, 아동 복지사 등의 구체적 면면을 꼼꼼히 취재한 기록이다. 차분한 필치와 섬세한 묘사로 그려낸 여정 속 구로카와가 마주친 아이들은 학대 후유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스물네 시간 곁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어른들 그리고 비슷한 모양의 고통을 겪는 또래와 살아가며, 웃는 법을 배우고 새로이 자라나는 시간을 보낸다.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 장절한 논픽션은 아이가 버텨온 시간들을 가늠케 해 읽는 이를 비탄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아동 학대 대응 현황과 복지 제도 등을 충실히 소개하여 양육자가 책임을 저버린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이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엄마의 보이지 않는 학대를 겪고 자란 뒤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으로 생활하며, 가족 살인과 아동 학대에 관심을 기울여온 작가 구로카와 쇼코가 생존자 아이들의 ‘그 후’를 정성스럽게 따라간 르포르타주이다. 패밀리홈,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폐쇄 병동 등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찾아가 말을 건네고, 그들을 보살피는 위탁 부모, 시설 교사, 아동 복지사 등의 구체적 면면을 꼼꼼히 취재한 기록이다. 차분한 필치와 섬세한 묘사로 그려낸 여정 속 구로카와가 마주친 아이들은 학대 후유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스물네 시간 곁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어른들 그리고 비슷한 모양의 고통을 겪는 또래와 살아가며, 웃는 법을 배우고 새로이 자라나는 시간을 보낸다.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 장절한 논픽션은 아이가 버텨온 시간들을 가늠케 해 읽는 이를 비탄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아동 학대 대응 현황과 복지 제도 등을 충실히 소개하여 양육자가 책임을 저버린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 이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목차
머리말
제1장. 미유 ― 벽이 된 아이
제2장. 마사토 ― 커튼 방
제3장. 다쿠미 ― 어른이 된다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
제4장. 아스카 ―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어
제5장. 사오리 ―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나요
맺음말
문고본을 내며 ―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을 찾은 지 3년이 지난 지금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제1장. 미유 ― 벽이 된 아이
제2장. 마사토 ― 커튼 방
제3장. 다쿠미 ― 어른이 된다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
제4장. 아스카 ― 노예가 되어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어
제5장. 사오리 ―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나요
맺음말
문고본을 내며 ―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을 찾은 지 3년이 지난 지금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편집자 추천글
살아남은 아이들의 ‘그 후’를 만나는 여행
2010년 어느 여름날,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 전문의 스기야마 도시로에게 대리 뮌하우젠증후군으로 친자식 셋을 죽음으로 내몬 충격적 사건과 관련해 의견을 구하고자 소아 전문 종합병원 아이치소아센터로 향한다. 스기야마를 따라 심리 치료과 32병동에 들어선 그의 눈엔 환자복 대신 일상복 차림의 아이들이 편히 쉬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런데 가만, 무언가 낯설다. 그곳은 ID카드를 가진 사람만 출입 가능한 폐쇄 병동이었다. 소아과에 폐쇄 병동이라니?
피학대 아동이 원가정에서 분리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리라 여겼던 저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혼돈에 휩싸여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오고, 이듬해 2월, 다시 센터를 찾아 폐쇄 병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듣는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에 이르면 분노와 공포 등 봉인되었던 다양한 감정이 풀려나와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성적 학대를 당한 아이는 고스란히 성화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맞닥뜨린 아득한 진실 앞에 구로카와는 학대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무엇을 앗아가는지, 직접 피학대 아이들의 ‘그 후’를 만나는 여행을 떠나자고 결심한다.
사회적 양호의 현장을 찾아가다
패밀리홈, 새로운 가족의 탄생
이 여정의 행선지는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 등으로 다양하다. 구로카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의 사회적 양호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한국의 상황과 개선점은 무엇인지 돌아볼 계기를 얻는다. 크게는 위탁 부모 등이 맡아 키우는 가정 양호, 유아원과 아동 양호 시설 등 시설 양호, 지역 소규모 아동 양호 시설과 소규모 그룹 케어 등 가정적 양호 세 종류로 나뉜다. 유아원은 신생아부터 1세 미만인 아기의 양육이 주를 이루며, 보통 3세부터 아동 양호 시설로 옮긴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은 경증의 정서 장애를 지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설로 1명 이상의 의사와 대체로 아동 10명당 1명 이상의 심리 치료 담당 직원을 배치하여 아이의 심리 케어를 돕는다.
