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 시대를 엮다 - 사전으로 보는 일본의 지식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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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오스미 가즈오
하지만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당시 ‘일본문학협회’라는 민간 좌파 연구자 단체를 거점으로 일본문학 연구의 혁신을 제창한 고전학자 사이고 노부쓰나西鄕信綱였다. 그는 사이고 선생이 이끌던 작은 연구회에 참가하며, 정치사·사회구성사·법제사·사회경제사가 압도적인 주류였던 패전 후의 도쿄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예외적으로 사상사·문화사를 전공했다. 후에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문화 이론가가 된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에게 사이고 선생을 소개해 구미의 인류학이나 문학 이론 저작을 읽게 하고, 일본 전통문화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한 것도 오스미 가즈오였다.
1980년대 초 ‘일본의 여성과 불교’라는 연구회를 설립하여 일본사, 불교사, 일본문학, 미술사, 민속학, 여성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가하는 학제적인 연구회로 발전시켰다. 『시리즈 여성과 불교』로 정리된 이 연구회의 성과를 비롯하여, ‘문화의 역사는 전체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분과학문의 틀을 넘어 다양한 학문의 결집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학제적인 관점에서 저술과 연구를 계속해왔다.
홋카이도대학교 조교수(1964~1977), 도쿄여자대학교 교수(1977~2001)를 지낸 뒤 현재 도쿄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우관초를 읽다』 『중세 사상사의 구상』 『중세의 역사와 문학 사이』 『신앙의 세계, 은둔자의 마음』 『방장기에서 사람과 거처의 무상을 읽다』 『중세 불교 사상과 사회』 등이 있다.
옮긴이 : 임경택
책정보 및 내용요약
목차
1장 공적 지식의 체계화 - 『유취국사』 13
6국사의 분류와 재편성 l 국가가 집적한 지식을 체계화하다
『유취국사』의 분류 체계 l 『유취국사』가 남긴 전통
2장 일상 세계를 편집하다 - 『왜명유취초』 33
최초의 일본어 사서 l 미나모토 시타고의 불우한 생애
귀족의 일상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 l 『왜명유취초』가 미친 영향
3장 중세 귀족문화의 백과사전 - 『고금저문집』 55
설화집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세계 l 귀족문화의 구조에 따른 분류
편찬자 다치바나 나리스에 l 전통문화에 대한 동경
4장 ‘찾아보는 사전’에서 ‘읽는 사전’으로 - 『진대』와 『애낭초』 73
사원, 무사와 서민 교육의 중심 l 가마쿠라 시대의 지혜 주머니? 『진대』
무로마치 시대의 일반교양 ? 『애낭초』 l 공가문화 붕괴 이후의 새로운 생활문화
5장 인간사의 모든 것 - 『태평기』 95
군기물을 읽는 방법 l 오라이모노의 세계 l 시대의 상식
역사와 인생의 백과사전
6장 타자의 눈에 비친 일본 - 『일포사서』 113
일본어의 객관적 파악 l 일본 연구의 초석
선교사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 l 16세기 유럽과 일본의 만남
7장 인쇄본 백과사전의 출현 - 『화한삼재도회』 131
명나라 왕기의 『삼재도회』를 흉내 내다 l 현실세계에 대한 의사의 폭넓은 관심
그림으로 보는 에도 시대의 생활상 l 지식의 총체를 조망하다
8장 무가문화를 종합하다 - 『무가명목초』 153
60년에 걸친 편찬 사업 l 무가사회의 변화
화학강담소의 설립 l 무가문화의 총체
9장 서구의 백과사전을 번역하다 - 『후생신편』 171
유럽의 생활 지식, 쇼멜 백과사전 l 대외적 긴장 속에서 추진된 대사업
번역할 항목의 선정 l 『후생신편』의 운명
10장 가로쓰기 문자와의 격투 - 『하루마화해』에서 『삼어편람』까지 191
초기의 난화사서 l 영어와 불어 학습
외국인들의 일본어 사서 편찬 l 서구의 지식과 문화가 들어오는 통로
11장 메이지 일본인들의 왕성한 지식욕 - 『백과전서』와 『명치절용대전』 209
백과사전의 번역과 출판 l 가정백과사전의 편찬
통속 지식의 재편성
12장 전통에 기대어 미래를 구상하다 - 『고사유원』 229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다 l 『고사유원』의 구성
고난 가득한 편찬의 역사
13장 메이지 문화사의 절정 - 『일본백과대사전』 247
백과대사전의 편찬 l 국력의 상징 l 일본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관심
근대 일본 백과사전의 원류
후기 264
해설 266
옮긴이의 글 278
참고문헌 281
사전으로 보는 일본사 연표 282
찾아보기 285
편집자 추천글
사전, 시대를 잃다
2008년 10월,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의 개정판을 내면서 향후 종이 사전 출판을 중단하고,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는 전자 사전만을 펴내겠다고 발표했다. 2012년 3월, 244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종이 사전 출간을 중단하고, 디지털 형태로만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종이 사전의 몰락은 단지 매체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사전 편찬 인력의 몰락이기도 해서 국내 사전 출판사의 대부분이 이미 사전 편집팀을 해체했고, 그 결과 다수의 사전들이 10년 가까이 개정 없이 증쇄만을 거듭하고 있다. 신조어나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지 않은 수년 전의 콘텐츠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그대로 공급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표준적인 지식’일 거라 짐작하며 읽고 활용한다. 클릭 한 번으로 수십 개의 어학사전뿐만 아니라 분야별 백과사전까지 검색할 수 있는 ‘사전 대중화’의 이면에는, 이렇게 사전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못하고 고여 있는 지식이 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인류의 지知는 어떻게 축적되고 편집되어왔는가?
