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믿는 소년, 장생에게 눈이 번쩍 뜨이다!

모든 작가의 첫 책에는 작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그 이야기에 닿기까지 지나온 날들과 그가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때의 시간과 그 이야기 때문에 웃고 울었을 때의 떨림 같은 것들, 그러니까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기 전, 작가(이야기를 만드는 자)이면서 동시에 작가(타이틀)가 아닌 시간의 그림자 말이다.
이 책을 첫 책으로 들고 나타난, 이 책의 작가는 아마도 그 시간 동안 ‘이야기’의 열병을 앓았으리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전기수 소년들의 이야기다. 좀 더 길게 말하자면 ‘이야기’로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소년과 ‘이야기’를 타고난 소년, 그리고 ‘이야기’를 믿는 소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야기를 믿는 소년, 장생이었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소년의 욕망이 불나방처럼 스러질 것을 알기에 짠했고, 타고난 소년의 고민이 너무 반듯해서 아팠다면, 기꺼이 이야기를 믿는 그 아이, 장생의 확신과 넉살은 그 시절 잘나가는 전기수의 고급 스킬(?)이었다는 요전법만큼이나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장안 거지 패를 따라다녔고, 글도 읽을 줄 모르며, 같은 대목을 자꾸 읽어 달라고 떼를 쓰는, 그 아이 장생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전기수가 꼭 될랍니다. 제가 모시던 두목님께서 그랬어요. 옛날 어느 땐가 전기수 어른이 책을 읽어 주는데, 듣고 있던 사람이 소설에 나오는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죽자 분개해서 들고 있던 낫으로 전기수 어른을 죽인 일도 있었다고요. 전기수의 얘기가 얼마나 진짜 같았으면 그랬겠어요? 저는 책에서 밥도 나오고 돈도 나온다는 말을 진짜로 믿어요.”
같은 대목을 왜 자꾸 읽어달라고 하냐고 심통을 내는 소년에게 장생이 내놓은 답은 또 어떠한가?
 
“듣기만 해도 마음이 즐겁잖아. 어미 아비 만나니 좋고, 잔칫상 받으니 배불러 좋고.”
 
언뜻 보면 그저 순진하게만 느껴지는 장생의 확신에는 이야기에 대한 놀라운 진실이 담겨 있다. 이야기란 본디 우리 곁에 그렇게 남아 있었고, 우리는 이야기로 믿고, 이야기에 의해 움직여 왔으며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역사가 신화가 혁명이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었든가. 분야를 막론하고 ‘스토리텔링’에 사로잡힌 당대의 현실은 또 어떠한가? 스토리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아니 그리 거창하게 나아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니까.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혹은 믿는 대로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살아간다. 하여 우리는 점점 더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고 싶은지, 헷갈리는 오리무중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리고 나는 섣부르게 판단해 버렸다. 작가가 이야기에 대해 하려던 이야기는 바로 ‘장생이’라고. 그 아이가 어미처럼 살뜰히 스승과 동무를 보살피는 살림꾼인 것도, 징징대지 않고 넉살이 좋은 것도, 언제나 돌아올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고래로부터 이야기가 우리를 품어 왔듯이. 아,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해서, 장생이가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해서 기쁘고 즐거웠다. 이렇게 기특한 장생이를 데리고 나타난 작가에게 벌써부터 “두 번째 책은 무슨 이야긴가요?” 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여하튼 나는 장생이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기특한 소년을 잊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글 - 신여랑 (소설가, 『몽구스 크루』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