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서평단] '너만 모르는 엔딩' - 삶의 이야기가 담긴 SF

그동안 다양한 SF소설을 읽으며 예전에 생각했던 '공상과학'이란 생각의 틀을 깬지 오래다. SF소설이 미래사회를 예측해보고, 창의적이고 실현가능한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작품이란 것에 공감하며 읽어왔다.

이번에 만난 SF소설집인 <너만 모르는 엔딩>은 정말 깜쪽같이 우리를 타임머신 태우듯 소설 속에 폭 빠지게 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방, 내 책상 앞에 앉아서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순서에 상관없이 읽고 싶은 제목부터 읽어도 좋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좋다. 왠지 어느 쪽이든 작품이 독자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눈을 맡기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대한민국 중2는 북한에서도 떨고 있다는 말은 참 자주 들었다. 그런 표현을 이용해서 소설을 떠올린 걸까? 첫 번째 소설인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외계인이 지구의 생명체 중 하나를 샘플로 포획하기 위해 그 대상을 '중딩'으로 설정한 배경으로 시작한다.

포획대상 : 지구의 비밀 병기 '대한민국 중딩들'
서식지 : 대한민국 고양시
외양적 특징 : 핏발 선 눈으로 힘없이 걷는다. 유니폼을 입고 다닌다.
정서 및 행동 반응 : 슬쩍만 건드려도 공격성을 드러낸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다.
12쪽 - 대한민국 중딩들에 대한 보고서(by 트룹행성 다섯 개 행정부서)

트룹행성에서 나온 공무원은 이런 문서 하나 달랑 들고 대한민국 고양시의 어느 길가에 도착한거다. 자신이 파악한 중딩의 특징에 딱 어울리는 한 사람을 겨우 찾아서 우주선으로 끌고 가는데, 사실은 한 노인이었다. 진짜 중딩 '기영'이는 본능적으로 노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너희가 찾는 중딩이 바로 나라며 기영이 자신을 트룹 행성으로 데려가라고 떼쓰기 시작한다.

난감해진 트룹행성의 공무원인 촤츠... 무려 다섯 개의 부서에서 조사했다는 대한민국 중딩에 대한 정보라지만 제대로 맞다고 장담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중딩들의 특징을 얼마나 자신있게 기록할 수 있을까? 모두가 생각하는 특징들이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
트룹행성으로 돌아간 공무원 촤츠는 '대한민국 중딩'에 대한 책을 써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끝내 거절한다. 섣불리 기영을 묘사하려다간 누구처럼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 기영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35쪽 일부 요약 서술

