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 듣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는 다정한 만남 -『박각시와 주락시』의 김기정 작가, 장경혜 작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장맛비 틈새로 해가 반짝 비추던 날, 『박각시와 주락시』의 글작가 김기정 선생님과 그림작가 장경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박각시와 주락시』는 글작가와 그림작가 두 분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작업해 온 책들과는 다소 다른 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백석의 시(詩) 「박각시 오는 저녁」을 바탕으로,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면 더 좋은 따스한 삶의 가치를 담아낸 동화 『박각시와 주락시』. 뜨거운 여름, 나지막이 듣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는 김기정 작가 · 장경혜 작가와의 만남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김기정 선생님께서 작가가 된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습니다. 『박각시와 주락시』는 작품 그 자체의 성격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기존 작품들과도 조금 다른 이야기인 듯합니다. 책을 담당하고 처음 미팅을 가졌을 때, 선생님께서 ‘한국적 판타지’를 그려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작품을 통해 한국적 판타지에 대한 구현이 잘되었다고 보시는지요?
 
김기정 : 섣불리 ‘한국적’이란 말을 덧붙이는 건 좀 건방질 것 같아요. 다만 오래전부터 저한테는 ‘이 땅에서만 나올 수 있는 판타지란 뭘까?’란 숙제가 있어요. 그 연속성에서 백석의 시를 읽는 순간, 뭐랄까… 제 기억 속의 판타지 한 순간이 떠올랐다고 할까요? 그건 시공을 초월해서 이 땅에 사는 이들이 더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서란 생각을 했어요. 뭔가 실마리 하나를 잡은 기분 같은 거 말입니다. 그리고 제 기존 작품과 다르다고 하셨는데, 전작들에서는 일단 캐릭터를 세워 놓고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 반면, 이 작품에서는 절제와 생략이 더 많아요. 그래서 작품 안에 굳이 다 말하지 않았어도 씹을수록 더 다른 맛이 그려지는 이야기들이 보일 겁니다. 어른들의 공감이 더 클 거라 생각해요.
 

그림 그리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이고, 박각시(박각시나방), 주락시(줄각시나방), 땅지영감(땅강아지) 등 여러 풀벌레가 등장하니 말이지요. 장경혜 선생님, 『박각시와 주락시』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장경혜 : 처음 원고를 받고 뭔가 아련한 느낌이 정말 좋았습니다. 마침 그때 미야모토 테루의 『반딧불 강』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두 작품이 문체도 내용도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어딘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제는 없는 것의 이야기, 다시는 안 올 어린 날의 시간들, 어린 마음에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정들…. 그런 것들이 글 속에 있었고, 저에게 선물같이 찾아온 기회라 생각이 들어서, 꼭 작업해 보고 싶었습니다.
재료는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 막연히 파스텔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 사용하지    않는 재료다 보니 손에 쉽게 익지는 않더라고요. 그림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처음 의도와  는 다르게 주제고 뭐고 느낌이 잘 표현되지가 않았어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재료가 편안해지고 조금씩 그림에 힘을 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또 주제를 전하는 이야기 방식이 은은하기 때문에 그림이 그걸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최대한 ‘캐릭터화’ 하지 말자라는 것에 처음부터 합의를 보고 시작했고, 그림이 그걸 잊고 과하게 표현될 때마다 끊임없이 주변에서 따뜻하게 일러주며 도움을 주셨고요. 처음 글을 읽었을 때의 아련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작업하는 내내 제 마음대로 변질되거나 휘발되지 않게 수시로 다짐해 가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은데, 그 느낌이 잘 표현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고, 겸손의 말씀이세요. 선생님 그림을 보다 보면 친자연적 정서가 느껴지곤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하고 담백한 기운이랄까요?  ‘장경혜 기법’으로 불릴 만한 드로잉도 그 특유의 매력이 뛰어나고요. 평소 그림을 그릴 때 어떠한 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작업 하시는지요? 
 
장경혜 : 글을 읽자마자 글과 어울리는 그림이 바로 떠오르고 단번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처음 혼자 글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이야기 속 다른 면들이 보이기도 해요. 또 제가 해내야 할 몫에 대해서도 작업마다 매번 다르게 생각되는 지점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작업에서는 그야말로 주제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작업에서는 그림 자체의 표현과 형식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기도 하는 것 같고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미리부터 어떻게 그려야지 하고 답을 정해 놓는, 생각과 글과 사람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많이 느끼게 되는데요. 중심은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물 흐르는 대로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열린 마음으로 성실하게 대처하다 보면 상황이 그림의 길을 알려 줄 때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김기정 선생님은 그동안 『바나나가 뭐예유?』, 『해를 삼킨 아이들』 등 어린이문학계에 굵직굵직한 발자국을 남겨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작품마다 ‘아, 김기정 작가가 썼구나’ 싶을 만큼 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문체와 유머, 순수함이 담겨 있다는 생각입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오고 계신데요, 평소 글을 쓸 때 어떠한 점을 중점에 두고 작업하시는지요?
 
