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해설] 도깨비가 없다고?


 
 
도깨비 나라의 시민권
 김륭(시인)
 
‘!’
 
‘도깨비가 없다고?’ 그러니까 동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쓴다. ‘도깨비가 있다고?’라는 질문을 던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덧붙여 이 답을 수학 공식으로 풀어 보면 이렇다.
 
‘? + ! = 도깨비방망이’
 
‘감탄하다’는 뜻의 라틴어 ‘io’에서 유래된 느낌표는 강조를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의 뒤에 온점 대신 놓인다. 또한 더 큰 강조를 하고 싶을 때 !!, !!!와 같이 연속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 !?와 같이 물음표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앞서 말한 수학적인 답을 다시 짧고 명쾌한 문장으로 환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왜 이렇게 골치 아프게 시작돼야 하는 걸까? 그것은 그저 그 옛날의 도깨비를 차용,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만족하고 싶지 않은 시인의 시정신과 의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도깨비가 없다고?』라는 제목부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동시집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상징적 의미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게 아니다. 도깨비가 각 시편마다 제각기 다른 서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그 의미를 다시 요구하는 창조적 상징으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 + ! = 도깨비방망이’라는 다소 황당한 등식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만 ‘도깨비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된다.
 
도깨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
그렇다. 아이들은 물론 우리 모두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리 민간 신앙에서 믿는 초자연적 존재 중 하나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도 요약되어 있는 도깨비는 ‘있음, 없음’의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어쩌면 신화 혹은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를 불러들일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우리의 시공간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의 세계에 가까워질수록 그렇다. 이를테면 도깨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도깨비방망이를 야구 방망이처럼 휘두르고 놀 수 있고 싸울 수도 있다. 도깨비와 친구가 되어 도깨비불을 찾아다닐 수도 있고, 타임머신을 타고 도깨비가 살던 시절로 가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환상 혹은 상상의 세계는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하거나 단순한 유희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현실 세계를 둘러싼 삼라만상의 여러 요소들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빛과 그림자처럼 반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깨비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도깨비 보러 가자.
 
고개 언덕에 숨어 사는
산도깨비
이 밤에 뭘 해 먹는지.
메밀범벅 해 먹는지,
호오호오 메밀국수 해 먹는지.
 
달음박질쳐 가 보자.
이불은 뭔 이불인지
풀잎 이불인지
부엉이 깃털 이불인지
땅에서 자는지 공중에서 자는지.
 
산도깨비 외로워 울거든
울지 마! 울지 마! 달래 주고 오자.
 
-「도깨비 보러 가자」 전문
 
이 동시집의 관문 격인 「도깨비 보러 가자」를 쓰기 전 시인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보고 있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이 진짜일까. 어쩌면 여기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도깨비처럼.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진짜가 아닌 건 도깨비일까, 도깨비를 보고 있는 눈일까?”
우리는 도깨비를 직접 마주친 일이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거울을 통해서나 무엇에 비추어서 엿봤을 뿐이다. 이처럼 실제로 본다는 것처럼 불확실한 것도 없다. 이 말을 뒤집으면 확실한 것도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은 가능한지 모른다. 아이들이 그렇고 우리가 가진 꿈과 사랑이 그렇질 않은가.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환상이라는 단어는 문학적이면서 동시에 심리학적인 용어다. 문학적인 용어로서 환상은 불가능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취급하는 어떤 서사를 의미한다. 시인은 이처럼 아이들을 독자층으로 하는 동시라는 장르에 추상적인 이론을 투영,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개 언덕에 숨어 사는/산도깨비”가 “이 밤에 뭘 해 먹는지.” 알아보고 “땅에서 자는지 공중에서 자는지.” 궁금증을 한껏 유발시킨 다음 하고 싶은 말을 툭, 던져놓는다. “산도깨비 외로워 울거든/울지 마! 울지 마! 달래 주고 오자.” 심리학적인 용어로서 도깨비라는 환상이 문학적으로 구상화되는 이곳이 바로 시인의 시가 발화되는 지점이다.
 
