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

행복한 여행이었어요.
 
혼자 하는 여행도 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었어요. 부자이면서도 노력파인 자공, 가난해서 달동네에 살고 있는 헌원, 눈앞의 이익에 밝은 염유, 불같이 용맹한 자로, 얌전하고 겸손한 칠조개, 효성이 지극한 증삼, 모범생 안연 등이 있었고, 모든 일행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짱구’라는 별명의 선생님 공자가 동행이었어요. 성격도 다양하고 하는 일도 각기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여행을 하니 재미있는 일도 있었고, 황당한 일도 많이 겪게 되었죠. 또 많은 갈등과 다툼을 겪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선생님인 공자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여행에서 겪은 몇 가지 사건을 얘기해 드리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긴 여행 끝에 경비가 떨어지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서 일행은 며칠 내내 먹을 것을 구경하지 못했죠. 성격이 불같은 자로가 화가 나서 선생님께 대들었죠. “선생님, 군자도 먹을 것이 없을 만큼 궁핍할 수 있는 겁니까!”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군자는 짐짓 곤궁할 줄을 알지. 어리석은 소인들은 궁핍하게 되면 바로 넘친단다”라고 타일렀습니다. 자로는 제자들을 굶기는 선생님의 무능력(?)에 화난 것인데 선생님은 도리어 곤궁할 줄 아는 것을 군자라고 했죠. 선생님은 ‘가난한가, 부자인가’가 군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거였어요. 자로는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어올랐죠. 더 따지고 들었습니다. “군자는 용맹해야 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군자가 용맹하기만 하고 의롭지 못하면 사회가 어지럽게 될 것이고, 소인이 용맹하기만 하고 의롭지 못하면 도둑이 되고 말겠지. 그래서 용맹보다는 의가 먼저란다”라고 말하셨죠. 선생님은 자로의 불같은 성격이 언젠가는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틈만 나면 차분하게 자신을 수양할 것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로의 특성이 용맹함에 있음을 알아 여러 나라에 국방장관으로 추천하기도 했죠. 그런데 자로가 ‘위’나라의 장수가 되었을 때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아아, 자로가 죽겠구나!”하고 탄식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자로는 적의 칼에 몸을 베일 때 갓끈이 떨어지자 “군자는 죽어서도 의관을 바로 하는 법”이라며 갓끈을 매고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로는 여행 도중에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자로의 일에서 보듯이 선생님은 제자들의 성격과 품성 그리고 특징을 세심하게 살펴 주었어요. “착한 일을 잘 하기로는 안연과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지. 말 잘 하는 것으로는 재아와 자공이고, 정치에는 염유와 자로가 으뜸이지. 그리고 공부는 자유와 자하가 잘 하지”라는 식이었죠.
 
그런데 선생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는 모범생 안연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틈만 나면 안연을 칭찬해 주었어요. “그 녀석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지”, “안연은 참 어질도다. 맹물에 밥 말아 먹고, 지저분한 단칸방에 있어도 느긋하구나. 다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참지 못하는데 안연은 그 곳에서 즐기는구나”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안연은 31세의 나이로 선생님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요절한거죠. 선생님은 “아이고, 하늘이 날 버리고 마는구나!” 하시고는 제자들이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통곡을 했습니다. 노력파인 자공은 언제나 안연과 같이 되려고 애썼죠.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나 자공보다 안연을 더 뛰어나다고 평했습니다. 노력파인 자공 또한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나는 하나를 들으면 기껏 둘을 알 뿐이다”라며 스승의 판단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공은 더욱 노력하였고 선생님 또한 자공의 성취를 인정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제자들이 모여 선생님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삼 년이 되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자공은 움막을 새로 짓고 삼 년을 더 살고서야 내려왔습니다. 스승의 마지막을 끝까지 함께한 제자는 자공인 셈이 되죠.
 
선생님인 공자와 각기 다양한 특성과 재질을 지닌 제자들의 여행은 많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어요. 때로는 도둑에게 쫓겨 죽을 뻔하기도 하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무리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죠. 그러나 일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길’을 갔어요. 돌이켜 보면, 그들이 간 길은 2500년 전이라는 시간과 중국이라는 공간과 춘추전국이라는 시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간 길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죠.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가출’이겠죠. 이번 여행의 여정은 『논어』였고, 돌아온 곳은 저 자신이었어요. 거울이 있어야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대상이 없으면 자신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때가 묻어 있으면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겠죠. 거울이 맑아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논어』는 맑은 거울과 같습니다.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샛길로 빠졌는지를 알려 주는 경고등이고,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나침반과 같아요.
 
그런데 그 동안은 『논어』를 여행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우선 ‘말(한자)’이 통하지 않는 ‘낯설음’ 때문이고, 둘째는 더듬더듬 대화를 하거나 통역이 있다 해도 ‘속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배병삼 선생님이 쓰신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는 여러분의 여행에 가이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설음’을 떨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행의 핵심을 속속들이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죠.
 
이 여행은 멀리 떠날 필요 없습니다. 경비가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이 여행을 다녀온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은, 길라잡이(네비게이션)을 달고 운전하는 것과 눈을 감고 운전하는 것만큼의 차이가 나게 될 겁니다.
 
여행 한 번 다녀오시죠.
 
 
글·황광욱 (홍익대 사대 부속여고 윤리 교사)
1318북리뷰 2005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