“외딴 섬에 홀로 단 하나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택하겠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소설, 우리의 시, 우리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이 이 책 안에 다 들어가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업적이다.” _ 영국의 전 수상 스탠리 볼드윈
이 책은 일본의 고대부터 근대적 백과사전이 성립한 1900년대 초까지를 통사적으로 살펴보는 ‘사전의 역사’이다. 사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든 지식과 문화, 생활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류, 집대성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구현된 문화 형식이다. 문자와 언어, 이야기, 도구, 기술 등 방대한 지적 산물을 축적해온 인류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하고 정리해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지를 부단히 고민해왔다. 사전은 컴퓨터 데이터베이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지의 축적과 편집, 전승을 가장 체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최적화된 방법이었다. 오늘날 구글, 네이버, 위키피디아 등 지식을 축적하고 정보를 큐레이션하는 여러 플랫폼이 시도하고 있는 일을 과거에는 사전이라는 형식이 담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전은 검색의 시초이자 편집의 기원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인간이 자신의 시대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장 검색하기 편리한 형태로 편집해온 사전의 발전상을 통해, 인류가 지의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해온 장구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가장 실용적인 매체
최근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랑’, ‘연애’, ‘애정’ 등의 정의를 이성애로 한정해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드러냈듯이, 사전은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사전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고 또 누가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사회의 지적, 정치적, 사회적 역량과 변화를 반영한다. 사전 편찬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의 내용과 범위,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를 결정하는 권력의 재편이나 사회변동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 책은 일본인의 지적 세계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온 대표적인 사전들을 연대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각 장에서는 고대 율령국가나 막부, 메이지 신정부 등의 국가 혹은 정권이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내용과 체계의 사전을 만들게 했는지를 집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세 귀족들의 한자 학습을 도왔던 『왜명유취초』, 무사들이 지배하는 시대의 상식과도 같았던 전투와 병법, 선대 무사들의 일화를 담은 『태평기』, 막부 체제의 절정기에 무가문화를 종합하고자 추진한 『무가명목초』, 중국의 백과사전 『삼재도회』의 가치를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지식들로 새롭게 구성한 『화한삼재도회』, 밀려드는 외세에 대응하기 위한 각종 외국어 사서와 서양 백과사전의 번역본 등 각 사전이 탄생한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사전 편찬이 단지 그 시대의 문화적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당대 권력의 정치적 요구나 지식인들의 지적 필요에 신속히 부응하기 위한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의 사업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전의 역사로 다시 쓰는 일본의 지식문화사
“백과사전적인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지식의 범위나 사유방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많다. 문자로 쓰여 책으로 전해진다는 제한은 있지만, 나는 백과사전적인 것을 만들어낸 정신의 계보와 백과사전적인 책의 세계를 더듬어가면서 사상이나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좌표를 찾아 확인해보고 싶었다.” _ 서문 중에서