외로움 + 도깨비 = 내 친구
시인이 호명한 도깨비는 현실과 환상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단순히 상상력에서 비롯된 구성물이 아니다. 어떤 문학 작품에서 구현된 것과는 별도로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유형이 있을 수 있다면, 이번 동시집이 그런 경우다. 시인은 옛이야기 속 도깨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거울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그의 도깨비는 지금 당장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신화다. 물론 신화라는 단어는 이미 환상적인 의미가 있으며 불가능한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룬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필연적인 것이 느껴져야 신화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시인이 불러낸 도깨비는 단순히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도깨비가 아니라 시인의 심상에 비쳐져 투명하게 구체화된 이즈음 아이들의 이미지가 더해져 빛을 발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가 재해석해 낸 도깨비의 ‘감정’ 속으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그의 은유와 상징이 아이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앞에서 이미 부여받은 ‘도깨비 나라의 시민권’과 함께 시간적 제약 없이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도록 숨겨 놓은 ‘도깨비방망이’까지 가질 수 있게 된다.
 
집에 가는데
도깨비가 내 다리를 건다.
내가 비틀, 한다.
도깨비가 따라오며 또 내 다리를 슬쩍 건다.
내가 자빠질 뻔한다.
도깨비가 따라오며 또 내 다리를 휙 건다.
내가 코방아 찧을 뻔한다.
도깨비가 따라오며 또 내 다리를 냅다 건다.
내가 발목을 까일 뻔한다.
도깨비가 따라오며 또 내 다리를 들입다 건다.
내가 허방다리 짚을 뻔한다.
 
그사이 집에 다 왔다.
도깨비, 나를 두고 혼자 돌아간다.
외로워 보인다.
-「외로움」 전문
 
「외로움」은 얼핏 쉽게 읽힌다. 그러나 ‘도깨비’와 ‘외로움’이란 단어가 어울릴 거란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슬쩍, 꺼내 놓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동시가 그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한가로운 서사나 느슨한 언술, 고정된 언어 형식에 상투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장르가 아님을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구방아, 목욕 가자』, 『엄마와 털실뭉치』 등 이미 여러 권의 동시집을 통해 확인했듯 시인의 동시가 가진 ‘힘’은 시간 속에 담긴 불확실한 나를 넘어 또 다른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것은 도깨비처럼 역사의 뒤꼍으로 밀려난 이야기들이 교과서가 아닌 삶에서 다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 등에 박제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주소지를 둬야 한다고 믿는 어른 작가로서의 시정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슬쩍”, “휙”, “냅다”, “들입다” 등의 부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시편은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투명하리만큼 정확하게 짚어 낸다. 치밀한 문장과 수사법 등에 공을 들인 흔적에서 그 울림을 더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이 개입되지 않은 외로움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주제의 힘이 시인이 가진 언술의 진정성을 견인하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의 힘이다. “도깨비, 나를 두고 혼자 돌아간다./외로워 보인다.” 도깨비가 아니라 아이 혹은 우리 모두의 외로움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이처럼 시적 진정성으로 삶의 진실을 육박하는 시인 동시의 힘은 아이들과 엄마의 일상을 그려 낸 「한발 늦었다」, 「참새 구멍 앞에서」, 「아침부터 왜이러지?」 등에서도 확인된다.
「내 친구 도깨비」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둘둘 말아” 줬지, “휙” 줬지, “훌렁 벗어” 줬지, “냉큼” 줬지 등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부사가 문장을 이끄는 이 시는 정확한 문장력을 앞세워 주제를 장악하는 동시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구체적인 언술과 정직한 서사를
무기로 하는 시인의 동심은 우리가 쉽게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멀고 깊은 곳에 있다. 이를 서두에 인용한 ‘? +! = 도깨비방망이’처럼 수학적으로 풀어 보면, 일차적으로 ‘외로움 = 도깨비’가 되며 나아가 ‘외로움 + 도깨비 =내 친구’가 된다.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도깨비방망이 같은’(?) 이런 질문과 생각 또한 재미있질 않은가. 시인이 4부로 나눠진 이 동시집에 다섯 개의 ‘도깨비 수첩’을 따로 만든 다음 시(詩)로 차용하지 않은 도깨비와 관련된 역사적 질문과 답을 재미있게 풀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또 누가 빈다.
 
우리 아부지 취직 좀 하게 해 주세요.
도깨비, 그 말 듣고 운다.
-「그 말 듣고 운다」 부분
 
 
비 내리는 밤
느팃골 늙은 느티나무 고목 구멍에
반딱반딱.
 
이런 날 밤 어린 도깨비
잠이 안 온다.
 
산 너머 너머 너머
멀리 일하러 간 아부지가 생각난다.
 
아부진 언제 오나, 언제 오나.
 
