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자료와 해석 (노태돈 교수 정년기념논총 2)
- 1831
저자소개
지은이 : 노태돈 교수 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권-
서의식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동이 연구의 맥락과 과제」
문창로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한국 고대 건국 신화의 이해 방향」
홍승우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
「한국 고대 국가와 율령律令」
고미야 히데타카(小宮秀陵)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초빙교수
「조공·책봉을 둘러싼 논의와 고대 대외관계사 연구: 견당사(遣唐使)의 시대를 중심으로」
송호정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청동기시대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를 둘러싼 최근 연구 동향」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고구려 왕릉 연구의 어제와 오늘」
김영관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의자왕과 백제 멸망에 대한 새로운 시각」
송기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발해사 연구의 길」
윤재운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발해 도성 연구의 현황과 과제」
기경량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한국사에서 민족의 개념과 형성 시기」
김창석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공동체론」
김재홍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고대 개발론」
홍기승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수장제론(首長制論)의 기초적 이해」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정보화실장
「한국 고대의 교역사 연구에 있어서 개념의 문제」
오영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낙랑군 연구와 식민주의」
윤선태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가야(加耶),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이재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신라사 연구에 있어서 ‘귀족’ 개념의 도입 과정」
김수태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역사 연구 방법으로서의 유형화: 이기백의 사상사 연구를 중심으로」
이순근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일본 ‘동아시아’ 용어의 함의」
이성시(李成市) 와세다대학교 문학학술원 교수
「고대사 연구와 현대성: 고대의 ‘귀화인’, ‘도래인’ 문제를 중심으로」
(古代史硏究と現代性: 古代の‘歸化人’‘渡來人’問題を中心に)
박성현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사 지리에서 공간 구조로」
여호규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고대 공간사 연구의 가능성 모색」
강봉룡 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에서 바닷길과 섬」
김영심 가천대학교 글로벌교양대학 교수
「한국 고대 여성사 연구 현황과 연구의 진전을 위한 제언」
권오영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 연구를 위한 베트남 자료의 활용」
조법종 우석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고조선 및 시조 인식의 계승 관계」
리차드 맥브라이드(Richard D. McBride II) 브리검영대학교-하와이 역사학과 교수
「고구려 불교의 의례와 수행에 관한 고찰(考察)」
(Imagining Ritual and Cultic Practice in Kogury Buddhism)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원
「신라시대 인간관계 양상의 변화와 청해진(淸海鎭)」
권덕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역사관광학과 교수
「중국 산시성 시안의 일본승 구카이(空海) 기념물」
-2권-
나희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설화와 의례의 해석과 역사 읽기」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구려 멸망론의 설화적 파생」
이상훈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
「검모잠의 최초 거병지 검토」
전덕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원전原典과 활용」
이노우에 나오키(井上直樹) 교토부립대학교 문학부 역사학과 교수
「6세기 후반 신라의 대외 관계와 대왜(對倭) 교섭」
(6世紀後半の新羅の?外?係と?倭外交)
정병삼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구법승과 신라 불교」
남동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혜초(慧超)와 『왕오천축국전』의 연구」
신동하 동덕여자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해동고승전』-사료의 활용 현황」
마크 바잉턴(Mark E. Byington)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상임연구원
「기원전 45년의 낙랑군 호구부와 패수의 위치 비정」
(The Lelang Census of 45 BC and the Identification of the P’ae River)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광개토왕비의 건립 과정 및 비문 구성에 대한 재검토」
조나단 베스트(Jonathan W. Best) 웨즐리언대학교 미술 및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왕자 복호(卜好)와 「광개토왕릉비」 명문(銘文): 초기 고구려-신라 관계에 대한 약간의 해석」
(Prince Pokho and the Kwanggaet’o Stele Inscription: A Small Elucidation of Early Kogury-Silla Relations)
김수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포로와 지배층에 대한 문헌과 묘지명의 기록」
윤용구 인천도시공사 문화재 담당
「『진서』 동이(東夷) 조공 기사(朝貢記事)의 재검토」
강종훈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양직공도의 사료적 가치와 독법」
주보돈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백제사 관련 신출토(新出土) 자료의 음미」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여신라왕김중희서(與新羅王金重熙書)」로 본 헌덕왕의 즉위 사정」