김기정 : 글쎄요…. 일단 내가 정말 쓰고 싶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판단. 이 두 가지가 충족이 되면 써야죠. 딱히 어떤 주제나 소재를 먼저 정하고 들어간 적은 없어요. 그냥 내 안에서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으면 그게 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작업에 들어가서 염두에 두는 건, 동화로서 ‘강한 서사성’이나 ‘적정한 분량의 무게와 균형’이죠. 작가에게 작품은 하나의 생명체 같아요.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부터는 작품 스스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해요. 작가의 품을 떠나 별개의 존재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려운가요? 아휴, 이런 걸 작품 안에 넣기란 굉장히 흥미로운 만큼 힘들기도 하답니다. 
 
 
김기정 선생님은 작가이면서 세 아들의 아빠이기도 하시지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동화를 쓰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육아와 동화 쓰기, 많이 맞닿아 있는지요? 또한 선생님의 작품들 속에 자녀들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한지요?
 
김기정 : 아들 삼형제를 키운다고 하면, 주변 분들이 다 저를 좀 딱히 여기시죠. (웃음) 처음엔 제 작업과 생활을 따로 생각했어요. 당시 무조건 작업 시간이 우선이다 보니, 짜증도 많이 냈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차츰 글과 생활이 ‘따로’가 아니란 결론에 이릅니다. 무엇이 먼저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이며 삶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상당 부분 집안일에 시간을 많이 들입니다. 예전 같으면 투정을 했을 텐데, 이젠 기꺼운 맘으로 받아들이죠. 아이들 속에서 제가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서 이야기가 생기고 하는 거지요.
 
 
김기정 선생님은 시골에서 자랐고, 잠깐 서울에서 머물다가 지금은 용인에서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기운’이 선생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도시를 떠나 살아가는 건 어떠세요?
 
김기정 :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숲하고 가까운 게 더없이 좋더라고요. 전부터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일부러 자연을 찾아 여행을 할 필요도 없죠. ‘산책길에 마주친 노루와의 숨 막힌 눈싸움’, ‘가을 감나무 이파리에 비친 노을 빛깔’, ‘마당 풀밭 아래서 벌어지는 개미와 방아깨비의 혈투’ 그리고 ‘삼형제한테 내지르는 아내의 고함소리’까지. (웃음) 그냥 옆에 같이 있는 자연요. 저 역시 그 속에서 자랐으니까요. 제 안에는 고향에서 보낸 20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지금도 자주 숲으로 산책을 합니다만, 저 같은 몽상가한테는 작업하는 데는 외려 꽉 막힌 아파트 골방이 더 낫다 싶기도 해요. 숲에 한눈을 자주 팔거든요.
 

김기정 선생님은 편집자들 사이에서 ‘휴대전화 없는 동화작가’로도 유명하세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불편하진 않으세요?
 
김기정 : 딱히 불편한 게 없으니 그러겠죠? 집에만 있으니, 집 전화로도 연락이 충분해요. 메일도 있고요. 한 달에 한두 번 아쉬울 때가 있는데, 그땐 아들 휴대전화를 빌려 쓰면 되죠. 지금까지 제 작품 안에 휴대전화를 등장시키지 않은 일도 비슷해요. 꼭 필요하다면 생활에서든 작품에서든 갖추어야 할 테고요.
 

김기정 선생님과 장경혜 선생님, 두 분 모두 이력이 흥미롭습니다. 김기정 선생님은 작가가 되기 전 출판사 편집자로도 일하셨고, 국문과로 전공을 바꾸기 이전엔 법학과 학생이었다면서요. 장경혜 선생님도 그림 전공이 아닌 국문과 출신이시고요. 두 분 모두 지금의 일, 그러니까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김기정 :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전 나이 스물이 다 되도록 세상에 나 홀로였어요. 모든 관심이 나 자신뿐이었다고나 할까요? 아내는 아직도 그렇다고 하면서 저를 ‘나르시스트’라고 놀리곤 하는데, 갓 스물이 넘는 지점에서 이런저런 계기로 비로소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나 이외 사람이 보이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거죠. 저한테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게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이야기로 풀어 보면 좋겠다는 좀 낭만적인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둔한 머리로 우왕좌왕하다가 10년 넘게 고생을 많이 했죠.
 