저자가 가장 중점적으로 취재한 곳은 가정 양호 형태에 속하는 ‘패밀리홈’(한국에서는 공동생활 가정 또는 그룹홈이라 부른다)이다. 패밀리홈은 2009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정식 명칭은 ‘소규모 주거형 아동 양육 사업’이다. 양육자의 ‘집’에서 5∼6명의 보호 아동을 돌보는 사업으로 위탁 부모 경험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이 양육자가 된다. 아동 양호 시설이 지닌 폐해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가정처럼 안온한 환경에서 양육이 이뤄지게끔 하려는 정부 방침의 일환이다.
구로카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이를 품어내는 요코야마홈, 사와이홈, 희망의 집, 가와모토홈 네 곳을 방문한다. 자립해 집을 떠나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본가’처럼 패밀리홈 사람들도 하나의 ‘가족’으로서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더불어 아이들은 거울처럼 같은 상처를 지닌 형제자매와 연대하며 함께 성장해간다. 집 밖에서는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설 출신의 아이라는 이유 등으로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적어도 패밀리홈 안에서만큼은 유별나지 않은 보통 아이가 된다. 저자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식사하고 집안일을 돕고 잠을 청하거나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그 집 속에 녹아든다. 르포르타주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처럼 술술 읽히며 글 행간마다 따스함이 배어나는 까닭은, 밤낮으로 배경도 성별도 연령도 다양한 아이들의 갖가지 사연을 듣고, 이들을 보듬는 어른들의 마음과 고뇌에 깊이 공감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미유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우리 집 아닌데.” (…)
새 친구가 와서 신이 나 들뜬 요코야마홈 아이들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가오루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나도 원래는 여기 안 살아. 다른 집이 있는데 야마무라(아동 복지사 이름)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모두 같이 밥 먹고 놀고 자니까 여기가 이젠 우리 집이고 우리 가족이야. 이 집에 오면 모두 이 집의 아이야.” (…)
놀란 미유에게 사키도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나도 옛날엔 다른 데 살았어. 멀리서 왔는데 이젠 여기가 우리 집이야.” ― 「미유 ― 벽이 된 아이」, 45쪽.
피학대 아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후유증
아동 학대라는 ‘제4의 발달 장애’
학대 환경과 양상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주 접하지만, 정작 아이가 학대 이후에 커다랗고도 짙은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피부에 남겨진 담뱃불로 지진 흉터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구로카와는 전문의 스기야마의 입을 빌려 아이가 ‘제4의 발달 장애’를 겪는다고 밝힌다. 태생적 발달 장애가 아니라 학대가 낳은 발달 장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공포, 긴장 속에 지낸 아이는 밤에 공격당할까 잠들지 못한 채 늘 과각성과 예민 상태에 놓인다. 학대자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감정 스위치를 끄는 데 익숙해지면서 기쁨과 슬픔 따위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감정의 빈곤 상태에 빠지거나, 과잉 행동, 충동성, 욕구불만에 따른 자제 불능, 인내력과 집중력 저하로 생기는 학습 장애 등과 같은 애착 장애 증상도 발생하며, ADHD를 갖게 되기도 한다.