강현숙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환런 왕장러우(望江樓) 적석총으로 본 주몽설화」
강진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
「평양도읍기 고구려 왕릉의 선정과 묘주(墓主) 비정」
조영현 대동문화재연구원 원장
「지안(集安) 장군총의 분구에 관한 몇 가지 검토」
박찬규·정경일 연변대학교 역사학부 교수·연변대학교 역사학부 강사
「새롭게 발굴된 호남리 18호 벽화무덤에 대하여」
전호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구려 유적·유물로 본 한국 문화의 원형」
최종택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5~6세기 고구려 남진 경영의 고고학적 증거」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발굴에서 해석까지: 정지산 유적의 사례」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6세기 백제 기와를 보는 시각」
김세기 대구한의대학교 관광레저학과 교수
「가야 제국(諸國)의 존재 형태와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정치적 성격: 묘제와 출토 유물을 중 심으로」
김복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국사학과 교수
「신라 왕릉과 경주 괘릉(掛陵)」
정영진 연변대학교 발해사연구소 교수
「부거리 동경용원부설에 대한 재검토」
김종일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독일 바이에른 지역 신석기 말기 벨 비이커 문화의 어린이 무덤과 사회적 정체성」
l 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l (가나다순)
위원장
신동하(동덕여대)
간행위원
강봉룡(목포대), 강종훈(대구가톨릭대), 고경석(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권오영(한신대),
김기흥(건국대), 김영심(가천대), 김영하(성균관대), 김재홍(국민대), 김종일(서울대),
김창석(강원대), 김태식(홍익대), 나희라(경남과학기술대), 남동신(서울대), 서영대(인하대),
서의식(서울대), 송기호(서울대), 송호정(한국교원대), 여호규(한국외국어대), 오영찬(이화여대),
윤선태(동국대), 이우태(서울시립대), 이한상(대전대), 임기환(서울교대), 전덕재(단국대),
전호태(울산대), 주보돈(경북대), 하일식(연세대)
책정보 및 내용요약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궁극적인 과제는 사료의 한계를 극복해서 역사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데 있을 것이다. 사료의 한계는 상고(上古)로 올라갈수록 심각해,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고조선에서 삼한에 이르는 역사 전개의 대강만이라도 알기 위해 고고 발굴의 성과에 주목하고 인접 학문의 일반론적 가설을 원용해서 사료를 재해석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고대사 연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문헌 고증을 넘어 다양한 방법론을 활용한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금석문과 목간 등 새로운 문자 자료의 발견으로 연구 내용이 심화되고 주제도 다변화되어 고대사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인식도 가능해졌다. 또한 최근 학계 차원에서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 성과에 대한 정리와 평가가 다양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사의 대표 학자로 학계를 이끌어오고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해낸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의 정년을 기념해 지난 반세기 한국 고대사 연구 성과를 총결산하고 있다. 또 그동안 집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법론을 부단히 개발해 연구의 지평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한 국내외 58명의 고대사 연구자가 기존의 문헌 사료와 고고 자료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서 연구 내용을 더욱 심화시켜 한국 고대사상을 다채롭게 구축해냈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펴낸 이 책을 통해 지금의 한국 고대사 연구 과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고,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한국 고대사 인식체계를 정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 고대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해,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흐름과 방법론’을 다룬 1권에서는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주제와 이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동이의 실체,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 고조선 중심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소개했으며, 민족의 개념과 형성 시기, 공동체론, 수장제론, 고대 개발론, 공간사론 등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널리 사용된 이론을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하거나 새로운 이론에 기초해 연구의 지평을 확장할 것을 제안한 논고들을 실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한국 고대사에서 널리 사용된 용어나 개념, 이론에 대한 이해를 한층 심화할 뿐만 아니라, 향후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시각을 다양화하고 연구의 새로운 경향을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의 재해석과 활용’을 다룬 2권에서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본 사료인 문헌 자료, 금석문과 목간을 비롯한 새로운 문자 자료, 고고 미술 자료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 경향을 다루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왕오천축국전』, 광개토왕릉비, 낙랑과 백제 목간 등을 새롭게 해석한 연구들을 소개했으며, 고구려 왕릉과 고분벽화, 백제와 가야, 발해의 유물·유적을 활용한 연구들을 실었다.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문헌과 문자 자료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물질 자료를 기초로 어떠한 과정과 방법을 통해 구체적인 역사상(歷史像)을 구축하는가를 생생하게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부 문헌 사료의 새로운 해석