 
김기정 작가(왼쪽)의 어린 시절
 
장경혜 : 어릴 때부터 낙서하고 공주 그림 그리고, 그런 건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물감이나 색깔 다루는 걸 좋아하고 풍경을 그리고 그러진 않았던 것 같고요. 늘 연필로 어딘가 귀퉁이에 사람 얼굴을 그렸던 것 같아요. 그냥 그 정도였고, 부모님이 미술대학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땐, 안 그래도 싫은 공부인데 그림까지 공부해야 되나 싶었어요. (웃음) 국문과는, 부모님이 가라고 하셔서 그냥 성적에 맞춰 갔던 것 같아요. 일단 국어는 좀 아는 말이니까요. (웃음)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디자인 학원에 다녔는데 거기서 ‘그림책 일러스트’라는 말을 처음 접했던 것 같아요. 수업 중에 그림책 하나를 골라 거기에 나오는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게 있어서 전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골랐는데, 남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건데도 정말 자유롭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요. 그 후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2002년도에 ‘한겨레 일러스트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이때 들었던 수업 내용 중 어떤 것은 지금도 그날 하루가 통으로 다 생각날 정도로 정말 좋았어요. 그때 그림책의 세계가 주는 매력에 풍덩 빠진 것 같아요. 이후에 바로 그림책의 세계에 뛰어들 게 된 건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작가나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 막연히 동경하게 되었어요.
 
장경혜 작가의 어린 시절
 
 
두 분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삶의 여러 길목을 돌아 이렇게 작가가 되신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편집자로서도 그렇고, 독자로서 더더욱요.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각시와 주락시』의 첫인상은 특별했습니다. 평소 듣지도 보지도 못한 벌레들이 주인공인가 싶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 번 두 번, 원고를 읽다 보니 생각나더라고요. 저 역시 고마처럼 어린 시절에 할머니 집에 가서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만 평소에 바쁘게 지내다 보니 잊고 있을 뿐이었지요.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미처 돌아볼 틈도 없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에 대해서요.
 
김기정 : 집이란 개념을 재산으로만 본다면, 계약관계로 맺어지는 종잇조각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우리는 집을 그런 맥락으로 판단하잖아요. 뉴스를 장식하는 상당 부분이 그 이야기인 것만 봐도요. 그러나 집은 본질적으로 숱한 생명을 품고 있는 존재예요. 나와 식구들이 자랐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요.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 못했던 숱한 생명들이 있는 것이고요. 단지 집만이 아니라, 지구, 자연 등등 그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 같은 게 필요하단 생각입니다.
 

작품을 읽고 나면 ‘지금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고요. 두 분께서 지금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요?
 
장경혜 :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붙잡고 있는 화두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에는 ‘진실’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요.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못 하고 20대, 30대 초반을 이런저런 방황의 시간을 보내면서 제 머릿속에는 늘 ‘희망’이란 단어가 있었던 것 같고요. 책을 내고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면서는 이상하게 ‘죽음’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요즘은 비로소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이왕이면 끝까지 갔으면 좋겠어요.
 
김기정 : 오랫동안 ‘기억’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개인이든, 사회이든 요즘은 너무 쉽게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개인사와 역사가 따로가 아니듯 ‘기억’은 그만큼 중요한데, 근래에는 기억에서 몇 발 더 나아간 듯합니다. 결국 그 기억도 ‘지금’을 위해 있는 거란 생각입니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먼 미래를 봐서 지금을 양보해라!”라는 말을 잘 안 하려고 해요. 나중이 행복하려면 지금도 그러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해요. 지금 자신에게 행복한 건 “게임.”, “맛난 것.”이라고요. 그러면 이제 제 인내심을 시험해야 합니다. “아, 정말 그게 너의 행복일까?” 하고 물으면 “응” 대답하지요. “게임하고 맛있는 거 먹고 나면?” 묻자마자 돌아오는 대답은 “잘 거야.” …… 휴, 어린 녀석하고 이야기하기란 참 어렵더군요. 그래도 늘 기준을 삼긴 합니다. ‘지금의 가치!’에 대해서요.
 

 
작품에서 애정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기정 : 고마를 보고 풀벌레 어르신들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그냥 그 존재로 기억해 주는 것. 한마디 인사 안에서조차 이름만이 아니라 그 존재의 과거를 어루만지고 현재를 반가워하며 미래를 기약해 주잖아요. 굉장히 고마운 일이죠. 지금도 제가 시골에 가면 그 시절의 어르신들이 그러시거든요. 그 순간만큼은 30년 시공을 건너뛰는 기분이랄까?
 