“너 같은 애는 불행해져야 해”라는 생모의 환청과 싸우고 갑자기 얼어붙고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증상을 겪는 미유, 밤이면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지르고 커튼 뒤에 숨어 팔딱거리는 도미를 얼굴 앞에 치켜든 채 꼼짝 않고 쳐다보는 마사토, 선천적 지적 장애가 아님에도 전쟁터와 같은 시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경계하느라 머리에 구름이 낀 듯 학습 능력이 저하된 다쿠미. 학대가 할퀴고 간 흔적은 이 아이들 모두의 뇌 깊숙한 곳에 선명히 각인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학대는 인간의 근간을 뒤흔들고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존재를 부정당하며 환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갓 지은 밥과 된장국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먹어보지 못한 식재료가 많기에 하나하나 골라냈다. 볼일 보고 뒤처리하는 법, 머리 감는 법, 속옷 갈아입는 법을 몰랐다. 구로카와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자연히 습득하는 줄로 알아온 위생 관념과 기본 감각 경험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하나 어른이 가르쳐주어야 할 돌봄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학대당한 아이를 보호 조치한 데에서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임을, 아이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길러내는 데 얼마만큼 긴 시간과 절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난 지금 학대받다 죽은 아이가 부럽다.” 자신을 학대하던 생모를 죽여 법정에 선 20대 후반 청년의 외침이다.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은 이토록 깊고 참혹하며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또한 우리 어른이, 우리 사회가 생존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이들에게 든든한 손길을 내밀자고 말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훗날 잘 살아왔다고 아이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책 속으로
“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대응이 늘 사후 약방문이 되고 마는 이유는 아동 학대가 초래하는 후유증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잡성 트라우마라고 부르는데 이는 뇌에 기질적인 변화를 초래합니다. 뇌를 촬영한 영상 사진에도 명확히 나타납니다. 매우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기 때문에 약물요법, 생활요법, 심리요법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오랜 시간 치료해야 합니다.” 32병동에 입원한 아이들 대부분이 항정신병 약 등 여러 종류의 약을 먹는다고 아라이가 덧붙였다. ― 21-22쪽.
“있잖아, 쇼코 아줌마. 나는 다섯 살 때까지 내 생일이 7월 10일이라는 걸 몰랐어.”
미유가 하늘하늘 날리는 깃털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밝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형 놀이를 하다 툭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던져진 말. 가볍고 보드라운 목소리와 말하는 내용 사이의 차이에 어? 하고 순간 몸이 굳었다. 생일은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축복해주는 날인데……. ― 29쪽.
순간순간을 살아온 인간이 연속된 기억을 축적해가는 일이 성장이라면 학대는 그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다. (…) “괴로운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개개의 인격에 가둬넣어 분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썩은 양파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치료를 하다 보면 한 겹 한 겹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인간성에도 두께가 생깁니다.” ― 56-57쪽.
드넓은 논밭 사이사이로 민가가 드문드문 보이는,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패밀리홈이라서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 기르는 상황이 행여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기우였다. 현관 앞에는 이웃집에서 가져다준 채소가 놓여 있곤 했고, 이제 막 패밀리홈 가족이 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매면 마을 사람들이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이번에 새로 온 애가 너구나” 하고 알아봐주기도 한 덕분에 아이들은 마을 울타리 안에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랐다. ― 74쪽.
학대 피해 아동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를테면 이렇다. 안심할 수 있는 엄마의 무릎 대신에 무관심 속에 방치된 차가운 침대, 상냥한 미소 대신 괴물 같은 표정과 성난 목소리, 술 냄새 나는 입김, 얻어맞았을 때의 아픔, 공포, 피의 맛과 온몸이 저려오는 감각 등이 자리한다. 이것이 학대 피해 아동의 일상 즉 ‘익숙한 세계’이며 슬프지만 이것이 아이를 둘러싼 세상이다. 온몸이 저리고 아픈 느낌과 성난 목소리만이 양육자와의 연결 고리라고 한다면 아이는 그런 감각에만 의존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해자와 학대 피해 아동 사이에 형성되는 왜곡된 애착 즉 학대적인 유대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대적인 유대는 연쇄적인 학대로 이어진다. ― 93쪽.