이 책은 모든 지식과 학문이 총결집되는 ‘사전’을 중심으로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의 지식문화사를 재구성한 것으로, 일본 역사학계에서 일찍이 문화사, 사상사 영역을 개척한 저자 오스미 가즈오의 학문적 입장이 분명히 드러난 저작이다. ‘문화의 역사는 전체적인 것이고, 개별적인 분과학문의 틀을 넘어 다양한 학문의 결집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려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학제적인 연구와 저술을 시도해온 저자는 각 사전이 편찬되기까지의 사회정치적, 문화적 맥락과 그 일을 직접 수행한 개인들의 삶을 촘촘히 엮어, 사전 출판이 밑바탕이 된 출판 대국이자 지식 강국 일본의 정신적, 사상적 계보를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책의 해설을 쓴 헤이본샤의 전 편집국장 류사와 다케시에 따르면, 이와 같은 방식의 책의 역사 혹은 문화사는 일본에서도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우리 독자들 역시 한동안 잇달아 출간된 일본 근대의 번역 문화사나 조선시대 책의 역사, 서양 근대의 책과 혁명 같은 주제는 익히 접해왔지만, 사전을 통해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문화사 전반을 살펴보는 경험은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이러한 독서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어 번역본에는 각 사전의 출간 시기와 그 전후의 역사적 사건들을 한눈에 확인해볼 수 있는 ‘사전으로 보는 일본사 연표’를 만들어 수록했다. 고대 이래 중국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에 자리 잡은 유서類書, 즉 동아시아적인 백과사전의 형식을 바탕으로 자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라난 내용과 형식을 더해 일본 특유의 사전 형식을 세우고, 근세 이후 서구의 백과사전을 적극 수용하여 마침내 근대적 형태의 백과사전을 완성해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지식을 갈무리해온 동아시아의 지성사 또는 문화사의 한 풍경이 그려진다.
공적인 지식과 일상의 지식: 일본 정신문화의 모든 것
『유취국사』는 고대 율령국가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해온 6개의 편년체 역사서인 ‘6국사’를 주제별로 분류해 재편성한 책으로, 율령제도가 해체되고 섭관정치가 시작될 무렵 율령보다는 선례先例를 참조해 정무를 봐야 했던 헤이안 시대 관리들이 손쉽게 선례를 찾을 수 있게 돕는 일종의 색인집이었다. 즉 『유취국사』의 편찬은 국가에서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인정한 공적인 지식을 체계화하는 사업이었다. 반면에 『왜명유취초』는 일본어의 명사를 널리 수집하여 한자어에 대응시켜 귀족들이 한자를 익히는 데 도움을 주었던 자서이다. 단순히 한자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귀족들의 일상생활에서 수집한 많은 용어들을 부문을 세워 정연하게 분류한 책이라 당시 귀족들의 생활 세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유취국사』가 국사의 세계를 통시적으로 조감하며 국가의 관점에서 엄선한 사항들을 모은 사전이었다면, 『왜명유취초』는 지식을 공간적으로 확대하여 『유취국사』의 세계에서는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생활 세계의 세밀한 부분까지 포괄한 사전이었다. 이 두 사전은 헤이안 시대 문화의 두 가지 측면을 상징하는 지적 활동의 소산이었다. 그다음에 이어진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설화집인 『고금저문집』 역시 처세술이나 생활의 지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일화나 소문, 놀이로 회자되는 이야기, 괴이한 이야기 등을 모아놓은 것으로 당시 귀족들에게는 일종의 교과서로도 쓰였을 만큼 대단히 실용적인 생활 세계의 지식이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의 사전이 보여주는 공적인 지식과 일상의 지식을, 오늘날 국가나 학계에서 공인받은 ‘표준적인’ 지식과 그 바깥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설 및 추론의 세계와 비교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무가문화에 대한 재평가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정치 실권을 쥐고 있었던 무사들의 문화, 즉 무가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함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고대 이래로 귀족들이 독점해온 고전에 대한 지식이나 문필 기술이 중세에 이르러 무사들 사이에도 확산되었지만, 무사들은 귀족들이 이룩한 역사와 문화의 틀을 파악할 수 없었고 유서, 즉 백과사전적인 책들의 장대한 체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세에 만들어진 많은 교과서는 체계보다는 실용을 앞세워 편찬되었다. 실제로 중세 후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막부 체제하에서 역사와 인생을 알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읽었던 책은 장편 역사 이야기인 『태평기』였다. 또한 저자는 도쿠가와 막부 후기에 무가문화를 종합한 유서인 『무가명목초』와 고대, 중세에 귀족들이 남긴 『유취국사』 『왜명유취초』 『고금저문집』 등을 비교하며 전자는 후자의 일부를 상세하게 한 것에 불과할 뿐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적 확산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가명목초』는 극도로 상세한 지식을 집대성했다고는 하지만 그 관심이 주로 무사들의 전투나 생활, 의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저자는 귀족에서 무가로 정치 실권이 옮겨감에 따라 당연히 귀족문화에서 무가문화의 시대로 넘어간다는 교과서적인 문화사 인식을 비판하며, 시대 구분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성과 그 전제로서 ‘무가문화’라고 여겨온 것의 내실을 검증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배워야 산다!” 밀려드는 서구의 신지식에 대한 매혹과 공포