장경혜 : 대부분의 장면은 거의 두 번씩 다시 그렸는데, 마지막에 고마와 아빠가 할머니 집 마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는 장면만 다시 그리지 않고 그대로 갔던 것 같아요. 그 장면이 다른 장면을 그릴 때의 기준이 된 것 같고 저도 그림 그릴 때 느낌이 좋아서 무척 애정이 갔어요.
그런데 막상 책이 나오고 나서, 책을 손에 쥔 상태로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박각시가 집을 보러 왔다가 없어져서 고마네 식구들이 박각시를 부르며 찾아나서는 면에서 이상하게 계속 손이 멈추더라고요. 앞 장의 소컷과 함께 이 장면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면서 무척 드라마틱하게 느껴져요. 소컷과 그 장면의 사이 어디쯤에서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김기정: 음, 잘 보셨어요. 바로 그 지점이 판타지로 가는 길목이랍니다. 이쪽에서 애타게 뭔가를 찾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양질의 변화가 생기죠. 이야기가 진화할 수 있는 동기가 나타났단 말인데, 이 도움닫기를 통해 갑자기 비약하고 갈등과 해소 그리고 드디어 제자리. 간단해 보입니다만,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이 없겠지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건 특히 더 그럴 것 같습니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작업을 해 나가셔야 하니까요. 진도가 잘 안 나갈 때, 마음처럼 글이 안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 어떤 방법으로 이겨 내세요? 스트레스 해소법이나 위기 탈출 대안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기정 : 저는 매일 아침 배드민턴 운동을 해요. 아무래도 산문을 쓰려면 체력이 제일 중요하더라고요. 그리고 작품이 안 써질 땐 주로 혼자 술을 먹어요. 맞은편에 캐릭터나 화자를 데려다 놓고 같이 수다를 떱니다. 그러다 가끔 지독하게 취하죠. 최근엔 바꿔 보려고 노력중이에요. 상상력이 진화하면 맹물로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웃음)
 
장경혜 :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거니까 그림만 안 그릴 수 있는 쪽으로 해서 다 하는 것 같아요. 요즘 저는 ‘스트레스는 건전하지 않게 풀어야 풀리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있어요. (웃음) 운동이나 산책, 여행 같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것보다는, 영화를 보거나 만화책을 읽고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 보고… 인터넷을 온종일 하거나 멍하니 누워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주변에 휩쓸리면서 정작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지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합리화 했던 시간들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한심함과 죄책감이 폭발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럼 그 힘으로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웃음)  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네요.
 
 
장경혜 선생님의 다른 그림들도 그렇지만, 특히 『둥근 해가 떴습니다』는 품고 있는 이야기가 그림 안에 오롯이 응축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선생님이 그림뿐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선생님만의 ‘이야기’를 보여 주시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됩니다.
 
장경혜 : 『둥근 해가 떴습니다』 이후엔 계속 다른 분들의 글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했었어요. 가끔은 제 얘기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초조함과 답답함이 있기도 했지만, 하는 일들을 내려놓고 온전히 제 마음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만큼 용기도 없었고, 열정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그렇게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해야 그림 작가라고 불러 주니까 막연히 나도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할 텐데 하고 어떤 직업적인 숙제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결국 폭발할 것처럼 하고 싶은 얘기가 없으면 나는 결국 못 하는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고요.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 본 적도 없으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거나 전공을 하신 다른 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막상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림이라는 세계 안에서도 차근차근 물리적인 시간을 투자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단계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다른 분들의 글에 한 권의 책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그림을 그리면서 글 읽는 힘과 손 힘을 키우고 그렇게 시간을 잘 보내다 어느 순간 더 나이가 들어 뭔가 진짜로 밥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제 자신의 마음에 매달려 보고 싶어요.
 
 
김기정 선생님은 고마의 또 다른 이야기를 집필 중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사계절출판사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고요. (웃음) 고마 말고도 어떤 작품을 구상 중이신지요?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어떤 작품일지 궁금합니다.
 
김기정 : 처음 동화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판타지’를 꼭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한편으론 우리 창작 마당에 그만큼 판타지가 적어서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게 다르듯, 막상 써 내는 건 차원이 다르더군요. 그래서 한발 한발 조심스레 왔다 싶었는데, 10년인데도 갈 길은 까마득하기만 해요. 머릿속에 늘 서너 개 이야기가 저를 괴롭히고 있어서 딱히 뭐라 말씀드릴 처지는 안 되고요. 앞으로 더 열심히 파다 보면 한 20년 쯤 뒤엔 제 머릿속의 판타지가 좀 크게 그려져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김기정 : 현재 책을 고르는 일은 대개 학부모님들께 있어요. 장차 우리 아이들이 이 선택권을 갖는 게 바람직한 일일 거라 믿습니다. 스스로 고른 책 한 권이 시작일 테지만, 늦더라고 그게 옳은 길입니다.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서 스스로 책을 골라 읽는 습관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투자라고 생각해요. 서점과 도서관 문턱이 닳도록 아이들 등짝을 떠미시길.
 
장경혜 : 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데 이 일을 하는 이상 계속 어린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어린아이들과 또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어른들을 만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지하철이나 버스 등 낯선 곳에서 문득 마주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움츠러들다가도,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어린아이를 발견하면 구원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계속 구원받고 싶고, 또 언젠가 저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및 정리 l 사계절출판사 아동청소년문학팀 이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