무엇보다 부엌에 놀랐다. 냉장고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다. 시설에선 조리된 음식이 식당에 운반되어온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도 가스 불을 사용해 요리하는 모습도 아니, 생활공간 속에 요리를 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 가장 놀란 건 ‘냄새’였다. 2층 아키라의 방에서 놀던 다쿠미는 아래층 부엌에서 올라온 햄버그스테이크 굽는 냄새에 “이게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도대체 뭐야!” 하며 잽싸게 1층으로 뛰어내려 왔다. 부엌으로 들어온 다쿠미는 냄새뿐 아니라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된장국 냄비에서 올라오는 증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하얀 연기는 뭐야!” ― 134쪽.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자기 마음속엔 깊은 상처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친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아이들끼리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커가요. 저도 한 애가 문제 행동을 일으켜도 아이가 많으니 정신이 분산되어서 집요하게 몰아세울 수 없거든요. 서로에게 도피처가 되어줄 수 있으니 이런 공동 양육이 좋은 것 같아요.” ― 178-179쪽.
스기야마는 아동 학대를 ‘제4의 발달 장애’라고 이름 붙였다. 학대는 대뇌의 여러 영역에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데, 부주의한 행동을 보이거나 행동 제어에 어려움을 겪는 ADHD적인 증상,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현 순간을 벗어나는 데만 급급한 행동 등은 언뜻 보기에 광범성 발달 장애처럼 보인다고 한다. 학대가 장애라는 심각한 손상을 아이에게 입힌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다.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 여겼던 안일한 인식이 무너지면서 한없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학대는 뇌 전체의 성장에 물리적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뇌 영상 촬영 진단으로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귀를 의심했다. ― 106쪽.
“다쿠미는 4학년 때 ‘어른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지. 난 죽는 게 나아’라는 말을 했어요. 그렇지 않다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자신도 타인도 소중히 여기면 나중에 커서 적더라도 돈을 벌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나라는 사람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다쿠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174쪽.
왜 그렇게까지 생부모를 갈망하는 걸까. 자신을 두고 떠 난 사람인데도. 마스자와는 키워드가 ‘상실’이라고 설명한다. “아이는 양육자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버려지듯이’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 보내지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버려지는’ 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를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할 때 이는 커다란 상실 체험이 되어 아이를 괴롭힙니다. 학대라고 하면 트라우마라는 상처받은 체험을 주로 거론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상실입니다.” ― 226쪽.
한 지붕 아래 사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마음, 이는 서로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리라. 배려하고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공감하는 관계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도 학대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안정된 가정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희망으로 향하는 갈림길은 어디에 있을까. 한 위탁모가 명쾌하게 답한다.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없는가.” 뿌리, 이는 존재의 근간이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둘러싸인 안심할 수 있는 장소. 그곳이 아이가 뿌리내릴 집이다. ― 304쪽.
인생의 첫 몇 년 동안 겪은 일로 그들은 평생 고통과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얻고 그곳에 뿌리를 뻗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 같은 고통을 품은 형제자매와 함께 자기 속도에 맞춰 느리지만 천천히,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아이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빛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잘 품고 지켜줘야 한다. 아이가 지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학대 피해 아동의 ‘그 후’는 보여준다. ― 337-338쪽.
2010년 어느 여름날,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 전문의 스기야마 도시로에게 대리 뮌하우젠증후군으로 친자식 셋을 죽음으로 내몬 충격적 사건과 관련해 의견을 구하고자 소아 전문 종합병원 아이치소아센터로 향한다. 스기야마를 따라 심리 치료과 32병동에 들어선 그의 눈엔 환자복 대신 일상복 차림의 아이들이 편히 쉬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런데 가만, 무언가 낯설다. 그곳은 ID카드를 가진 사람만 출입 가능한 폐쇄 병동이었다. 소아과에 폐쇄 병동이라니?
피학대 아동이 원가정에서 분리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리라 여겼던 저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혼돈에 휩싸여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오고, 이듬해 2월, 다시 센터를 찾아 폐쇄 병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듣는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장소에 이르면 분노와 공포 등 봉인되었던 다양한 감정이 풀려나와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성적 학대를 당한 아이는 고스란히 성화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맞닥뜨린 아득한 진실 앞에 구로카와는 학대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무엇을 앗아가는지, 직접 피학대 아이들의 ‘그 후’를 만나는 여행을 떠나자고 결심한다.
