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 (징검다리 역사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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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정창권
여성이나 장애인, 하층민 등 역사 속 소외된 사람들을 세밀하게 복원하여 이야기로 재미있게 들려주는 전문 역사 스토리텔러입니다.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지은 책으로는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향랑, 산유화로 지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상 김만덕,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기이한 책장수 조신선』,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등이 있습 니다.
그린이 : 홍선주
책정보 및 내용요약
작지만 소중한 역사 이야기를 한 권 한 권 담아내는 ‘징검다리 역사책’ 시리즈. 그 네 번째 책 『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영조 임금 시절에 실제 포도대장으로 활동한 장붕익과 조선 시대 조직폭력배인 검계 표철주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포도대장 장붕익과 포졸들의 활약을 보면 조선 시대 포도청이 하는 일과 그 무렵 사회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답니다.
편집자 추천글
<기획 의도>
포도대장 장붕익과 조선 시대 경찰 이야기
작지만 소중한 역사 이야기를 한 권 한 권 담아내는 ‘징검다리 역사책’ 시리즈. 그 네 번째 책 『포도대장 장붕익, 검계를 소탕하다』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영조 임금 시절에 실제 포도대장으로 활동한 장붕익과 조선 시대 조직폭력배인 검계 표철주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포도대장 장붕익과 포졸들의 활약을 보면 조선 시대 포도청이 하는 일과 그 무렵 사회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답니다.
조선 시대에도 범죄는 많았다
상업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화가 진행된 조선 후기의 한양. 그곳 역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범죄가 일어나는 사건의 현장이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나 금주령을 위반하는 풍속 범죄부터 폭력, 절도, 방화, 화폐 위조, 살인 같은 강력 범죄까지 심심찮게 일어났습니다. 지금의 범죄와 비교해도 그 방식만 다를 뿐 종류는 같았지요.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지금의 조직폭력배와 같은 ‘검계’가 날뛰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고관 댁에서 일하는 노비나 청지기, 관아의 하급 관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칼을 가지고 다니며 각종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양반 세력가의 자제들이 많이 끼어 있어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검계를 소탕한 포도대장 장붕익
조선 시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바로 포도청이 지금의 경찰서 역할을 했습니다. 포도청의 총책임자는 포도대장이었고요. 포도대장은 왕의 신임을 받는 존재로서 뛰어난 무술 실력뿐만 아니라 사건 수사 및 범인 검거 작전을 지휘하는 데에도 큰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여러 포도대장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도 유능한 이가 바로 장붕익(1646~1735년)이었습니다. 장붕익은 80세의 고령으로 포도대장에 부임했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힘과 기개, 엄격한 법 집행으로 검계를 소탕한 인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까, 그리고 범인에 대한 처벌은?
범죄의 원인이나 범인에 대한 처벌 방식을 보면 그 사회가 보인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범죄에는 흉년으로 인한 식량 부족, 신분상의 차별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또한 범인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방식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서 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방법이 이용되었지요. 포도청이 사건을 수사해
범인을 잡고 벌주는 과정을 읽다 보면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답니다.
<내용 소개>
“온 도성 사람들에게 나 장붕익이 신임 포도대장으로
부임했음을 알려라.”
신임 포도대장 장붕익의 시끌벅적한 취임식
영조의 명을 받아 포도대장에 부임한 장붕익은 취임식 날 포수들에게 하늘에 화승총을 쏘라고 했습니다. ‘탕탕탕!’ 하고 총소리를 울려 장붕익이 신임 포도대장이 되었음을 온 도성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지요. 포도청 포졸들은 오랜만에 기를 펴고 마음껏 범인들을 때려잡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고, 한양의 무뢰배들은 기를 못 펴고 슬금슬금 몸을 숨겼답니다.
야간 통행금지 단속
포도대장 장붕익은 취임 첫날부터 특별히 직접 순관이 되어 야간 순라(순찰)를 돌기로 했습니다. 장붕익과 순라군들이 숭례문 방향으로 순라를 돌고 있을 때 어떤 별감이 통행금지 시각이 넘었는데도 술에 취해 거리를 나다니고 있었습니다. 장붕익은 대번에 그 별감을 잡아 거꾸로 매단 뒤 포졸에게서 육모 방망이를 빼앗아 발바닥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별감을 크게 혼내 준 장붕익은 포졸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관리들의 범죄는 더욱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느니라. 알겠느냐?” 장붕익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일수록 법을 잘 지키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 지르고 도둑질하기
한편 이 무렵 한양에서 잇따라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장붕익은 화재 현장에 출동해 특별 순찰을 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붕익과 포졸들은 어느 기와집 담장에서 장정 몇이 보퉁이를 메고 뛰어내리는 현장을 포착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아무 집에나 불을 지른 다음, 불을 끄려고 이웃 사람들이 집을 비웠을 때 물건을 훔치는 빈집털이범이었습니다. 달아난 일당의 우두머리는 바로 검계 표철주였고요. 표철주는 실존했던 검계 조직인 ‘죽림칠현파’의 우두머리로서 이야기 속에서 기방을 운영하며 금주령 위반, 불법 도박, 심지어 위조 화폐 주조까지 여러 사건의 배후 인물로 등장합니다.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다니
신분 질서가 엄격한 조선 시대에 노비가 주인을 해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노비가 주인 내외를 살해한 사건이지요. 범행을 저지른 노비 부부는 자신의 고향인 양주 고을로 도망가 남편은 절에 숨고, 아내는 어느 집의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양주 고을을 수색하던 포졸들 가운데 다모(여성 경찰) 남이가 방물장수로 위장하여 여종이 숨은 집을 찾아냈습니다. 이어 여종을 미행해서 남자 종도 잡았고요. 노비 부부는 포도청에 끌려와 모진 심문을 받고서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신들은 얼마 전 주인에게 매 맞아 죽은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것을요.
