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치키 『해님이 웃었어』 출간 이야기


기쿠치 치키의 신작, 
『해님이 웃었어』가 출간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작업 과정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 책을 계약하고 원서를 받았을 때,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색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근사한 책이었거든요. 
한국어판에 대한 기대가 커졌습니다.
그렇게 조금 길~고 또 특별한
편집 과정이 시작되었어요.

• 
• • • •


 
♦ 첫 번째, 종이를 찾아서


보통 외서를 계약하면 원저작사에 책의 제작 사양을 요청합니다. 국내 제작 환경과 달라도 책의 물성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원서의 종이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종이였습니다. 특히 질감이 독특하면서도 양면이 다른 자켓과 면지 종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받은 정보를 토대로 지업사에 알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담당자들은 책을 들고 서점으로 나섰습니다. 최대한 비슷한 종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요. 대형 서점부터 작은 독립출판물 서점까지 다니며 직접 수많은 종이를 만지고 비교하고 또 살펴봤고 마침내, 원서와 동일한 용지를 찾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과 다른 이름의 ‘T엠보스’ 종이로 유통되고 있었죠. ‘꼭 이 느낌이어야 한다.’ 생각했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두성종이 'T엠봇' 샘플북. 원서 자켓과 면지에 사용된 종이를 샘플과 비교하는 과정.


♦ 두 번째, 망점을 찾아서


아마 책을 받아서 딱 펼치는 순간 ‘와’하는 감탄이 나오실 거예요. 화려하고 생생하고 자유롭게 표현된 색들이 가득하거든요. 본문은 먹을 제외한 별색 3도, 표지는 온전히 별색 4도로만 인쇄된 책입니다. 처음 색 교정을 진행했을 때, 의아할 정도로 색이 표현되지 않았어요. 해결 방법을 찾던 중 의외의 곳에서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일반적인 오프셋 인쇄의 경우 확대경인 루페(loupe)라는 도구를 이용하면 인쇄된 망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서를 들여다 본 결과 전혀 망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원저작사와 메일로 소통하며 차근차근 답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고정밀 인쇄 기법’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루페로 본 원서(좌) / 일반 교정지(우). 확대하여 자세히 보면 우측 렌즈 속에는 작은 점(망점)들이 찍혀 있다.


인쇄에서는 1인치 사각형 내에 겹치지 않는 선이 그어지는 수를 수치화하여 LPI 선수라고 말합니다. 국내에서는 보통 175선-200선으로 인쇄를 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세 배 이상의 선수를 사용했고 망점이 조밀하게 겹쳐 있어 고배율 루페를 통해서만 망점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님이 웃었어』 한국어판 또한 원서와 동일하게 ‘고정밀 인쇄’로 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색채들을 온전히 담아 전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 세 번째, 인쇄소를 찾아서


원화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원서는 편집 과정 내내 함께하는 가이드가 됩니다. 특히나 이 책은 책 자체가 원화와 다른 디테일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원서의 퀄리티를 구현하는 일이 중요했지요. 앞서 언급한 고정밀 인쇄가 가능하면서, 색을 정확하게 표현하며 질감과 디테일을 살릴 수 있는 인쇄소를 찾아야 했습니다.


『해님이 웃었어』 색 교정지들(좌) / 원저작사와 끊임없이 주고받은 메일들(우)


일본의 원저작사와 계속 소통하며 보다 세밀한 제작 환경들을 확인했습니다. 망점의 패턴인 ‘스크린’도 일본과 환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별색, 고정밀 인쇄 등의 특이사항 때문에 인쇄판을 제작하는 작업도 무척 까다로운 과정이었습니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제작처도 있었습니다. 제작팀에서 끊임없이 수소문한 끝에 두 인쇄소에서 샘플 교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 책에 쓰인 FM 스크린을 실험했고, 또 종이와 국내 제작 환경에 맞게 LPI 선수를 수차례 조정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원서와 가까운 인쇄 환경을 만들었고, 비로소 작가의 동의를 얻어 제작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 • • • •

 


 
48통의 메일, 9번의 교정. 


한국어판을 준비하며 일본 원저작사와 주고받은 메일의 수와 샘플로 진행했던 색 교정의 횟수입니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작가와 원저작사 그리고 국내의 모든 작업자 분들이 애써 주신 덕분에 출간 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두성종이, 로얄프로세스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긴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해님이 웃었어』가 독자님들을 찾아 갑니다. 무엇보다 작가와 작업자들 모두의 맘에 쏙 드는 모습으로 출간되어 기쁘고,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리는 마음입니다. 그림책으로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즐거움을 눈으로, 또 손으로 경험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해님의 웃음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곳에서 아이가 느끼는 짧은 산책길의 설렘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