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의 작은 마을 밤섬 (징검다리 역사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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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이동아
그린이 : 강전희
지은 책으로 『한이네 동네 이야기』, 『한이네 동네 시장 이야기』, 『어느 곰인형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린 책으로 『춘악이』, 『나무마을 동만이』, 『울지 마, 별이 뜨잖니』, 『편지 따라 역사여행』, 『나는 바람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있습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한강 한가운데에 밤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철새들이 찾아드는 도심 속 습지지요.
그런데 이곳은 원래 오래전부터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답니다.
밤섬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왜 지금은 마을이 사라졌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밤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 목수 할아버지가 지금은 사라진 밤섬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편집자 추천글
지금은 사라진, 밤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이 살았던 밤섬
한강 한가운데에는 밤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철새들이 찾아드는 도심 속 습지이지요. 그런데 이곳은 원래 오래전부터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밤섬 마을에는 4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는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배 목수들이 많았습니다.
잊혀 간 밤섬 마을
그런데 이 밤섬은 1968년 여의도 개발 과정에서 폭파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도 부근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새로 개발한 여의도에 아파트와 여러 건물이 화려하게 들어서는 동안 밤섬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마지막 밤섬 배 목수 이일용 할아버지
이 책의 저자 이동아 선생님은 2005년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서 열린 밤섬 부군당 굿을 보러 갔습니다. 부군당 굿은 밤섬 주민들이 옛날부터 매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 온 마을 행사였습니다. 이곳에서 저자는 배 목수였던 이일용 할아버지를 만났고,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밤섬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주민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사라졌던 밤섬 마을이 이일용 할아버지가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 서서히 다시 나타났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사라져 간 마을과 사람의 역사
대한민국은 60~70년대 산업화시기 동안 많은 개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 오랫동안 살아 온 정든 집을 떠나고, 가족같이 지내던 이웃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자연히 그 마을의 역사도 사라지게 되었지요.
밤섬은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우리가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내 고향은 바로 저기, 밤섬이야."
배 목수들의 마을
밤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고려 시대에 밤섬은 죄인들이 사는 유배지였다고 합니다. 그 후로 나라에서 뽕나무나 약초를 심는 땅이었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배 목수들의 마을로 자리 잡았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배 목수일까요? 그건 밤섬이 조선 시대의 가장 큰 포구인 마포, 용산, 서강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에서 크고 작은 배들이 다 모이는 포구 앞이다 보니 자연스레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이 많았던 겁니다.
밤섬을 지켜 주는 부군당
밤섬에는 아주 특별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밤섬의 수호신인 ‘부군님’을 모신 부군당이지요. 주민들은 매년 설 이튿날이면 부군당에 모여 밤섬 사람들이 한 해 동안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지내기를 기원하며 굿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준비하고 굿이 끝나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밤섬 마을의 큰 축제였답니다.
나룻배 타고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밤섬 아이들은 강 건너 서강공립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매일 책 보따리를 싸매고서 나룻배를 타고 학교에 갔지요. 더운 여름에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한강에서 수영해도 괜찮으냐고요? 그때 한강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했답니다. 그리고 밤섬 아이들은 모두 꼬마 수영 선수들이었고요.
밤섬에서 겪은 전쟁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이일용 할아버지는 그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바로 한강 인도교 폭파를 밤섬에서 목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는 밤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국민학생이었던 이일용 할아버지는 새벽에 ‘꽝!’ 하는 소리에 밖에 나갔다가 다리에서 차와 사람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합니다. 다리가 끊어지자 서울 시민들은 한강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이일용 할아버지는 호기심에 밤섬 나루에 있던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갔습니다. 배가 닿자 강가에 서 있던 피난민들이 금세 모여들었습니다. 피난민들은 서로 배에 타려고 밀치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할아버지는 몇 번이고 강을 오가며 피난민들을 밤섬으로 무사히 데려다 주었습니다.
“배 만드는 일이 쉬운 게 아니야.”