사회적 양호의 현장을 찾아가다
패밀리홈, 새로운 가족의 탄생
이 여정의 행선지는 유아원, 아동 양호 시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 등으로 다양하다. 구로카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의 사회적 양호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한국의 상황과 개선점은 무엇인지 돌아볼 계기를 얻는다. 크게는 위탁 부모 등이 맡아 키우는 가정 양호, 유아원과 아동 양호 시설 등 시설 양호, 지역 소규모 아동 양호 시설과 소규모 그룹 케어 등 가정적 양호 세 종류로 나뉜다. 유아원은 신생아부터 1세 미만인 아기의 양육이 주를 이루며, 보통 3세부터 아동 양호 시설로 옮긴다. 정서 장애아 단기 치료 시설은 경증의 정서 장애를 지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설로 1명 이상의 의사와 대체로 아동 10명당 1명 이상의 심리 치료 담당 직원을 배치하여 아이의 심리 케어를 돕는다.
저자가 가장 중점적으로 취재한 곳은 가정 양호 형태에 속하는 ‘패밀리홈’(한국에서는 공동생활 가정 또는 그룹홈이라 부른다)이다. 패밀리홈은 2009년부터 시행된 제도로 정식 명칭은 ‘소규모 주거형 아동 양육 사업’이다. 양육자의 ‘집’에서 5∼6명의 보호 아동을 돌보는 사업으로 위탁 부모 경험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사람이 양육자가 된다. 아동 양호 시설이 지닌 폐해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가정처럼 안온한 환경에서 양육이 이뤄지게끔 하려는 정부 방침의 일환이다.
구로카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이를 품어내는 요코야마홈, 사와이홈, 희망의 집, 가와모토홈 네 곳을 방문한다. 자립해 집을 떠나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본가’처럼 패밀리홈 사람들도 하나의 ‘가족’으로서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를 형성한다. 더불어 아이들은 거울처럼 같은 상처를 지닌 형제자매와 연대하며 함께 성장해간다. 집 밖에서는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설 출신의 아이라는 이유 등으로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적어도 패밀리홈 안에서만큼은 유별나지 않은 보통 아이가 된다. 저자는 가족들과 둘러앉아 식사하고 집안일을 돕고 잠을 청하거나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그 집 속에 녹아든다. 르포르타주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처럼 술술 읽히며 글 행간마다 따스함이 배어나는 까닭은, 밤낮으로 배경도 성별도 연령도 다양한 아이들의 갖가지 사연을 듣고, 이들을 보듬는 어른들의 마음과 고뇌에 깊이 공감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미유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우리 집 아닌데.” (…)
새 친구가 와서 신이 나 들뜬 요코야마홈 아이들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가오루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나도 원래는 여기 안 살아. 다른 집이 있는데 야마무라(아동 복지사 이름)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모두 같이 밥 먹고 놀고 자니까 여기가 이젠 우리 집이고 우리 가족이야. 이 집에 오면 모두 이 집의 아이야.” (…)
놀란 미유에게 사키도 신이 나서 소리쳤다. “나도 옛날엔 다른 데 살았어. 멀리서 왔는데 이젠 여기가 우리 집이야.” ― 「미유 ― 벽이 된 아이」, 45쪽.
피학대 아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후유증
아동 학대라는 ‘제4의 발달 장애’
학대 환경과 양상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주 접하지만, 정작 아이가 학대 이후에 커다랗고도 짙은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피부에 남겨진 담뱃불로 지진 흉터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구로카와는 전문의 스기야마의 입을 빌려 아이가 ‘제4의 발달 장애’를 겪는다고 밝힌다. 태생적 발달 장애가 아니라 학대가 낳은 발달 장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공포, 긴장 속에 지낸 아이는 밤에 공격당할까 잠들지 못한 채 늘 과각성과 예민 상태에 놓인다. 학대자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감정 스위치를 끄는 데 익숙해지면서 기쁨과 슬픔 따위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감정의 빈곤 상태에 빠지거나, 과잉 행동, 충동성, 욕구불만에 따른 자제 불능, 인내력과 집중력 저하로 생기는 학습 장애 등과 같은 애착 장애 증상도 발생하며, ADHD를 갖게 되기도 한다.