고목나무 구멍에 불 달아 놓고
아부지, 아부지! 기다린다.
-「도깨비불」 전문
 


외적으로 다채로운 이미지 놀이를 하고 내적으로는 깊은 상징적 의미를 심는 그의 시적 전략은 앞에 인용한 「그 말 듣고 운다」, 「도깨비불」 등의 작품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 부사의 힘으로 운용되던 「외로움」, 「내 친구 도깨비」 등의 작품과는 달리 이번엔 ‘동사’가 주제를 장악해, 서사의 울림을 더욱 깊고 넓게 확장한다. “빈다”, “운다”(「그 말 듣고 운다」)를 비롯 “생각난다”, “기다린다”(「도깨비불」) 등의 동사들의 움직임은 불가능한 꿈과 아름다움, 행복에의 소망은 물론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득한 슬픔까지 불러내 어른 독자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진다. 이처럼 시인 특유의 정직하고 정확한 언술에다 각 시편마다 시적 전략으로 차용된 이미지에 품사를 얹어 구상화한 도깨비의 모습은 마치 만화경을 보듯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로 변주된다.
 
“너 지금 서 있는 거니?/앉아 있는 거니?” 하고 도깨비의 입을 통해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도깨비와 눈사람」, 「뒤는 워디로 볼까」를 시작으로 다양한 캐릭터의 도깨비들은 곧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내면이며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이들의 일상을 아주 쉬우면서도 생동감 있게 진술하고 있는 「동주와 도깨비」를 비롯해 “표를 내느라/울어도 꼭 집 안이 떠나가라 운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긋게 되는 「아기 도깨비」 앞에서는 입가에 고인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학교 간다 해 놓고 산에 놀러” 가고 “공부한다 해 놓고 쿨쿨 잠”자고 “학원 간다 해 놓고 풀숲 지렁이랑” 노는 도깨비, “숙제 한다 해 놓고 카톡” 하고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해 놓고 “저는 말똥말똥 만화책” 보는 「못 말리는 도깨비」 또한 마찬가지. 어디 이뿐인가. “엄마, 제 얼굴 한번 비벼 보세요./제 머리에 씌워 놓은 도깨비감투 한번/벗겨 놓고 보세요.”라고 학원 가기 싫은 아이, 공부에 짓눌린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 「도깨비감투」 같은 작품은 주제가 묵직한 수작이다. 이와 함께 「도깨비는 감투를 좋아해」, 「왕이 되고 싶다」 등의 시편들은 뭔가 멋진 걸 하고 싶고 으스대고 싶은 아이들의 심리까지 마법의 거울처럼 정확하게 담아낸다.
 
도깨비는 계속 출현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이번 동시집은 지금 이 시대를 제각기 살아가는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도깨비의 입을 빌려노래한 ‘도깨비 약전(略傳)’이다. 여전히 생활 동시 위주의 가볍고 얕고 짧고 작은 이야기가 주류를 이뤄 동시라는 문학 장르를 궁핍하게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 얼마나 의미 깊은 작업인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세계는 언제나 동심을 잃지 않는 꿈의 세계임을 ‘도깨비가 없다고?’라는 반의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은 어른 작가로서의 의지는 「아, 좋지」, 「추운 밤」처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풍경이나 사물들에 대한 깊은 관조로도 드러난다. 도깨비를 포기한다는 것은 삶을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상당 부분을, 나아가 동심의 세계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일지 모른다. 시인의 이번 동시집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어리석을 만큼 착하고,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는 게 도깨비라지요. 잘 토라지지요. 잘 삐치지요. 남 도와주는 거 엄청 좋아하지만 빼앗아 먹기도 잘하지요. 흥이 많아 춤추고 노는 걸 좋아하지만 싫어하기도 하지요. 요랬다 조랬다 삐쭉빼쭉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게 도깨비지요. 대체 누굴 닮아 그럴까요? 그야 도깨비 만든 사람을 닮았겠지요. 누가 만들었나요?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지요. 그러니 당연히 도깨비 돼먹은 모습이 우리 모습이지요.”(‘도깨비 수첩 3’)
 
 
그렇다. 타임머신을 택시처럼 타고 다니는 시대가 온다 한들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시인의 도깨비는 계속 출현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도깨비 돼먹은 모습이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두에게 끝없이 꿈과 사랑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 + ! = 도깨비방망이’라는 등식처럼, 그래야만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