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과 화해의 지혜를 말하는 칭기스칸

유럽 문명의 파괴자로 왜곡되어 온 칭기스칸. 최근 800년 간 잊혀졌던 칭기스칸의 진실이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유럽의 근대 문명의 탄생을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풀어 나가고 있는 이 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불까. 서울 배문고등학교 교사 김보일 선생님을 통해 꼼꼼히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편집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을 중심축으로 해서 우주가 돈다는 천동설적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는 오리엔탈리즘이 있었다. 서양을 중심축으로 해서 세계가 운행된다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중국은 항상 타자였고 변방이었다. 세계의 가운데[中]가 ‘중국’이라는 중화주의에도 오랑캐는 또 하나의 타자였고 변방이었던 셈이다. 세계사의 펜대를 쥔 자들에게 몽골과 한국, 베트남과 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인류학자이자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잭 웨더포드는 옛 몽골 제국의 영토를 15년 동안 현지답사한 내용과 19세기에 발견된 뒤 1982년 영어로 처음 번역된 몽골 왕가의 비밀 서책인 『몽골 비사』의 기록을 토대로 칭기스칸과 후손들의 일대기를 복원했다.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가 그것이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흥미진진한 역사소설로 읽히는 이 책은 칭기스칸에 대한 저간의 오해를 말끔하게 풀어준다.
 
호전적이고 잔인하다, 미개하고 야만적이다는 것이 칭기스칸과 몽골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그러나 책이 전하는 칭기스칸은 이런 기록들을 무색하게 한다. 몽골군은 적을 고문하거나, 신체를 절단하거나, 불구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는 1014년 불가리아인을 물리쳤을 때, 1만 5천 명의 불가리아인 전쟁포로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또 기독교 십자군은 1098년 안티오크,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몽골은 잔인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터무니없는 억측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라고 했던 계몽주의자 볼테르조차 이쪽은 문명이요, 저쪽은 야만이라는 유럽 중심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희곡 「중국의 고아」에서 칭기스칸을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라고 묘사했다. 그가 말하는 관용의 정신, 이른바 ‘똘레랑스’도 몽골에 와서는 온데간데없다. 이성의 빛으로 무지몽매함을 타파해야 한다는 계몽주의는 야만족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거는 제국주의와 짝이었음을 상기할 때,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눈에는 몽골은 계도되고 훈육되어야 할 야만스러운 타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문명을 교류시키고 융합시켰다. 오랜 세월 단절됐던 실크로드는 완벽히 복원되어 풍요로운 ‘자유무역지대’가 됐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유럽을 근세의 밝은 빛으로 이끌어 냈다. 몽매 속에 잠자던 유럽이 몽골의 말발굽 아래 깨어났던 것이다.
 
책이 말하는 칭기스칸은 보편주의자요 근대주의자였다. 혈연주의를 타파하고 사람을 능력과 재능에 의해 평가한 것을 책은 칭기스칸의 핵심적 업적으로 꼽는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칸의 독단이 아닌 합의와 절차에 따라 결정했다. 일종의 제국의회인 ‘코릴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국가의 중요 정책, 특히 지도자를 뽑는 것과 전쟁을 결정할 때는 몇 달이고 모여서 회의를 했다. 칭기스칸은 대내적으로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거의 균등한 분배체계를 갖추게 했다. 그를 점령한 부족민들을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최초로 국제법을 만들었으며, 법을 국가 지배의 원리로 삼았다. 칭기스칸은 특히 인치가 아닌 법치의 원리를 ‘대자사크’ (현재 알려진 몽골 최고[最古]의 성문법전)라는 법으로 명문화한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 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선거와 공립학교와 우편제도와 대포 등의 근대적인 문물도 몽골 제국 안에서 태어났다.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으며 중국 전통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는데 이는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는 책의 구절은 몽골인이 얼마나 실용성을 중시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실용성을 중시한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새로운 생산물을 사용하려면 지식체계 전체를 옮겨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몽골인은 의학지식의 교류를 장려하기 위해 중국의 병원이나 훈련기관에 중국 의사만이 아니라 인도와 중동의 의사도 고용했다.
 
속도를 중시했던 이 유목민족은 군사 장비를 경량화하고, 군대 식량의 무게를 줄였다. 당시 유럽 기사단의 갑옷과 무기의 무게는 70kg이지만 유목민들의 것은 7kg밖에 안 되었다. 가벼운 갑옷, 가벼운 화살 등 여러 신소재들을 개발했다. 소 한 마리를 말려 만든 육포는 양의 방광에 모두 들어가 병사 1명의 1년치 식량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기동성이 칭기스칸으로 하여금 불과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정복하게 했다.
 
역참제와 지폐의 보급은 속도와 실용성을 중시하는 유목민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다. 지폐는 당시에 사용되던 주화보다 월등하게 가벼워 이동에 변리했다. 이 지폐가 교역을 활성화한 것은 물론이다. 역참제는 지금으로 치면 정보 인프라이자 물류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역참의 형태는 촘촘한 거미줄 모양 그물을 연상하면 된다. 수도를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주요 도로에 40~50킬로미터마다 역참이 설치됐다. 일종의 말 정거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 5킬로미터마다 칸의 소식을 전달하는 파발이 살았다. 파발들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5킬로미터만 내달려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다른 파발에게 메시지를 건넸다.
 
칭기스칸의 제국 경영에서 가장 마음을 끄는 대목은 당시 몽골 제국이 혼혈 잡종 사회, 완벽하게 열린 사회였다는 점이다. 칭기스칸은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 등 수많은 이질적 민족과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불교의 원탁회의가 세계 최초로 열린 것도 몽골의 초원에서였다. 거기엔 어떤 차별도 없었다. 몽골은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으며, 외래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혹자들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인터넷, 디지털, 벤처, 세계 경영, 지구공동체, 연방제, 지방자치, 다국적기업 등의 개념들이 유목민족의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칭기스탄의 경제 정책은 오늘날 세계무역협약인 GATT의 원본이고 그의 통신수단인 역참제는 오늘날 세계를 하나로 잇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원형이었다는 것이다. 칭기스칸에 대한 지나친 신화화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자기방어적·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이 지점이다. 칭기스칸, 그를 본받아서 세계로 뻗어가자고 외치지 말고 그를 본받아 타자를 끌어안자고 말하는 상생과 화해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글 · 김보일 (배문고 국어 교사)
1318북리뷰 200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