일본 사전의 역사를 이루는 큰 줄기 가운데 하나는 쇄국정책 시기에도 유일하게 문을 열었던 나가사키의 네덜란드를 비롯해, 군함을 타고 와 통상을 요구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밀려드는 서구 세력과 그들이 들여온 새로운 문물에 대응하여 나타난 다양한 종류의 사전들이다. 18세기 후반 일본의 난학자들은 프랑스인 성직자 노엘 쇼멜이 당시 유럽의 생활 지식을 모아 펴낸 실용 백과사전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입수하여 열독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 책은 막부의 주도로 번역이 시작되었다. 『후생신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은 당시의 대표적인 난학자들이 2대, 3대에 걸쳐 번역을 이어갔는데, 유럽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번역어도 안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필요한 항목을 골라 원고를 완성해가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한편, 일본의 장래에 대한 위기감으로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익혔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직후 네덜란드어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듯이, 막부 말기의 일본인들은 외국어 학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루마화해』 『삼어편람』 『오방통어』 『앙게리아어림대성』 등 당시 잇달아 출간된 수많은 외국어 사서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지식 앞에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던 근대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통에 기대어 미래를 구상하다
외세의 위협과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에 위기감을 느낀 메이지 신정부는 한편으로 서양의 백과사전들을 부지런히 번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한 유서 편찬에 열을 올렸다.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것에 의지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안전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여러 번으로 나뉜 체제밖에 몰랐던 당시 일본인들이 통일국가를 생각할 때는 고대 율령국가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이미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신대 이래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 했던 『고사유원』이었다. 1879년에 시작된 『고사유원』의 편찬은 사업 중단과 재개, 기한 연장을 거듭하다가 1913년에 전 1000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로 발전해온 일본의 사전 편찬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 백과사전의 번역과 전통문화의 집대성이라는 두 갈래 길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근대적 백과사전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일본백과대사전』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20세기 초반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참여해 완성해낸 『일본백과대사전』은 메이지 문화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성과였고,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 하에서 국력의 융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자국어로 된 근대적 백과사전을 갖게 되었고, 이후 잇달아 출간된 충실한 내용의 사전들은 일본의 출판문화, 나아가 지식문화 전반의 튼튼한 밑바탕이 되었다.
당대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사전 편찬자들의 열정과 고투
최근 화제가 되었던 일본소설 『배를 엮다』와 그것을 영화화한 작품 〈행복한 사전〉에는 사전 편찬이 말과 지식의 망망대해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지루함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 일인지가 잘 드러나 있다.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말처럼, 『사전, 시대를 엮다』에 등장하는 사전 편찬자들은 자신을 지원해줄 세력의 부침浮沈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단히 지식을 모으고 편집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가야 했다. 이 책에는 정권의 변화, 외세의 위협 등 외적인 어려움과 신분상의 한계나 신체적 장애, 서구 지식과의 문화적 간극 등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며 오랜 시간 우직하게 사전을 만들어간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열정과 고투가 담겨 있다.
