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귀야행
- 483
저자소개
지은이 : 송경아
책정보 및 내용요약
목차
백귀야행
히로시마의 아이들
열다섯, 서른다섯
하나를 위한 하루
고통의 역사
작품에 부쳐
작가의 말
편집자 추천글
"우렁총각이라면 하나 갖고 싶지. 내가 돌봐야 하는 남편은 싫어."
생활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과의 관계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에는 우렁각시 대신 ‘우렁총각’이 등장한다. 심지어 이 우렁총각은 홈쇼핑에서 할부로 구입할 수 있다. 결혼을 부추기는 사촌언니로부터 우렁총각을 선물받은 소현. 유리 수조 안에 들어 있는 주먹만 한 우렁이는 ‘우렁이가 사람으로 변했을 때 마주치지 말라’는 주의사항 하나만 지키면 사람이 없을 때 총각으로 변신해 가사 도우미 역할을 놀라울 정도로 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파경을 맞은 사촌언니와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은 우렁총각을 보게 되고, 우렁총각은 우렁이로 돌아가지 않고 소현에게 결혼해달라 요구한다.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는 남자들이 당연하게 받고 있는 돌봄노동이 오히려 여자들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억울함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돌봄노동의 혜택만 누리고, 그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를 살피지 못한 소현의 반성으로까지 이어져, 우리가 늘 잊고 살지만 모든 ‘서비스’ 뒤엔 노동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표제작 「백귀야행」은 봄날 대학가에서 귀신들이 횡행하는 이유를 판소리 사설조로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국문학과 대학원생 미연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고학력 여성들의 삶의 애환을 자조 섞인 유머로 유쾌하게 펼쳐 보인다. 작가는 ‘석박사 과정을 끝내면 취직할 수 있는 반경이 넓어진다는 희망이 있었으나 이제 그런 희망은 무너졌다’며,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면서, 동시에 생활력은 별로 없고 공부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피소”가 된 대학원의 위태로운 구조를 “현실에 밀착할 수도 없고 현실을 떠날 수도 없는 귀신들의 행진처럼”(219쪽)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미 탄생해버린 원자폭탄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던 일들은, 되돌릴 수 없다."
상실과 고통의 상처가 만들어낸 삶의 부스러기
「히로시마의 아이들」은 성폭행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상처를 원자폭탄의 강력한 폭력성에 빗대 상징적 비유와 함께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열 살 때 사촌오빠한테 성폭행을 당한 ‘나’는 그 뒤 병적으로 남자들을 피해 다닌다. 유일하게 편한 남자는 같은 과의 성훈으로, 그는 히로시마에 징용 나간 할아버지의 피폭이 원인이 되어 소아마비를 앓아 남성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은 남 몰래 비밀스레 간직한 서로의 상처를 내보이며 섹스를 통해 보통 연인들처럼 되어 보고자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송경아 작가는 가족의 본질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가족 해체의 시대라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로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이 관계는 「하나를 위한 하루」의 형의 말처럼 “벗어버리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옷, 잠겨버리고 싶어도 밀어내는 물. 부정하고 싶어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뿌리”(162쪽) 같은 것이다. 서른다섯 이모의 이혼 생활과 열다섯 조카의 임신중단 수술을 통해 가족에게 어떤 도움도 이해도 지지도 받을 수 없는, 결국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처를 안은 어른과 아이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라는가 하면(「열다섯, 서른다섯」), 죽은 아내의 유전자로 탄생한 딸 하나를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아버지를 위해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내기도 한다(「하나를 위한 하루」). 「고통의 역사」에서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삶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이 아이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오히려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지 하는 후회를 담았다.
『백귀야행』은 현실과 환상성의 공존,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묘사, 실험성 강한 다양한 문체로 여성의 자의식과 사회의 관계 맺음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질문을 보여준다. 세상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는 비루하고 허랑한 영혼들이 밤거리를 헤매 다니는 이야기는, 현실에 밀착할 수도 없고 현실을 떠날 수도 없는 우리의 삶을 서늘하게 돌아보게 한다.
