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에서 벗어나 우주로 날다

살다 보면 경계를 넘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크든 작든 처음 경계를 넘는 일은 어쩌면 도박과 같다. 경계 너머의 삶이 지금과 어떻게 다를지 알 수 없으며 건너편에서 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까도 미지수다. 이 일은 두렵고 위험하다. 한번 넘어가면 되돌아온다 해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어찌 됐든 이곳의 것을 먼저 버려야 저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 평생 지켜 온 가치나 인연,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아무것도 넘어서지 않으려 하고 기존의 위치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계를 넘는 자를 무작정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떤 월경(越境)은 필연적이다. 생사를 갈라놓거나 폭력의 고리를 허물고 상상을 넘어선 평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깊이 파인 역사의 굴곡을 동반한 피비린내 나는 경계를 필사적으로 넘어서면서 개인의 삶에서, 역사에서 전혀 다른 국면을 열어 왔던 사람들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경계, 새로 생겨난 경계, 앞으로 예상되는 경계들로 복잡한 선 긋기가 존재한다. ‘너는 어디 소속이냐, 어디서 온 사람이냐’를 묻는 일이 많아졌다. 끊임없이 좌표가 변동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계속 생겨난다. 누에고치처럼 가만히 매달린 삶을 살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려면 나도 가깝고 먼 경계를 허물거나 넘어서야 한다.
 
이 작품은 경계를 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박승규는 이념으로 가로막힌 생사의 장벽을 넘어온 새터민이다. 경계를 넘기 전의 나이로 하면 그는 열아홉 살이지만 지금은 열일곱 살이다. 영양이 부족한 데다 잔병치레가 잦아 또래보다 발육이 늦은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신분조사 때 나이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곳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승규의 어머니가 택한 2년의 유예는 아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가진 남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한 절박한 결정이었겠지만, 승규에게는 그렇지않다. 북한을 나와 중국 땅을 떠돌며 수십 차례 삶과 죽음의 고비를 경험한 그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땅”이라고 들었던 남한에 오고 나서도 여기가 내 공간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시간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면서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같은 새터민인 용림이 형은 넘어오면서 이름을 버린 경우다. 저곳에서 가졌던 이름을 버리고 이곳에서는 민우가 되었다. 예술소조에서 활동하며 평양예술단에 들어가려던 꿈은 가족 해체와 오랜 꽃제비 생활로 산산이 부서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꿈을 놓지 않고 경계 넘
기 이전의 삶을 복원하고자 애쓴다. 새터민 쉼터 옥상에서 카세트를 들고 날마다 춤 연습에 몰두한다. 넘어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근본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저곳에서도 그는 처절하게 외로웠고 이곳에서도 그렇다. “춤을 출 때만” 그 외로움을 잊을 수 있기에 ‘용림/민우’는 춤을 춘다.
 
승규와 민우는 남한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념’이나 ‘국경’이 마지막 경계일 줄 알았다. 그러나 남한에는 더 많은 경계가 그어진 채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구조가 다 똑같다”는 임대아파트에서 저마다 다른 위기의 삶을 만나고, 머리에 먹물이 제법 들어 남한 학교 적응에 성공한 새터민 친구 완률의 교복을 바라보면서 ‘학교/탈학교’의 냉정한 구분을 겪는다. 하나원과 복지관 생활을 통해 ‘선후배’의 완장문화를, 엄마 일터의 복씨 아저씨 부부를 보면서 북이나 남이나 ‘남녀’의 차별과 갈등이 엄존하는 것을 알게 된다. 키가 작다는 것은 여기서도 여전한 콤플렉스다. 무엇보다 승규와 민우가 남한에서 목격한 가장 삼엄하고 드높은 장벽은 ‘돈’의 장벽이다. “멀쩡하게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지저분하고 볼것도 없는 이 임대아파트엘 왜 드나들겠나, 자기네들 사는 구역과 이 구역은 엄연히 다른 세상인데”를 물 흐르듯 깨닫는 순간 승규는 목줄을 놓는 느낌으로 맥없이 무너지려 한다.
 
이러한 승규를 붙잡아 일으킨 것은 ‘리듬의 힘’이다. 복지관에서 만난 노랑머리 누나는 이 아슬아슬한 남한 땅에서 승규가 발 디딜 곳을 알려줄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리듬을 잃어버린 그의 손에 드럼 스틱을 쥐어 준다. 승규가 참여한 복지관 청소년 밴드 ‘우주 비행’의 아이들은 생사의 국경을 넘진 않았으나 만만치 않은 삶의 장벽에 부딪혀 턱턱 나동그라지는 중이었다. 가족이 흩어진 것은 승규네만의 일이 아니었고 경쟁적 제도 교육은 ‘새터민’이 아니라도 냉혹하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이었다. 청소년기라는 ‘사이’의 시간에 힘겨운 울타리 넘기를 시도하는 동병상련을 만나면서 승규와 친구들은 밴드가 합주하듯 조금씩 서로의 리듬을 맞추고, 자기 삶의 리듬을 회복해 간다.
 
이 작품의 매력은 어떤 가혹한 삶의 국면도 ‘살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 데 있다. 승규와 민우가 오늘의 삶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여기까지 왔듯이 해나와 상휘와 동구도 어떻게든 이 순간을 내팽개치지 않고 걷는다. “나는 고아야! 우주의 고아!”라는 민우의 외침이 비참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어차피 우리 모두 이 우주를 떠도는 유목민의 삶이라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딸을 찾아 험한 중국으로 되돌아 넘어가는 승규 엄마의 각오, “어디메 잘 있을 기야”라는 낙천적 태도는 이야기 전체를 지탱하는 끈이다. 날카로운 현실에 대한 경계경보를 울리면서도 ‘캄캄한 방 안에 누워 꼭 잡은 손’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는 목소리를 놓지 않는다.
 
밴드 ‘우주 비행’의 비행은 경계를 넘어선 비행이다. ‘걷기’의 시각으로만 세상살이를 보는 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경계의 그물망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날기’를 시작한 순간 너도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다. 지상에서는 홀로 걸을 수 있지만 공중은, 우주는 누구에게나 연대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우주 비행’ 팀의 합주에 가뿐한 응원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이들이 ‘날기’의 시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성장을 지상의 성장통으로만 그리지 않고 활공과 유영으로 그려낸 호방한 작품을 읽었다. 우리 모두는 ‘남한과 북한’을 비롯한 이곳과 저곳의 신기루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과감히 벗어나 ‘우주 비행’의 영법을 순조롭게 체득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출발만큼은 충분히 경쾌해 보인다.
 
 
 
글·김지은(문학평론가)
 
(1318북리뷰 201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