일례로, 1806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무가문화의 종합적인 기록인 『무가명목초』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은 하나와 호키이치는 일곱 살에 시력을 잃은 맹인이었다. 그는 맹인으로서 안마, 음곡, 침술과 같은 평범한 직업을 가지려 했으나, 학문에 대한 뜻을 굽히지 못하고 국학의 대가 가모 마부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걸출한 국학자로 성장했다. 이후 막부의 지원으로 화학강담소를 설립해 일본의 고전을 망라한 일대 총서인 『군서유종』을 완간했고, 이어서 『무가명목초』의 편찬을 맡게 되었다. 당시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던 호키이치는 건강의 악화로 그 일을 완수할 수 없었지만, 그가 구상한 총목록과 범례를 바탕으로 한 『무가명목초』는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60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밖에도 현실 세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에도 시대의 구체적인 생활상과 자연에 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총체적으로 담은 『화한삼재도회』를 편찬한 의사 데라시마 료안, 화약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어로 된 책을 주문했는데 프랑스어 번역본이 도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결국 『삼어편람』 『불어명요』와 같은 어학 사서를 편찬하게 된 난학자 무라카미 히데토시, 사업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규모가 확장되어 출판사가 도산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일본백과대사전』의 집필자들과 같이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사전 하나하나를 완성해온 편찬자들의 고투와 사연은 장구한 지식의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본문 속으로
국사는 일록 형식으로 서술되었지만 그 안의 기록은 편찬자들의 주도면밀한 검토를 거쳐 국사의 기사로서 가치를 인정하여 선정한 것들이었다. 인간 사회는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자식에게서 손자에게로 여러 가지 지식이 전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지식은 문자로 기록하지 않더라도 실생활 속에서 전해지지만, 국가의 제도를 유지하고 정치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지식은 법전이나 역사서의 형태로 집약되어 다음 시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국사란 국가에서 후세에 전하려는 다양한 지식을 편년체의 형태로 집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취국사』의 편찬이라는 사건은 율령국가에서 부지런히 축적한 공적인 지식을 미치자네라는 뛰어난 관료이자 학자인 인물이 정리하고 체계적인 분류로 재편성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 22~23쪽
서문 등의 문장을 보면 나리스에는 당시 지식인 귀족으로서 매우 온건한 사상을 지닌 인물로 보이는데, 특히 그가 평균적인 상식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설화집, 그중에서도 『고금저문집』처럼 종합적인 설화집의 편찬자로서 최적의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불만을 품고 주위 상황에 집요하게 맞서면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가는 인물이 설화집의 편찬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화를 모으는 작업은 사상을 표현하기에는 무척 간접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 69쪽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군기물을 우리와 같이 좁은 의미의 문학으로 읽지 않았다면 중세?근세의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그들은 군기물이란 무사의 역사를 이야기한 책이며, 그 책을 읽으면 무사의 삶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군기물은 무사들에게 ‘무사란 무엇인가’, ‘무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우기 위한 소중한 교과서였다. 거기에는 전투라는 구체적인 장에서 펼쳐지는 무사들의 여러 가지 움직임이 묘사되어 있고, 병법이나 무구武具에 대한 설명과 무사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논의도 포함되어 있다. - 100쪽
알다시피 기독교는 16세기 중반 이후 일본 각지에 단기간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전래된 지 40년이 채 되지 않은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교령을 반포했다.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쇄국정책을 펼치기까지의 경과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16세기 말에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일포사서』가 이러한 상황에서 편찬된 것은 관점을 달리하면 포교 활동이 금지된 선교사들의 도피 방식이기도 했다. 동분서주하면서 여러 계층의 일본인과 만나 신의 복음을 전하고, 서구 문명을 배경으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일이 불가능해진 선교사들 가운데 일본에 들어온 이후의 체험을 바탕으로 언젠가 다시 전도할 때를 대비하여 큰 일본어 사서를 편찬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뜻을 같이한 사람들은 오로지 『일포사서』의 편찬에만 몰두했다. - 127쪽
데라시마 료안이 이러한 내용을 일부러 기록한 것은 이 책에서 소개해온 일본의 사전辭典이나 사전事典과는 달리 『화한삼재도회』가 필사본이 아니라 인쇄본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법황의 예람, 그리고 문교 정책의 중추에 있는 학자와 의학의 최고 권위자의 추천을 받은 것은 출판이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선전 방법이었다. 그리고 출판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도설 백과사전의 보급이 가능했다. 저자의 뜻에 걸맞은 설명도를 정확하게 판목에 새겨 대량으로 인쇄하는 기술과 출판업자 없이는 『화한삼재도회』의 출현은 생각할 수 없다. 이는 내용 면에서뿐 아니라 서적을 인쇄하여 판매하는 면에서 볼 때도 겐로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중기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였다. - 137~138쪽
