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스포츠 최초의 영웅들 (징검다리 역사책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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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김은식
그린이 : 이해정
책정보 및 내용요약
스포츠 경기에서 약한 팀이 강한 상대를 이겼을 때 우리는 큰 박수를 보냅니다.
선수들에게서 희망과 용기를 얻기 때문이지요. 자전거왕 엄복동,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만능 스포츠 천재 이영민, 축구왕 김용식, 여자 농구의 전설 박신자….
이분들은 식민지 통치, 전쟁, 가난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약하고 힘들었을 시기에 가슴 벅찬 승리감을 선물한, 한국 스포츠 최초의 영웅들이었습니다.
목차
1장. 스포츠광 질레트 목사, 조선에 스포츠를 전하다
2장. 자전거왕 엄복동, 식민지 조선에 용기를 주다
3장. 고개 숙인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잃어버린 나라를 생각하다
4장. 홈런왕 이영민, 한국 야구의 씨앗을 심다
5장. 퇴학생 김용식, 올림픽 축구장에 서다
6장. 박신자 선수, 세계 농구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편집자 추천글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하다
‘국가대표’는 흔히 운동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정치가나 위인들보다도 오히려 축구, 야구, 농구 같은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 무대에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맞서 이길 때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짜릿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런 과정에서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한국 근대 스포츠 100년의 역사
1920년에 조선체육회가 설립된 후 한국 근대 체육은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일찍 1904년부터 미국에서 온 선교사 질레트가 YMCA에서 청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한국 스포츠의 역사는 식민지, 전쟁, 산업화라는 한국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한다.
모두에게 힘을 주고, 기쁨을 주었던 스포츠 선수들의 이야기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힘과 기쁨을 주었던 스포츠 선수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수들이 보여준 것은 멋진 기량만이 아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강한 상대에도 주눅 들지 않는 패기, 그리고 끝내 이루어낸 승리의 기쁨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얻은 마음의 힘들이 모여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내용 소개
자전거왕 엄복동, 우승기를 꺾어버리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숨죽였던 울분이 다시 터져 나온 곳은 다름 아닌 자전거 경기장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엄복동이라는 최고의 사이클리스트가 있었다. 엄복동은 판판이 ‘일본놈들’을 이기는 영웅이었다. 1920년 5월 2일,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경복궁 경무대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에서 엄복동이 1위로 달리고 있었다. 수만 명의 관중들이 환호하며 엄복동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순간, 주최 측이 대회 중단을 선언해 버린다. 엄복동에게 1등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였다. 화가 난 엄복동이 단상으로 달려가 우승기를 확 분질러 버리고, 한국인 관중들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주최 측은 엄복동에게 1등을 주겠다며 싹싹 빈 후에야 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최초의 홈런 타자, 이영민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이영민 선수는 만능 스포츠 천재로 불렸다. 주종은 야구였지만, 축구도 잘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축구왕 김용식 선수와 함께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였다. 1928년 6월 8일, 동대문에 새로 지은 경성운동장의 야구장에서 벌어진 경기에는 많은 관중이 들어찼다. 그날 이영민 선수는 국내 최초로 담장을 넘기는 장외 홈런을 때렸다. 당시 가운데 담장까지는 110미터 거리였다. 물론 그 전에도 홈런은 있었다. 다만 담장을 갖춘 대규모 운동장이 없었기에 공이 운동장 밖으로 굴러가거나 화단에 박히면 타자가 홈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홈런’으로 인정되었다. 우리나라 야구사에서 첫 장외 홈런의 역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남승룡 선수가 손기정 선수를 부러워한 이유는?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렸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을 지상 최대의 스포츠 행사로 연출했다. 그러한 올림픽 무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라톤 경기였다. 일본은 이미 세계 최고 기록을 갖고 있는 손기정 선수를 내세워 선전 효과를 볼 속셈이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는 선물로 받은 월계수 화분을 들고 있었다. 3위를 한 남승룡 선수는 훗날 “손기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세계적인 기량을 갖고도 식민지 출신이기에 받았던 설움이었다. 이날 두 청년 선수의 설움은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 여자 농구, 세계 농구사의 기적을 쓰다
1964년, 한국 여자 농구팀이 처음으로 세계 대회에 출전했다. 6·25전쟁이 끝난 지 겨우 십여 년이 지났을 때였다. 한국 여자 농구팀은 세계적인 강팀 체코와 유고를 상대하면서 8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 중심에 센터 박신자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3년 뒤에 열린 다음 대회에서 세계 농구사의 기적이 일어났다. 대회국 체코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들이 스스로 김치를 담가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사정이었지만, 박신자 선수가 이끄는 한국 여자 농구팀이 체코, 유고슬라비아, 일본, 동독을 차례로 격파하고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남녀를 통틀어, 우리나라가 단체 구기 종목에서 세계 대회 결승에 오른 최초의 기록이었다.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 코리아가 세계로 다시 뻗어나가는 출발점에는 1960년대 여자 농구팀의 신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