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소년> 수업 일지

<소녀와 소년> 수업 일지
오은경(상주 상영초등학교 교사)

자리를 바꿨다. 자리는 대체로 아이들이 정한 방법으로 결정하는 편이다.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짝이 되어, 모둠이 되어 만나는 것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 된다. 요즘에야 드러내고 그러지는 않지만 교사들 사이에서는 어린 남학생들의 잔망스러움(?)을 여학생 짝이 누나처럼 봐주면 훨씬 수업하기 수월하다는 말을 하면서 남녀로 짝을 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로 이런 경우가 다양한 성격의 아이들을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해서 남자답다, 여자답다는 두 가지 성격으로 정리하는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한편 우리 반 아이들은 어쩌다가 같은 성별끼리만 모둠이 되면 정말 신나 한다. 서로 그다지 잘 어울릴 것 같은 성격이 아닌 여학생끼리 모여 있어도 남학생이 끼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얼굴이다. 남학생도 다르지 않다. 왜 그럴까? 이런 반응은 괜찮은걸까? 또, 누가 잘못한다 싶으면 “선생님, 여자애들이요~” “선생님, 남자애들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당연히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여학생이나 남학생이 “나는 안 그랬는데?” 하는 항의의 말이 따라온다. 이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남자, 여자가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먼저 아이들이 가진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생각을 들어봐야겠다 싶어서 포스트잇을 나눠주었다. 여학생들에게는 “남자라면 ________ 해야죠!”라는 문장을, 남학생들에게는 “여자라면 ________ 해야죠!”라는 문장을 쓰게 했다. 할 말이 많다는 듯 얼른 가져다 썼다. 한 장에 하나씩만 쓰라고 했는데 더 써도 되냐고 물으며 몇 장씩 쓰기도 했다. 순식간에 써낸 것들을 모아서 분류해 보았다.

남학생들이 쓴 것을 먼저 살펴보자.
여자라면 착해야죠.
여자라면 깨끗해야지요.
여자라면 요리를 잘해야지요.
여자라면 부지런해야지요. 
여자라면 순수하고 청결해야지요.
여자라면 아기를 낳아야지요.
여자라면 욕을 하면 안 되지요.
여자라면 머리카락이 길어야지요.
여자라면 힘이 약해야지요.
여자라면 힘이 세야지요.(엄마가 일하는 것 보니까)


가장 많이 나온 것은 ‘여자라면 착해야죠.’였다. 그리고 가장 놀라게 한 문장은 ‘순수하고 청결해야지요.’이다. 남학생들은 문장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여학생들은 말도 안 된다며 난리다. 

여학생들이 쓴 것은 이렇다.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지요.
남자라면 공부를 잘해야지요.
남자라면 배려를 잘해야지요.
남자라면 잘 도와줘야지요.
남자라면 축구를 잘해야지요.
남자라면 머리카락이 짧아야지요.
남자라면 얼굴이 잘 생겨야지요.


우리 반은 굳이 따지자면 여학생들이 공부를 더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남자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적었기에 깜짝 놀랐다. ‘먹여 살리려면’이라는 말이 나왔다. 배려, 도움 역시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남학생도 여학생만큼 반발이 크다. 
한 아이가 까불거리면서 ‘나는 다 맞는데.’ 하니까 여학생들이 ‘너 안 그렇거든!’ 하고 외친다. 그래서 다시 그 남학생에게 되물었다.
 “여학생들이 말하는 저 조건에 다 맞으니까 기분이 좋아?”
잠시 당황한다. 여학생들에게 잘난 척하려고 한 건데 뭔가 기분이 이상한가 보다. 그러더니 자기는 저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아이들에게 저런 남자이고 여자이냐니까 당연히 아니라고 외쳤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너희랑 가장 가까운 남자나 여자를 떠올려봐.”
“가까운 남자 없어요! 가까운 여자 없어요!” 하고 여기저기 아우성이다.
“아빠! 엄마! 동생! 교회 오빠! 남자, 여자 아니냐?”
“아!”
이성은 공격 대상인데 미처 가족들이 남자이거나 여자일 줄은 생각 못한 듯하다. 그래도 다른 반에 견주면 성별 간에 큰 마찰 없이 잘 지내는 편인데도 막상 이야기를 나누니 이렇다.
“자, 다 정했으면 이제 남학생들은 너희가 적은 ‘여자라면~’의 조건에 자기가 떠올린 여자가 몇 개나 해당되는지 꼽아봐.” 
남학생들에게 앞서 적은 조건들을 읽어주었다. 그 가운데 몇 개나 꼽았는지 물어보니 거의 서너 개다. 여학생들도 해보았다. 역시 모두 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렵게 나온 두 명 중 한 명은 연예인이었는데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 탈락시켰고, 한 명은 아빠를 꼽았다. 
“가까운 사람들도 너희한테는 완벽한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없겠네.”
아이들의 표정에서 ‘이게 뭐지’ 하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선생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편견이요. 우리가 편견을 갖고 있다고요.”
얼른 편견이라는 말이 나왔다. 사실은 이미 이런 생각들이 잘못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막상 적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들이 나왔을 것이다. 
“너희가 적은 말에 남자, 여자 대신 ‘사람이라면’을 한번 넣어보자. 그리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자.”

사람이라면 착해야지요. 
사람이라면 깨끗해야지요.
사람이라면 공부를 잘해야지요.
사람이라면 머리카락이 짧아야지요.


