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생, 책 놓고 욕하다 '광명' 찾은 사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천문학을 전공했다고 내 자신을 소개하면 거두절미하고 내일 날씨가 어떨지를 물어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아마 조선시대에 관상감이 있어서 천문과 기상 업무를 같이 맡았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과학사적인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진짜 알고 물어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부분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일기예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나는 천문학과 기상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 질문을 피해가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지는 기상학을 전공한 친구들한테 주워들은 내용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그냥 눈 딱 감고 날씨 전망을 말해주곤 했었다. 일기예보 전문가도 틀리기 일쑤인 날씨 전망이니 내가 하는 일기예보가 틀린다고 한들 별 대수냐 싶어서였다. 물론 마음 한구석엔 어색하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기에 지치기도 해서 한때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
 
별자리 점이나 점성술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예전에는 역시 천문학과 점성술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질문을 한 당사자는 내가 '차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벌써 흥미를 잃고 의례적으로 내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이라 나는 늘 천문학과 점성술의 '차이'에 대한 완결된 이야기를 다 하고서야 내 말을 멈추곤 했었다. 한때는 그냥 내가 아마추어 천문가 시절을 거치면서 알고 있던 쥐꼬리만한 별자리 지식을 활용해서 마음대로 별점을 쳐주곤 했었다. 번거로움을 벗어나보자고 좀 장난스럽게 했던 일이지만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던 몇몇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날씨나 점성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앞으로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에는 또 다른 힘든 질문을 많이 받는다. 바로 책에 대한 질문이다. 천문학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어떤 책을 보면 되겠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몇 차례 고백을 한 적이 있지만 내가 천문학 대중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게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주로 서평을 쓰기 위해서 선택된 제한된 책들을 읽어왔다. 체계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독서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중 나와 있는 천문학 대중서에 대한 균형 잡힌 데이터베이스가 내 머릿속에는 없다. 그동안 서평을 쓰고 책과 관련된 일을 자주 하다 보니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그냥 스케치를 시작한 정도의 수준이다.
 
처음 천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리고 어떤 책부터 읽기 시작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내게 하는 사람에게) 내가 권하는 책은 벌써 십 수 년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다. 천문학 대중서의 현황 파악에 대한 나의 인지적 한계가 일부 작용한 탓이다. 물론 <코스모스>가 여전히 내겐 감동적이고 이를 대체할 만한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일 것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천문학 대중서를 읽을 때마다 내가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화두 중 하나가 과연 이 책을 첫 번째 천문학 책으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천문학 뿐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의 책들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도 자주 받는다. 그동안은 내 전공 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고사해왔지만 서평에 천문학 이외의 다른 분야의 과학책들도 다루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고 궁색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그 분야의 '첫 번째 책' 찾기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었다.
 
책들은 넘쳐나고 좋은 책들도 곧잘 눈에 보인다. 하지만 '첫 번째 책'으로 권하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마음에 걸린다. 균형감 없거나 너무 흥미에만 치우쳤거나 기본 개념 설명보다는 현상 소개에 그친 책들을 '첫 번째 책'으로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독자 입장에서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개념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책. 현란하지 않으면서 가독성이 좋은 책. 그 분야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 이런 책이 내가 찾고 있는 어떤 분야의 '첫 번째 책'이다. 솔직히 소박한 바람이다. 물론 격조 있고 동시에 소박한 경지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윤소영 풀어씀, 사계절 펴냄)가 바로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책이다. 진화 이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권하는 '첫 번째 책'이 바로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리고 진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작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이'와 '자연선택'에 대한 신념, 그 신념을 키워 준 관찰과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신중하고 겸손하게."
 
 

진화 이론의 열쇳말이라면 종, 생명의 나무, 자연선택, 적응, 부산물, 변이, 성선택, 형질, 유전, 이보디보, 다양성, 복잡성 같은 단어들일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이런 열쇳말들을 자연스럽게 책 속 이야기에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열쇳말들이 정의1, 정의2, 같은 방식으로 고압적인 태도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봄볕이 따사로운 오후 선생님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감미로운 이야기처럼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책 속에 등장하고 있다. 책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진화 이론의 개념들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몽적이지 않지만 명확하고 간결하게 기초 개념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는 현대 과학이 얼마나 진화 이론을 잘 증명하는지 구태여 현란하게 현상 설명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할 것 같은 자리에 꼭 필요한 사례를 들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청소년용으로 기획되었고 분량의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곳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담백하면서도 정확하게 개념을 전달하고 있는 흔하지 않은 책이다. 결국 이런 점들이 모여서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를 가독성 높은 책으로 만든 것 같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풀어서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역시 지은이의 균형 감각이 돋보였다. 다른 책을 해설하는 책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는 듯하다. 다윈 시대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던 진화 이론을 적절한 곳에 잘 반영했다. 유전학을 접하지 못했던 다윈의 고민을 잘 녹여내면서 현대 과학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이 어떻게 진화 이론을 강화시키고 있는지 균형감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쯤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이 인용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꼭 필요한 구절이 인용되고 있었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는 사계절 출판사의 주니어클래식 시리즈의 첫 권으로 기획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니겠는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같은 책들도 이 시리즈를 통해서 풀어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종의 기원>을 거의 열 번의 시도 끝에 완독하고 정독할 수 있었다. 중학생 때 처음 <종의 기원>을 손에 잡았지만 반복되는 비둘기 이야기에 지쳐서 내던져버린 후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 차례 읽기를 시도했었다. 번번이 반복되는 비둘기와 개의 품종 개량 이야기 때문에 흥미를 잃고 좌절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번역도 좀 엉터리가 많았던 것 같고 오래 전에 쓰인 책이니만큼 그 문체 자체도 어린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는 여러 다른 종류의 비둘기를 모두 다 그냥 비둘기로 번역해 뒀던 책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에게 <종의 기원>을 소개하고 읽혀야 하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종의 기원>을 정독해서 읽었다. 수도 없이 욕을 하면서 읽었다. 이번에는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주로 번역 문제 때문에 화가 났었다. 어쨌든 나는 정말 어렵게 <종의 기원>을 의무감에서 완독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게 있다. 실력을 갖춘 번역자가 반드시 <종의 기원>을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것과 오래된 책인 <종의 기원>에 (더 넓게는 진화 이론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해제 같은 해설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새로운 <종의 기원> 번역본이 나왔다. 내가 기대하고 있는 번역자의 <종의 기원>도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번역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는 <종의 기원>에 대한 훌륭한 해제이자 해설서이다. 하지만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다윈 이후'를 잘 정리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또 과학책 서평을 쓰는 서평가의 입장에서 나는 <종의 기원, 자연선택의 신비를 밝히다>를 진화 이론의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이명현 (천문학자)
 
※ 본 기사는 프레시안 [이병현의 '사이홀릭']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