설화와 의례의 해석과 역사 읽기 _ 나희라
고구려 멸망론의 설화적 파생 _ 이강래
검모잠의 최초 거병지 검토 _ 이상훈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원전(原典)과 활용 _ 전덕재
6세기 후반 신라의 대외관계와 대왜(對倭) 교섭 _ 이노우에 나오키
구법승과 신라 불교 _ 정병삼
혜초(慧超)와 『왕오천축국전』의 연구 _ 남동신
『해동고승전』-사료의 활용 현황 _ 신동하
2부 금석문 및 문자 자료의 분석
기원전 45년의 낙랑 호구부와 패수의 위치 비정 _ 마크 바잉턴
광개토왕비의 건립 과정 및 비문 구성에 대한 재검토 _ 임기환
왕자 복호(卜好)와 「광개토왕릉비」 명문(銘文): 초기 고구려-신라 관계에 대한 약간의 해석 _ 조나단 베스트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포로와 지배층에 대한 문헌과 묘지명의 기록 _ 김수진
『진서』 동이(東夷) 조공 기사(朝貢記事)의 재검토 _ 윤용구
양직공도의 사료적 가치와 독법 _ 강종훈
백제사 관련 신출토(新出土) 자료의 음미 _ 주보돈
「여신라왕김중희서(與新羅王金重熙書)」로 본 헌덕왕의 즉위 사정 _ 이문기
3부 고고 미술 자료의 활용
환런 왕장러우(望江樓) 적석총으로 본 주몽설화 _ 강현숙
평양도읍기 고구려 왕릉의 선정과 묘주(墓主) 비정 _ 강진원
지안(集安) 장군총의 분구에 관한 몇 가지 검토 _ 조영현
새로 발굴된 호남리 18호 벽화무덤에 대해 _ 박찬규·정경일
고구려 유적?유물로 본 한국 문화의 원형 _ 전호태
5~6세기 고구려 남진 경영의 고고학적 증거 _ 최종택
발굴에서 해석까지: 정지산 유적의 사례 _ 이한상
6세기 대 백제 기와를 보는 시각 _ 이병호
가야 제국(諸國)의 존재 형태와 부산 연산동 고분군의 정치적 성격: 묘제와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_ 김세기
신라 왕릉과 경주 괘릉(掛陵) _ 김복순
부거리 동경용원부설에 대한 재검토 _ 정영진
독일 바이에른 지역 신석기 말기 벨 비이커 문화의 어린이 무덤과 사회적 정체성 _ 김종일
Prince Pokho and the Kwanggaet’o Stele Inscription _ Jonathan W. Best
노태돈 교수 약력 및 연구 논저
필자 간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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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추천글
주요 내용
- 2권-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원전(原典)과 활용_전덕재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둘러싸고 불신론과 긍정론, 수정론이 제기되어 논란이 분분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 즉 이사금 시기의 기록을 사료로 활용할 때는 사실성(事實性)과 기년(紀年)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접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라 초기의 역사상을 올바로 복원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사실성과 기년의 오류는 과연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은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기본 원전(原典)과 아울러 그것의 개찬(改撰)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신라본기 초기 기록 가운데 사실성에 오류가 없는 것들을 추출한 다음, 그것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명확하게 규정해 신라 상고기 역사상의 한 부분을 복원하는 방법론을 활용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삼국사기』의 찬자는 개수된 『국사』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구삼국사』를 가장 중요한 저본으로 활용하면서도 중국의 사서에서 전하는 내용을 일부 첨가해 신라본기 초기 기록을 완성했다고 정리한다.
혜초(慧超)와 『왕오천축국전』의 연구_남동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신라 출신의 승려 혜초가 8세기 초에 인도와 서역(西域)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남긴 여행기다. 이후 12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3월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프랑스 출신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왕오천축국전』은 7세기 전반 인도 및 서역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유일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발견 직후부터 동서양의 관련 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한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 결과 『왕오천축국전』 자체에 대한 문헌학적인 이해는 물론 『왕오천축국전』의 내용 분석을 통한 7세기 전반 인도 및 서역에 대한 이해, 그리고 찬자(撰者)인 혜초의 행적(인도로의 순례행과 중국에서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이 글을 통해 펠리오가 찾아낸 『왕오천축국전』과 혜림의 『일체경음의』에 인용된 『왕오천축국전』, 혜림이 직접 본 『왕오천축국전』 등 세 텍스트에 대한 비교 검토와 8대 탑의 구체적인 비정(比定), 혜초의 여정, 장안 체류 시절 혜초의 행적과 사상, 지난 100년간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선행 연구 성과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왕비의 건립 과정 및 비문 구성에 대한 재검토_임기환
광개토왕비문은 5세기 전후 시기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비문의 중요성만큼이나 그동안 수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 있고, 또한 논쟁적인 주제도 적지 않게 제기되었다. 광개토왕비는 우선 생김새부터 남다르다. 광개토왕비의 모습은 비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다른 사례가 없을 정도로 매우 독특하며, 그 크기도 거의 비교 예가 없을 정도로 크다. 그 독특한 형태와 그런 크기를 갖춘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점에 주목해 일반적인 비신 형태와는 다른 광개토왕비의 외형을 조명하고, 현 광개토왕비문은 훈적비와 수묘연호비라는 별도로 작성된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졌다는 시각에서 비문 구성에 접근한다.