이일용 할아버지는 배 목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배 목수이셨지요. 이일용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배 만드는 일을 할 때 조금씩 도와주면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배 목수가 되려면 어떤 사람은 10년 동안이나 남 밑에서 조수로 일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배 만드는 일이 어려웠던 거지요. 이일용 할아버지는 어엿한 기술자가 된 후 밤섬은 물론이고 배 주문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지 가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1960년대까지 일을 하셨지요.
지금은 한강에 댐이 생기면서 배가 다닐 수 없고, 사람들도 나무로 만든 배를 찾지 않으니까 배 만들 일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집에는 지금도 그때 쓰던 연장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답니다.
밤섬이 사라지다
1968년 2월 10일, 김현옥 서울 시장은 밤섬 폭파 장치의 단추를 눌렀습니다. ‘꽈꽝!’ 하는 소리와 함께 수 백 년 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밤섬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왜 밤섬을 없앤 걸까요? 다름 아니라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석재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의도를 빙 둘러싸는 둑을 쌓으려면 엄청난 양의 돌과 자갈이 필요했던 거지요. 어찌되었든 그 바람에 밤섬 주민들은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밤섬을 떠나야 했습니다.
와우산 5계단 마을
한 날 한 시에 마을에서 쫓겨난 밤섬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울시는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와우산 기슭을 깎아 집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민들은 마치 거대한 계단 같은 그 땅에 직접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밤섬에 있던 부군당도 옮겨 왔습니다. 그곳은 이제 제2의 밤섬 마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비록 낯선 곳이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했지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부군당 굿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와우산 5계단 마을도 재개발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우뚝 들어섰지요. 마을 사람들도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군당은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답니다. 밤섬 사람들은 매년 부군당 굿을 치르면서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개발에 떠밀려 두 번이나 정든 삶터를 떠나야 했던 밤섬 사람들이지만, 부군당 굿이라는 마을 의례를 계속 치르면서 고향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로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었답니다.
밤섬 자세히 들여다 보기
그림 지도로 복원된 밤섬 마을
밤섬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희미한 사진 몇 장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일용 할아버지는 떠난 지 50년 가까이 된 밤섬 마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배 짓던 너믄둥개, 빨래하던 돌방구지, 부군당이 있던 당잿말 등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있던 밤섬 곳곳이 그림 지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봄가을에는 배 만들고, 겨울에는 얼음 뜨고
밤섬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주로 배 만드는 일을 했지만, 겨울에는 꽁꽁 언 한강에서 얼음을 떠내 팔았습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잠실에서 생산된 배추나 열무를 배로 옮기는 일도 했답니다. 그 밖에도 얼음낚시, 모래채취, 장어잡이 같은 많은 일거리들이 있었습니다.
밤섬 사람들의 주업인 배 짓기
밤섬에는 대대로 배 목수들이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배 목수이면 아들도 직업을 물려받아 배 목수가 되고는 했지요. 배 만드는 데 필요한 나무는 강 건너 마포와 용산 목재소에서 가져 왔습니다. 나무판을 자르고 이어 붙여 배 몸통을 만들고 나면 얇게 떠 낸 나무 껍질로 배의 틈새를 메워 물이 새지 않게 했습니다. 배를 다 짓고 나면 물가로 끌고 가 띄웠습니다. 이때 큰 밧줄로 배를 묶어서 끌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함께 줄을 당겼습니다.
밤섬 폭파하던 날
밤섬은 모래밭인 여의도와 달리 단단한 암반으로 된 섬이었습니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엄청난 양의 돌과 자갈이 필요했던 서울시는 밤섬을 폭파하고 거기서 나온 석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오랜 세월 이어진 밤섬과 밤섬 마을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살아난 밤섬
밤섬이 폭파된 후 그 자리에는 상류에서부터 모래와 흙이 떠내려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땅에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철새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밤섬은 매년 평균 4,400제곱미터씩 넓어져 원래보다 6배나 큰 섬이 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람사스 습지 위원회에서 밤섬을 세계에서 하나뿐인 도심 습지로 지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