읽을 때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안 그러면 사람도 아니에요? 한다. 개인적으로 착하고, 주변이 깨끗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러기를 강요한다면 어떨까 물으니 말도 안 된다고 바로 답한다. 편견이 차별을 만든다. 참 간단한 이야기인데도 깨닫기 쉽지 않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강요가 특히 여자들에게 많았다면서 아들 못 낳은 며느리 이야기를 해주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말도 안 된다고 한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은 어떠냐 하고 물었더니 병맛이니, 꼰대니, 절대 안 만나요 등등의 말이 나왔다. 너희도 아까 그러던데? 하니까 조금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럼 이제 진짜 멋진 사람이 되는 방법을 한번 알아보자. 

『소녀와 소년』 표지를 보여주고 3쪽의 그림(여자가 할 때 잔소리를 듣는 행동)을 다 같이 보았다. 우리 반 여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맞아요! 나도 저렇게 했는데 여자가 아무데서나 눕는다고 뭐라고 했어요!” 그런데 남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자기들도 혼났다고 한다. 4쪽(남자에게 요구되는 행동)을 보여주니 남학생들도 “맞아요. 동생이 많이 안 먹으면 뭐라 안 하는데 저 보고는 남자가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요.” 한다. 그 말에 한 여학생이 “야! 난 더 먹고 싶은데 여자가 많이 먹는다고 뭐라 하면서 안 준다. 그래도 먹게 해주는 게 더 낫지!” 하고 말해 모두가 웃었다.
“남자는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은 남자한테도 안 좋고 여자한테도 안 좋네. 어쩌면 다른 말들도 그렇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남자는 머리카락이 짧아야지 한다면 여자는 머리카락이 짧으면 안 된다는 것 같고, 남자는 여자를 도와줘야지 하면?”
“그럼 여자는 혼자서 못한다는 거잖아요. 자존심 상하는데요.”
 그렇다. 내가 한 차별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길 바랐다. 
이번에는 생활에서 내가 겪은 차별을 한번 찾아보고 역할극으로 만들자고 했다. 이야기 나누는 것을 살펴보니 남학생들 몇몇은 차별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하고 남자가 이래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짐작대로 여학생들이 좀 더 경험을 많이 말했다. 우선은 모둠에서 나누고 한 가지만 발표하면 되니까 하나만 정하라고 했다.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길을 걷는데 키 큰 여학생이 지나가니 “여자가 왜 저렇게 키가 커?”라고 지나가는 사람이 말했다. 또 키 작은 남학생이 지나가니 “남자가 저렇게 작으면 안 되는데.” 했다. 
- 할머니 집에 갔더니 오빠한테만 필요한 것 없냐고 자꾸 물었다. 할머니 집에 갈 때 엄마가 운전했는데도 아빠한테는 쉬라고 하고 엄마한테는 바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 누나가 짐을 들어 올리는데 아빠가 그런 건 힘센 남자한테 시키라고 했다. 나도 화냈고 누나도 화냈다.
- 가족끼리 마트에서 장 보고 있는데 카트를 끌고 있는 어떤 아저씨를 보더니 엄마가 아들한테 넌 결혼해서 저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딸에게는 저런 남자 만나야 한다고 했다.
- 엄마가 식당 사장인데 어떤 손님이 자꾸 일하는 남자 직원에게는 사장님이라고 하고 엄마한테는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 딸이 친구 집에 혼자 가려고 하니까 혼자서는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혼자 걸어가고 싶다고 해도 차로 태워주고, 아들이 뭐 사러가는데 혼자 가기 무섭다고 하니까 남자가 뭐가 무섭냐며 혼자 가라고 했다.
- 3학년 때 처음으로 피구를 하는데 선생님이 처음부터 남학생은 세니까 한 손만 쓰게 하고 여학생들은 약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아이들이 기가 막히게 잘 찾았다. 차별받은 적이 없다는 아이도 갑자기 기억났다고 손을 들었다. 사실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차별인지도 모른 채 지내는 경우가 참 많다. 더구나 요즘은 차별이 친절한 배려인 것처럼 바뀐 모습일 때가 있어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 더욱 예민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그럼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자다운, 여자다운 사람이 아니라 그냥 멋진 사람으로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녀와 소년』 차례를 다시 다 같이 보았다. 한꺼번에 다 읽어주기가 어려워 차례를 보면서 ‘여자아이들에게’ 부분에서 한 가지를 고르고, ‘남자아이들에게’에서도 한 가지 골라 같이 읽었다. 여자 아이들은 “예쁘다는 말을 사양하자”를, 남자아이들은 “펑펑 울자”를 선택했다. 같이 읽을 때는 일부러 이 제목들을 다 함께 크게 외쳤다. 나머지는 교실에 책을 전시해 두고 수시로 읽고 싶은 사람이 가져다 읽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개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서로 공통점이 있으면 참 기분 좋고, 또 나만 그럴 때는 뭔가 ‘내가 특별한 존재구나’ 하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도!”라는 놀이를 해보았다. 누군가가 일어나서 “나는 겁이 많다!”라고 외쳤을 때, 자기도 그렇다면 아주 크게 “나도!”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앉으면 다시 누군가 일어나서 또 다른 것을 말하고, 같은 특징을 가진 아이들이 “나도!” 하면서 또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나는 청소하기 싫은데 깨끗한 건 좋아한다!” 하니까 대부분이 “나도!” 하면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작았는데 자기만의 개성, 우리들의 공통점이니 자신감을 갖고 크게 외쳐보자고 했더니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생각 이상으로 아이들은 신나 했고 자신의 특징도, “나도!”라는 말도 아주 크게 외쳤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그런데 잘하지는 못한다!”
“나는 발표할 때 부끄러워서 목소리가 작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
“나는 선생님처럼 늙어 보이는 건 싫다!”


이렇게 자기를 잃지 말고 당당한 사람으로 잘 자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