광개토왕비는 당시 고구려인의 생각과 심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그렇기에 보다 다양한 시각과 문제의식에서 광개토왕비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백제사 관련 신출토(新出土) 자료의 음미_주보돈
1971년에 진행된 무령왕릉 발굴은 머지않아 백제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자료가 다수 출현하리란 사실을 마치 예고라도 해주는 신호탄 같았다. 과연 이후 잇따라 새로운 문자 자료가 꾸준히 출현해 백제사 연구를 추진해 나가는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무령왕의 생몰 사항을 알려 주는 묘지(墓誌)였다. 또 백제 말기의 왕도였던 부여를 중심으로 출토된 목간은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적이기는 하지만 여러 면에서 더없이 소중한 온갖 정보를 담고 있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백제사의 빈 구석을 메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 볼 만한 대상은 백제 문서 행정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지약아식미기(支藥兒食米記)’, ‘병여기(兵?記)’라는 이름이 붙은 세 점의 목간이다.
이 글은 이처럼 최근에 발굴되어 널리 알려진 자료를 바탕으로, 그동안 기본 사료를 단단히 다져가는 작업을 외면한 채 조급하게 해석에 매달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백제사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나간다.
고구려 유적 유물로 본 한국 문화의 원형_전호태
한국사에서 해당 사회와 문화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기록이나 유적·유물이 남아 전하는 시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문화적 흐름을 주도한 나라로는 고구려와 백제를 꼽아야 할 듯하며, 특히 고구려는 건국 및 성장 과정, 지정학적 입지 등에서 문화적 기반도 풍부했고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소화하는 데도 용이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 문화에서는 외래문화 수용에 대한 열린 자세, 새로운 문화 요소를 고구려적 관념과 가치에 어우러지도록 만들어가는 고구려식 소화 과정, 기존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 통합적 기능을 발휘하는 데 적합한 문화 산물로의 재창조 의지 등을 모두 읽을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립, 확산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한국인의 기질 및 정서상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요소들 가운데서도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소통·열림·공유, 신명·흥, 조화·어울림 등의 바탕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 글은 이처럼 고구려 문화에서 비롯되어 오늘날의 한국 문화로 이어지는 기질적 요소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해 확인한다. 고구려 유적·유물에 담긴 문화적인 성격과 전통에 대한 분석은 한국 고대 문화의 중심 줄기에 대한 이해의 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현대 한
국 문화의 뿌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문 속으로
-2권-
사금갑 설화에는 왕의 외유(外遊)와 동물들의 예지적 행동, 까마귀 내지 물에서 등장한 노인의 암시, 화살 쏘기, 왕의 목숨 구하기 등 많은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설화다. 그런데 이 설화는 그 기원이나 유래를 설명하면서 ‘오기일(烏忌
日)’이라는 의례와 연관을 시키고 있다. 이 의례의 의미를 여러 사회의 민족지와 민속자료들과 비교 검토해보면, 이것이 정월 대보름에 세계의 창조와 생명력의 갱신을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_ ‘설화와 의례의 해석과 역사 읽기’ 29~30쪽
구법승들은 신라의 불교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신라 불교는 전래 초기에 주술적인 요소를 많이 가졌지만, 불교가 보편적인 신앙으로 인식되고 불교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자 불교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이에 신라 왕실은 정책적으로 구법승을 중국에 보내 선진 불교를 배워 오게 했는데, 이들 구법승이 본국에 돌아올 때는 경전, 불상, 불사리 등을 가져와 신라 문화의 진전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구법승들이 기여한 분야는 불교 사상의 발전이다. 구법승들이 익혀 온 새로운 사상의 흐름과 새로 소개된 불전(佛典)의 전수는 신라 승려들이 중국에 가지 않고도 가장 높은 수준의 불교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이 바탕 위에서 독자적인 신라 불교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_ ‘구법승과 신라 불교’ 161~162쪽
