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서평] 과학과 사회 문제를 연결하다_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 관장


나를 키운 건 과학소설가 아서 C.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쥘 베른, H. G. 웰스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선구자로 꼽히는 한낙원(1924~2007)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창피함을 상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2014년 제정된 ‘한낙원과학소설상’ 의 수상작을 매년 빠짐없이 챙겨 읽고 있다. 올여름 출간된 『우주의 집』은 이 상의 1~5회 대상 수상 작가들이 참여한 SF 앤솔러지로, 매해 겨울 출간되는 수상작 작품집과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SF’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키워드가 떠오르는가? 최근 몇 년 간 다수의 과학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경험에 따르면 응모작 중에는 ‘우주여행’ ‘외계인’ ‘인공지능’ ‘로봇’ ‘복제인간’ ‘순간이동’ ‘기억전달’ ‘시간여행’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창작자뿐만 아니라 독자들 또한 이제는 이러한 SF 키워드들에 퍽 익숙할 것 같다. 『우주의 집』 수록작 다셧 편 역시 독자에게 친숙한 SF 키워드를 소재로 한다. 하지만 SF적 상상력과 과학 지식을 조합해 궁극적으로는 동물권, 장애, 노인 문제, 탈북민,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회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책의 맨 앞에 실린 문이소의 「완벽한 꼬랑내」는 비윤리적인 생명 복제 실험을 감행하는 기성세대에 맞선 어린 자매와 개의 우정을 그렸다. 독자가 공감할 만한 인물과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구조로, SF를 처음 접하는 청소년 독자들을 SF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독자라면 주인공 자매에게 깊이 이입할 것이다. 

이어지는 고호관의 「우주의 집」은 독자를 지구에서 가까운 우주 정거장으로 초대한다. 우주 정거장은 말 그대로 ‘정거장’이므로 잠시 머무르는 곳이지만, ‘우주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기’인 주인공 소년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자신의 운명을 비판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청각 장애를 가진 한 소년을 만나, 자신의 ‘우주적’ 정체성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게 된다. 

여러 작품이 담긴 앤솔러지에서는 전개상 중간쯤에서 갈등 국면을 다룬 이야기가 나오면 독서의 재미가 배가된다. 반갑게도 세 번째로 수록된 남유하의 「실험도시 17」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모든 인간의 꿈은 불로장생이다. ‘장생(長生)’도 중요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불로(不老)’가 핵심이다. 평생 열일곱 살로 살 수 있는 도시의 시민권을 얻게 된 주인공이 도시로 가기 전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노화를 거부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질병과 노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 문제를 SF적 상상력 안에 능숙하게 담아내 깊은 통찰을 이끌어 내는 작품이다.

갈등은 고조되어야 제맛이다. 마지막 수록작 두편은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좀 더 오래, 깊이 머물고 싶어 하는 독자의 욕구를 충족한다. 최영희의 「묽은것」은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의 삶을 작가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극심한 심리적 긴장 상태에 놓인 인물에게서 생체 에너지가 떨어져 나와 돌아다닌다는 설정이 아름답고도 새롭다. 윤여경의 「문이 열리면」은 독자를 머나먼 시공간으로부터 다시 이곳의 ‘생활’ 속으로 데려온다. 작가는 ‘시공간 이동’을 넘어선 ‘시간 발작’이라는 독특한 SF 장치를 통해 한 탈북 소녀의 아픔을 드러낸다.

『우주의 집』은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지 않은 존재들을 따뜻하게 살피는 작품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청소년 독자라면 앞으로도 SF 문학을 즐기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각 단편의 이야기 구조뿐만 아니라 수록 순서 또한 무척 치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상차림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먹는 사람이 소화하기 쉽게 작품 순서를 배치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 작품이나 먼저 읽기보다는 편집된 순서대로 따라 읽기를 권한다. SF 앤솔러지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뛰어난 작가와 편집자가 함께 완성한 책이 집에 없으면 살짝 부끄러워질지도 모른다.

-이정모(국립과천과학관장) 출처: 『창비어린이』 202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