두 번째 소설인 <최후의 임설미>는 지구인들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츠바인 행성에서 온 우주인들이 나온다. 그들은 지구를 정복하고 인류를 멸종시키기 위한 과정에 착수하며 '인류 멸종 유예에 관한 협의문'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스파이가 된 외계인들이 지속적으로 인류 멸종을 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제목에 나오는 임설미란 사람은 우주인들이 생각하는 인류 멸종에 대한 동의 의견 표식으로 삼은 '삼색 슬리퍼'를 신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다. 임설미만 삼색 슬리퍼를 신으면 인류 모두가 동의한 것으로 삼고 멸종의 버튼을 누를 작정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세를 따르는 걸 정의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삼색 슬리퍼를 신는 가운데, 여전히 초등학생 때 신던 흰색 실내화를 신으면 비정상이 되는 사회.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서 우주인들은 멸종을 합리화하려는 거였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지구인으로 변신한 우주인 스파이 오시택이 눈여겨 보는 문장( 나는 전설이다 라는 책의 221쪽 문장)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세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행동과 판단이 곧 인류 멸종에 대한 동의의 표시였다니.
유일하게 삼색 슬리퍼를 신지 않은 임설미는 그들에겐 '단 하나의 존재'이고 '정상'이 아닌 존재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했고, 어떻게든 삼색 슬리퍼를 신고 싶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최후의 한 표, 최후의 막강한 결정권을 가졌지만 그 사실은 전혀 모르는 임설미는 단호하다. 남들이 삼색 슬리퍼를 신든 말든, 자신에게 제일 편한 흰색 실내화를 끝까지 신고 다닌다. 그리고 우주인들의 계략을 알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임설미가 혹시라도 삼색 슬리퍼를 신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던 차혜린 역시 이미 한 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설미와 같은 흰색 실내화를 신고 당당히 걸어나간다. 결코 정상이란 표현이 다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걸 반증하며 소수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너만 모르는 엔딩>에서는 우주에서 온 점술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셋팅해보려는 청소년 호재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옥신각신하던 여사친 민아와는 절대 부부의 연이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방향으로 셋팅해가지만, 결국 마음을 바꿔 민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점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재의 시간여행을 도와주면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자처하며 호재를 돕는 점술사의 모습은 다소 황당스러운 설정이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제목과 같이 너만 모르는 엔딩.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덤덤하게 호재를 대해온 민아의 마음이 설마 아무것도 아닌 마음이었을까? 왠지 결코 아닐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민아와 연결되기 위해 삶을 다시 셋팅하는 호재의 간절함과 긴박함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너만 모르는 엔딩이 해피엔딩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날의 인간 병기>는 우연히 신개념 의복 체험자로 나선 17세 경수가 실수로 방호복이 아닌 전투복을 입으며 생기는 해프닝이다. 그가 입은 것은 테러 지역에 파견될 특수부대원들을 위한 전투복. 모든 것이 인체 센서에 맞게 날렵하면서도 파워풀한 힘을 발위할 수 있는 사이버웨어를 입은 경수를 보는 사람들은 그저 코스프레 중이겠거니, 배달원이겠거니 생각할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의복이었다. 쎈척하는 학생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결국 자퇴까지 한 친구의 한을 풀어주고, 억울하게 외상을 달게 된 자신의 한도 풀어주기까지 스토리가 어찌보면 어린 시절 파워레인저 영상물을 보는 기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악당을 처벌하는 정의로움과 마음 깊숙한 곳까지 시원해지는 사이다 해결장면들이 보기 좋은 단편영화를 보는 듯 읽히는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인 <알파에게 가는 길>은 인간이 인간의 욕구를 위해 만든 베타 대체 인간의 이야기다. 알파는 곧 원래 인간 그 자신이리라. 대체인간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서 인간 가족과 살다가 인간이 죽으면 폐기되는 삶을 살아간다. 미카 역시 그랬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것. 별 의미없는 조깅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주인을 잃은 대체인간을 찾아서 팔아넘기는 사냥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인간이 아닌 인간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인간들에게 지상낙원이 있다는데, 그곳은 바로 원자력발전소 붕괴 사고로 버려진 피폭 지역. 그곳으로 탈출하기 위해 미카 역시 거액의 수수료를 내고 브로커를 만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머릿 속을 가득 채운다. 외면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을 찾아서 결국에는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원래 모습의 주인인 알파를 찾아 나선다. 기억 속에서 알파인 진아가 자신에게 한 말 한마디가 미카에겐 삶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지 마, 베타."

진아의 베타로 만들어진 대체인간 미카의 삶이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자, 찐우정과 사랑으로 베타를 지키려 한 알파 진아의 진심을 확인하는 결말이다.

요즘은 SF소설이 참 많이 출간되는 것 같다. 최영희 작가도 UFO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고, 외계인과 청소년에 대한 관심도 많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우리도 외계 생명체나 미확인 물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환상 속에 빠져보는 즐거움을 느꼈겠지만, 우리의 생각과 상상은 거기서 끝났다면, 최영희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상상이 체계를 잡고, 스토리로 엮여서 하나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SF소설이란 점에서 이 다섯 편의 소설들과 함께 연말을 지내보는 것도 즐거운 상상여행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