역사 지리의 유용성은 아마도 한반도 최초의 정치체로 알려진 고조선과 한(漢) 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정복하고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사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사료 중에는 고조선과 낙랑군의 특정한 장소들과 지형적 특징들에 관한 문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한(前漢) 초의 고조선과 낙랑군의 경계를 형성한 패수(浿水)에 관한 문헌들이다. 이 패수가 지금의 어떤 강을 가리키는지 밝히는 것은 고조선과 랴오둥(遼東)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확실히 유용할지도 모른다. _ ‘기원전 45년의 낙랑군 호구부와 패수의 위치 비정’ 226쪽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의 나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은 392년에 김씨 왕족의 방계에 속한 젊은 왕자인 실성(實聖)을 고구려 조정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인질로 선택된 인물의 이름(실성) 및 인질을 보낸 시점(392)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사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인접 시기의 자료인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명문 및 13세기의 문헌인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서 확인한 정보?이 존재한다. _ ‘왕자 복호(卜好)와
「광개토왕릉비」 명문(銘文)’ 270쪽
〈양직공도(梁職貢圖)〉는 중국 남조의 양나라(502~557)에 조공을 한 주변 국가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에 관한 설명을 제기(題記)의 형식으로 덧붙인 두루마리 그림이다. 양 무제의 아들로 훗날 황제(원제元帝)의 자리에 오르는 소역(蕭繹)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재임 중이던 520~53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전해지는 것은 소역이 직접 그린 원본은 아니고 북송 시기인 1077년경에 모사된 것으로, 1960년대 초에 중국의 난징박물원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_ ‘양직공도의 사료적 가치와 독법’ 352~353쪽
환런(桓仁) 왕장러우(望江樓) 적석총에서 착장용 개인 장신구인 금제 귀걸이나 수레 부속구의 하나인 차관이 출토되었고, 그 유물이 푸예의 위수 라오허선 중층 분묘에서 출토된 것과 특징을 같이한다는 점은 고구려와 부여의 관련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질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부여에서 출자한 주몽 집단이 환런 일대의 선주 집단의 묘제를 채용했다고 해도 당시의 위신재로 볼 수 있는 착장용 개인 금공 장신구나 수레 부속구의 부장으로부터 주몽설화가 갖는 사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와 부여의 관련은 이후의 물질문화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_ ‘환런 왕장러우 적석총(望江樓)으로 본 주몽설화’ 471쪽
기왕에 평양도읍기의 고구려 왕릉으로 여겨졌던 고분들 중에 실제 왕릉으로 여겨지는 개체들은 전동명왕릉, 경신리 1호분, 호남리 사신총, 토포리 대총, 강서대묘, 강서중묘 등이다. 각 고분들의 묘주를 비정하자면 전동명왕릉은 장수왕, 경신리 1호분은 문자명왕, 토포리 대총은 안원왕, 호남리 사신총은 양원왕, 강서대묘는 평원왕, 강서중묘는 영양왕으로 추정된다. 진파리 7호분과 강서소묘의 경우 각기 고추대가 조다와 보장왕의 부친 대양왕이 묻혔을 것이다. _ ‘평양도읍기 고구려 왕릉의 선정과 묘주(墓主) 비정’ 493~494쪽
호남리 18호 벽화무덤은 안길과 주검칸으로 이루어진 지상식 외칸 석실봉토분이며, 무덤에는 사신 그림과 함께 넝쿨무늬, 둥근무늬, 별 그림, 고리무늬, 인동무늬, 꽃모양무늬 등이 그려져 있다. _ ‘새롭게 발굴된 호남리 18호 벽화무덤에 대하여’ 547쪽
백제는 무령왕 대와 성왕 대에 양 무제의 지원과 협력 속에 적극적으로 문물을 수입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백제는 이렇게 습득한 선진 문물을 주변의 신라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자산으로 활용했다. 그런 점에서 6세기 대 신라와 일본의 불교 수용 및 정착 과정에서 백제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주체적이며, 백제적인 불교문화를 주변 국가에 전수했다는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백제는 단순히 중국 문화의 전달자나 경유지가 아니라 신라나 일본의 초기 사원을 건설하는 데 기술자를 파견해 지원하는 등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확산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_ ‘6세기 백제 기와를 보는 시각’ 637쪽
괘릉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나오는 “신증(新增) 괘릉은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어떤 왕의 능인지 알 수 없다. 세속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중(水中)에서 장례를 지냈기 때문에 돌 위에 관을 걸어놓은 다음, 여기에 흙을 쌓아서 능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인해 괘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다. 즉 괘릉은 부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릉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물속에 장사를 치르게 되자 돌 위에다 관을 걸어놓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겼다면서 석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괘릉이라는 명칭은 나오는데 누구의 능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_ ‘신라 왕릉과 경주 괘릉(掛陵)’ 7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