번역을 추진하면서 겪은 최초의 문제는 알파벳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항목을 A부터 하나하나 번역할 것인가,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항목을 추려서 번역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프랑스에서 편찬되고 네덜란드인의 생활에 맞추어 증보된 백과사전의 전 항목을 극동에서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일본 국민이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번역어도 거의 안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번역을 추진하는 일 역시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백과사전이란 생각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 항목을 선택하여 그 항목 하나하나를 해설하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목의 선정, 각 항목의 대소경중을 취급하는 방법과 기술 방식 등 모든 부분에 그것을 만드는 사회와 문화가 반영된다. 외국의 백과사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전에서 해설한 항목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항목을 그렇게 해설하는 외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 180~182쪽
1807년 에조의 마쓰마에 지역에 러시아 선박이 들어와 프랑스어로 쓴 한 통의 문서를 남기고 떠났지만, 일본인들은 그 문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막부는 그 문서를 멀리 나가사키로 보내 네덜란드 상관장이었던 헨드릭 두프에게 네덜란드어로 번역해달라고 의뢰하기로 했다. 그 글의 내용이 쇄국정책을 변경하라는 요구임을 알고 놀란 막부는 프랑스어 습득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듬해에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어 통역사 6명에게 명을 내려 두프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도록 했다. 두프는 프랑스어 교수로 근무하는 한편, 일본인을 위한 프랑스어 사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문하생으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사범拂郞察辭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최초의 불화(佛和, 프랑스어-일본어)사서를 만들었다. - 198쪽
이 백과사전(『일본가정백과사휘』)은 부인들을 대상으로 편찬되었고, 독일의 백과사전을 모델로 하여 서구의 역사?지리?문화에 대해 간략하지만 요점을 잘 정리하여 해설해놓았으며, 정치?경제 등의 문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부인 문제’ 항목에서는 일본 사회가 이 분야에서 크게 뒤져 있음을 지적하고, 프랑스?영국?독일?미국의 순으로 구미 각국 부인의 법적 지위, 경제 활동, 교육, 문학을 비롯해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과 부인운동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내용이 과연 메이지 시대 백과사전의 문장인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 219~220쪽
(『일본백과대사전』) 간행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11월 21일, 와세다의 오쿠마 백작 저택에서 발행 축하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남작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를 비롯하여 2000명이 넘는 조야의 명사들이 모였으며, 문부대신 자작 마키노 노부아키 등의 축사가 이어졌고, 해군 중장인 남작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는 “우리나라의 빛으로 공경하고, 우리나라의 보물로 사랑할 책이 바로 이 책”이라는 노래로 그 공을 치하하면서 성대한 의식에 대한 감격을 표현했다. 시마다 사부로,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 등의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신문이나 잡지도 앞다투어 축하연의 정경을 기사화했다. 조야의 관심을 모은 ‘일본’의 ‘백과사전’의 출현은 20세기 초 국력의 융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신문사는 대일본맥주주식회사, 가네가후치鐘ヶ淵방적주식회사의 생산 현장 소개와 더불어 『일본백과대사전』의 편집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영하기도 했다. - 253쪽
백과사전은 흔히 오래되면 가치가 없다고 인식된다.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일진월보日進月步하는 지식과 정보를 집약하는 것이 백과사전의 역할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어떤 백과사전이든 거기에는 한 국가, 한 시대의 문화가 집약되어 있다. 방대한 백과사전의 기술에서 그러한 점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사전에서 다루는 항목 하나하나와 그 해설에는 틀림없이 한 시대가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지금은 과거의 것이 된 백과사전의 기사를 읽다 보면 끊임없이 흥미가 솟아오른다. 어떤 때에는 이미 낡아버린 백과사전의 기사에서 최신 백과사전의 해설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최신 백과사전 안에서 의외로 낡은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백과사전을 읽으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화의 역사가 한도 끝도 없이 확산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261~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