술 담그는 자, 모두 잡아들여라!
조선 시대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금주령을 내렸다가, 풍년이 들면 다시 거두고는 했습니다. 금주령을 내린 이유는 부족한 곡식이 술 빚는 데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임금의 지엄한 금주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래 술을 빚거나 파는 곳이 있었답니다. 이야기 속에서 표철주는 종로 기방의 주인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외상으로 술을 먹으려다 표철주에게 쫓겨난 어느 한량이 앙심을 품고 장붕익에게 종로 기방의 불법 운영 실태를 고해바쳤습니다. 신고를 받은 포졸들이 즉각 종로 기방으로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 좋게 표철주는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검계와의 전쟁
이때 조정에서는 한양 거리에서 기승을 부리는 검계들을 모조리 소탕하라는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검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지요. 장붕익은 포도 군사들에게 거리를 순찰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있으면 무조건 윗옷을 벗겨 칼자국이 있는지 보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검계 조직에 가입하려면 몸에 칼자국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검계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검계 조직원들이 속속 포도청으로 끌려갔습니다. 죽림칠현파 우두머리인 표철주는 조직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직접 장붕익을 암살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장붕익이 아니었습니다. 장붕익은 이불 밑에 칼을 숨겨 두었다가 밤에 몰래 찾아온 표철주를 혼쭐내 주었습니다. 표철주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그 뒤로 평생 숨어 다니며 복덕방의 집주름(중계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물론 한양에는 치안이 바로 서 백성들이 맘 놓고 살 수 있게 되었고요.
포도청을 통해서 본 조선 시대의 ‘죄와 벌’
조선 시대 경찰서, 포도청
포도청에는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이 있었는데, 경기도와 서울을 둘로 나누어 담당했습니다. 두 군데의 포도청 모두 임금이 사는 궁궐과 가까운 종로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포도청의 총책임자인 포도대장은 휘하에 문서 담당 관리인 종사관과 포교, 포도 군사(포졸), 심부름하는 사령 등을 거느리고 각종 사건을 해결했습니다.
살인 사건 처리는 신중하게
살인은 모든 범죄 중에서도 가장 크고 무거운 범죄인 만큼 범인을 잡고 벌을 내릴 때에도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했습니다. 먼저 시신을 검사하는 ‘검험’을 해서 사망 원인과 시각 등을 정확하게 밝혀냅니다. 그리고 범인을 사형시켜야 할 경우에는 임금이 신하들과 세 번 의논하는 ‘삼복법’을 거쳐 형량을 확정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감옥 생활은 어땠을까
조선의 대표적인 감옥은 지금의 서울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있던 전옥서였습니다. 전옥서의 옥은 둥근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자 옥과 여자 옥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처럼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밥을 주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감옥에 마련된 조리실에서 직접 밥을 해 먹거나 가족들이 음식을 마련해 와야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다섯 가지 형벌
조선 시대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벼운 벌은 ‘태형’인데,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더 무거우면 곤장을 치는 ‘장형’에 처했습니다. 소금 굽기나 종이 만들기 등 일을 시키는 ‘도형’도 있었습니다. 먼 지방으로 유배 가는 ‘유형’은 일단 곤장을 친 후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 가는 거리를 달리했습니다.
포도청의 암호
포도청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암호가 있었습니다. 그중 범인을 잡을 때 쓰는 암호가 재미있습니다. 범인이 힘이 없어 보이면 “파리!”, 억세고 수가 많아 보이면 “참새!”라고 외쳤습니다. 또 범인을 쫓을 때 “미꾸리다.”라고 하면 놓쳤다는 말이고, “한 발 더 놓아라.”라고 하면 더 빨리 가자는 말이었답니다. 또 덮치기 직전에 갓의 왼쪽을 건드리면 잡지 말라는 신호이고, 갓의 오른쪽을 건드리면 꼭 잡으라는 신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