추천사
송경아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이 시대의 고통을 말한다. 때로는 대학원생 귀신의 구성진 해학으로,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때로는 실패한 관계에 대한 회한으로, 때로는 출구를 찾지 못한 방황으로. 이 소설집에서 나는 고통과 상실을 여러 방향에서 비스듬히 바라보는 존재들을 만났다. 상실에는 잔여물이 남는다. 잃어버린 것이 사라진 다음의 삶에는 아무리 빗질을 하고 닦아내도 남는 잔해가 있다.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발에 밟히는 부스러기가 있다. 상실과 고통과 좌절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이 잔여물을 인지하는 것은 때로 고통을 직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작가는 이 마주하기조차 어려운 잔여물을 본다. 도무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랑이나 미움 같은 감정을 차마 얹기 두려운 잔여물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에도 사랑이 있다고. 직면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기 남은 이 사랑의 흔적을 보라고.
-정소연(변호사, SF 작가)
책 속 문장
“우렁총각이라면 하나 갖고 싶지. 내가 돌봐야 하는 남편은 싫어.”-9쪽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
항상 제로 상태인 것과,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상태를 이루는 게 정말 같은 것일까. 어쩌면 상처를 주거나 받더라도 생활이라는 구덩이에 빠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39쪽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
계집아, 이 계집아가 하는 소리 좀 봐라. 암컷이 나이가 찼으면 얼렁얼렁 짝을 찾아 부모 무릎에 새끼를 안겨드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돈도 안 나오고 장래에 대한 투자도 되지 않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국문학 공부를 한다고 집 밖에 나가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는 것도 가만 참고 앉았더니만, 이제 돈을 더 내놔라?-47쪽 「백귀야행」
자연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하니 멀쩡한 사람도 귀신이 들려 2년 3년 후면 이광수 염상섭 김동인을 지 애비 에미보다 더 찾으며, 모더니즘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에 루카치 데리다 들뢰즈 라캉을 목마른 술꾼 아침에 냉수 들이켜듯이 하니 가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버텨내기 어려운 복마전이라.-51쪽 「백귀야행」
미연이 이미 제가 귀신인 줄은 모르고 술 취한 정신에 웃으며 밤하늘을 향해 소리치니, 봄날 대학가에서 귀신들이 횡행하는 백 가지 이유 중 하나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이다.-69쪽, 「백귀야행」
원자폭탄은 인간의 강력한 권능과 사악함과 무력함을 한꺼번에 알게 해준다. 하지만 이미 탄생해버린 원자폭탄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되돌릴 수 없다…….-75쪽, 「히로시마의 아이들」
그의 주먹은, 그의 발길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것이 더 슬펐다. 몸을 웅크리고 아프지 않은 그의 손발을 막으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왜지?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저 사랑하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104쪽 「히로시마의 아이들」
이런 경험을 얼마나 많이 한 후에 너는 어른이 되겠니. 지금이야 죄책감을 느끼면서 네가 기다리는 여자애를 평생 책임질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군대 가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앞으로 네가 겪을 비슷한 경험은 몇 번이나 더 될까. 좀 더 심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결혼해서도 과연 이런 경험을 벗어날 수 있을까. -112쪽 「열다섯, 서른다섯」
내 열다섯 살 때, 거리는 이렇게 넓고 갈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많았던가. 분명히 자신이 지나온 길인데도, 지금 거리를 헤매고 있을 열다섯 살 여자아이가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을 서른다섯의 은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134쪽 「열다섯, 서른다섯」
“가족이란 그런 거다. 벗어버리고 싶어도 벗을 수 없는 옷, 잠겨버리고 싶어도 나를 밀어내는 물. 부정하고 싶어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뿌리. 그렇지만 뛰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잘라버리고 싶은 사지. 내가 한 이야기가 고릿적 이야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현재보다 더 생생하게 돌아오는 건 오래된 것들이야. 내가 우주에 있으면서 제일 뼈저리게 알게 된 일이 그거다.”-162~163쪽 「하나를 위한 하루」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위안이 되는 것은 사망선고가 내려진 순간, 희연이의 고통의 역사는 끝났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희연이의 창백한 얼굴. 그 얼굴은 무릇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에게 진정으로 고통이 역사하기 시작했다. -217쪽 「고통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