“너 같은 애는 불행해져야 해”라는 생모의 환청과 싸우고 갑자기 얼어붙고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증상을 겪는 미유, 밤이면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지르고 커튼 뒤에 숨어 팔딱거리는 도미를 얼굴 앞에 치켜든 채 꼼짝 않고 쳐다보는 마사토, 선천적 지적 장애가 아님에도 전쟁터와 같은 시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경계하느라 머리에 구름이 낀 듯 학습 능력이 저하된 다쿠미. 학대가 할퀴고 간 흔적은 이 아이들 모두의 뇌 깊숙한 곳에 선명히 각인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학대는 인간의 근간을 뒤흔들고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존재를 부정당하며 환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갓 지은 밥과 된장국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먹어보지 못한 식재료가 많기에 하나하나 골라냈다. 볼일 보고 뒤처리하는 법, 머리 감는 법, 속옷 갈아입는 법을 몰랐다. 구로카와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자연히 습득하는 줄로 알아온 위생 관념과 기본 감각 경험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모두 하나하나 어른이 가르쳐주어야 할 돌봄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나아가 학대당한 아이를 보호 조치한 데에서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임을, 아이를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길러내는 데 얼마만큼 긴 시간과 절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난 지금 학대받다 죽은 아이가 부럽다.” 자신을 학대하던 생모를 죽여 법정에 선 20대 후반 청년의 외침이다.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은 이토록 깊고 참혹하며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로카와는 아동 학대의 현실을 직시하자고, 또한 우리 어른이, 우리 사회가 생존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이들에게 든든한 손길을 내밀자고 말한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훗날 잘 살아왔다고 아이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책 속으로
“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대응이 늘 사후 약방문이 되고 마는 이유는 아동 학대가 초래하는 후유증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잡성 트라우마라고 부르는데 이는 뇌에 기질적인 변화를 초래합니다. 뇌를 촬영한 영상 사진에도 명확히 나타납니다. 매우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기 때문에 약물요법, 생활요법, 심리요법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오랜 시간 치료해야 합니다.” 32병동에 입원한 아이들 대부분이 항정신병 약 등 여러 종류의 약을 먹는다고 아라이가 덧붙였다. ― 21-22쪽.
“있잖아, 쇼코 아줌마. 나는 다섯 살 때까지 내 생일이 7월 10일이라는 걸 몰랐어.”
미유가 하늘하늘 날리는 깃털처럼 보드라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밝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형 놀이를 하다 툭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던져진 말. 가볍고 보드라운 목소리와 말하는 내용 사이의 차이에 어? 하고 순간 몸이 굳었다. 생일은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이 축복해주는 날인데……. ― 29쪽.
순간순간을 살아온 인간이 연속된 기억을 축적해가는 일이 성장이라면 학대는 그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다. (…) “괴로운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개개의 인격에 가둬넣어 분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썩은 양파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치료를 하다 보면 한 겹 한 겹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인간성에도 두께가 생깁니다.” ― 56-57쪽.
드넓은 논밭 사이사이로 민가가 드문드문 보이는,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패밀리홈이라서 혈연관계가 없는 아이들을 모아 기르는 상황이 행여 마을 사람들의 눈총을 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기우였다. 현관 앞에는 이웃집에서 가져다준 채소가 놓여 있곤 했고, 이제 막 패밀리홈 가족이 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매면 마을 사람들이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이번에 새로 온 애가 너구나” 하고 알아봐주기도 한 덕분에 아이들은 마을 울타리 안에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랐다. ― 74쪽.
학대 피해 아동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를테면 이렇다. 안심할 수 있는 엄마의 무릎 대신에 무관심 속에 방치된 차가운 침대, 상냥한 미소 대신 괴물 같은 표정과 성난 목소리, 술 냄새 나는 입김, 얻어맞았을 때의 아픔, 공포, 피의 맛과 온몸이 저려오는 감각 등이 자리한다. 이것이 학대 피해 아동의 일상 즉 ‘익숙한 세계’이며 슬프지만 이것이 아이를 둘러싼 세상이다. 온몸이 저리고 아픈 느낌과 성난 목소리만이 양육자와의 연결 고리라고 한다면 아이는 그런 감각에만 의존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해자와 학대 피해 아동 사이에 형성되는 왜곡된 애착 즉 학대적인 유대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대적인 유대는 연쇄적인 학대로 이어진다. ― 93쪽.
무엇보다 부엌에 놀랐다. 냉장고가 있고 가스레인지가 있다. 시설에선 조리된 음식이 식당에 운반되어온다.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도 가스 불을 사용해 요리하는 모습도 아니, 생활공간 속에 요리를 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 가장 놀란 건 ‘냄새’였다. 2층 아키라의 방에서 놀던 다쿠미는 아래층 부엌에서 올라온 햄버그스테이크 굽는 냄새에 “이게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도대체 뭐야!” 하며 잽싸게 1층으로 뛰어내려 왔다. 부엌으로 들어온 다쿠미는 냄새뿐 아니라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된장국 냄비에서 올라오는 증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하얀 연기는 뭐야!” ― 134쪽.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자기 마음속엔 깊은 상처가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친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아이들끼리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커가요. 저도 한 애가 문제 행동을 일으켜도 아이가 많으니 정신이 분산되어서 집요하게 몰아세울 수 없거든요. 서로에게 도피처가 되어줄 수 있으니 이런 공동 양육이 좋은 것 같아요.” ― 178-179쪽.
스기야마는 아동 학대를 ‘제4의 발달 장애’라고 이름 붙였다. 학대는 대뇌의 여러 영역에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데, 부주의한 행동을 보이거나 행동 제어에 어려움을 겪는 ADHD적인 증상,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현 순간을 벗어나는 데만 급급한 행동 등은 언뜻 보기에 광범성 발달 장애처럼 보인다고 한다. 학대가 장애라는 심각한 손상을 아이에게 입힌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다. 마음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 여겼던 안일한 인식이 무너지면서 한없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학대는 뇌 전체의 성장에 물리적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뇌 영상 촬영 진단으로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귀를 의심했다. ― 106쪽.
“다쿠미는 4학년 때 ‘어른이 된다는 건 무서운 일이지. 난 죽는 게 나아’라는 말을 했어요. 그렇지 않다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자신도 타인도 소중히 여기면 나중에 커서 적더라도 돈을 벌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나라는 사람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다쿠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174쪽.
왜 그렇게까지 생부모를 갈망하는 걸까. 자신을 두고 떠 난 사람인데도. 마스자와는 키워드가 ‘상실’이라고 설명한다. “아이는 양육자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버려지듯이’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 보내지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버려지는’ 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강하게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를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할 때 이는 커다란 상실 체험이 되어 아이를 괴롭힙니다. 학대라고 하면 트라우마라는 상처받은 체험을 주로 거론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상실입니다.” ― 226쪽.
한 지붕 아래 사는 아이와 어른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마음, 이는 서로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리라. 배려하고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공감하는 관계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도 학대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안정된 가정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희망으로 향하는 갈림길은 어디에 있을까. 한 위탁모가 명쾌하게 답한다.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없는가.” 뿌리, 이는 존재의 근간이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둘러싸인 안심할 수 있는 장소. 그곳이 아이가 뿌리내릴 집이다. ― 304쪽.
인생의 첫 몇 년 동안 겪은 일로 그들은 평생 고통과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얻고 그곳에 뿌리를 뻗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엄마 아빠, 같은 고통을 품은 형제자매와 함께 자기 속도에 맞춰 느리지만 천천히,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아이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빛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잘 품고 지켜줘야 한다. 아이가 지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학대 피해 아동의 ‘그 후’는 보여준다. ― 337-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