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각, 최후의 20년 - 어느 중국 지식인의 운명
- 2897
• 지은이 : 육건동
• 옮긴이 : 박한제 김형종
• 가격 : 39,000원
• 책꼴/쪽수 :
223*152mm, 819쪽
• 펴낸날 : 2008-02-25
• ISBN : 9788958282747
• 십진분류 : 역사 > 전기 (990)
• 추천기관 :
한국출판인회의, 한국출판문화상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4월의 읽을 만한 책’, 한국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2008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분 대상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4월의 읽을 만한 책’, 한국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2008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분 대상
• 태그 : #역사 #중국사 #진인각 #중화인민공화국 #지식인
저자소개
지은이 : 육건동
陸鍵東. 1960년 중국 광동성 남해현에서 태어났다. 1986년 중산대학 중국어언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월극단에서 7년 동안 극작가로 일했다. 현재 광주시 문예창작연구소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주로 명청 시대 중국문화사 저술에 종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소극적인 전통(消極的傳統)』, 『100년의 사람과 일(百年的人和事)』 등이 있으며, 『진인각, 최후의 20년』으로 제2회 광주문예상을 받았다.
옮긴이 : 박한제 김형종
박한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 중세 호한 체제 연구』,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 기행』(전3권),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공저),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등이 있다.
김형종/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청말 신정기의 연구』,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옮긴 책으로는 『신중국사』(공역), 『중국현대사상사론』 등이 있다.
김형종/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청말 신정기의 연구』,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옮긴 책으로는 『신중국사』(공역), 『중국현대사상사론』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진인각, 최후의 20년에 이르기까지, 1890~1948
1890년 호남성 장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학·사학·철학을 공부한 그는 1907년 상해 복단공학에 입학했다. 1910년부터 구미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 등 아시아권 언어를 두루 섭렵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고문자를 연구했다. 1925년 양계초, 왕국유 등과 함께 북경 청화학교 국학연구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서남연합대학으로 옮겨갔다. 1939년 50세의 나이에 영국 왕립학회 연구원으로 초빙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국에 가지 못했다. 1945년 망막각리로 실명했다. 1949년 그는 대만행을 거부하고 대륙에 남아 영남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이 책은 이 시점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진인각, 대만행을 거부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대륙 장악이 임박해오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두 가지 중대한 작전을 전개한다. 그 하나는 대만으로 대륙의 문물을 대거 운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륙의 학자를 이송하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소형 비행기가 남경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에서 중국 학계의 ‘거물’ 호적이 내렸다. 호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시 국민당 문화를 주관하던 고급 관원들이 친히 비행장으로 나와 그를 영접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는 청화대학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경에 도착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호적)은 대만행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진인각)은 대륙에 남아 광주로 향했다.
진서경을 만나다
대륙에 남은 진인각은 영남대학 교장 진서경과 인연을 맺는다. 1950년대 초반, 진서경은 ‘한 손으로는 교수들을 붙잡는’ 프로젝트를 펼쳐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영남대학으로 초빙했다. 이 중에는 중국 방사선학계의 권위자 사지광, 중국 현대 수학의 창시자 강립부, 그리고 중국 중세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 진인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인각이 영남대학에 도착한 다음 날인 1월 20일, 영남대학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진인각 선생은 10여 개 나라의 문자에 능통하다. 서양의 한학자들도 진 선생에게 중국사를 배웠다. 그는 194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대단한 영예였다.…”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
1953년 10월, 역사연구위원회는 곽말약을 상고사연구소 소장으로, 진인각을 중고사연구소 소장으로, 그리고 범문란을 근대사연구소 소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역사연구위원회는 진인각의 제자였던 왕전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인각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왕전에게 자신이 중고사연구소 소장을 맡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연구소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한다. 둘째, 모공(毛公)과 유공(劉公)이 허락증명서를 내주어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진인각은 이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는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단지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只問學問 不問政治)”는 원칙을 견지하고자 했다.
“우파로 몰려 공격을 받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면서, 진인각은 우파로 몰려 핍박받게 된다. “진인각은 학과 내외에서 부르주아 전문가 측의 대표로서 대백기(大白旗, 우파의 우두머리)입니다. 학과의 당 총지부에서는 진인각의 영향력을 반드시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주먹으로 늙은 고집불통을 때리고 발로 가짜 권위자를 걷어차자”는 문구가 유행할 정도였다. 이후 진인각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크나큰 고초를 겪는다. 물론 ‘원로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진인각은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입었으며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던 많은 동료 지식인들을 잃는 아픔을 죽을 때까지 겪게 된다.
중국 역사학계의 대가, 진인각
진인각은 196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실명과 다리 골절 등 신체적 고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자유사상과 독립정신을 끝내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진인각은 중국 중세사 분야의 대가로서, 『수당제도 연원약론고』와 『당대 정치사술론고』 등을 저술했으며, 특히 『논재생연』, 『유여시별전』 등 그가 중국 문학 분야에서 남긴 탁월한 업적은 바로 ‘최후의 20년’에 집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제창한 ‘관롱집단설’은 현재까지도 역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 엄경망嚴耕望은 진인각을 전목錢穆, 진원陳垣, 여사면呂思勉과 함께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1890년 호남성 장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학·사학·철학을 공부한 그는 1907년 상해 복단공학에 입학했다. 1910년부터 구미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산스크리트어 등 아시아권 언어를 두루 섭렵하고,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고문자를 연구했다. 1925년 양계초, 왕국유 등과 함께 북경 청화학교 국학연구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서남연합대학으로 옮겨갔다. 1939년 50세의 나이에 영국 왕립학회 연구원으로 초빙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국에 가지 못했다. 1945년 망막각리로 실명했다. 1949년 그는 대만행을 거부하고 대륙에 남아 영남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이 책은 이 시점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진인각, 대만행을 거부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대륙 장악이 임박해오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두 가지 중대한 작전을 전개한다. 그 하나는 대만으로 대륙의 문물을 대거 운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륙의 학자를 이송하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소형 비행기가 남경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에서 중국 학계의 ‘거물’ 호적이 내렸다. 호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당시 국민당 문화를 주관하던 고급 관원들이 친히 비행장으로 나와 그를 영접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는 청화대학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경에 도착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호적)은 대만행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진인각)은 대륙에 남아 광주로 향했다.
진서경을 만나다
대륙에 남은 진인각은 영남대학 교장 진서경과 인연을 맺는다. 1950년대 초반, 진서경은 ‘한 손으로는 교수들을 붙잡는’ 프로젝트를 펼쳐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영남대학으로 초빙했다. 이 중에는 중국 방사선학계의 권위자 사지광, 중국 현대 수학의 창시자 강립부, 그리고 중국 중세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 진인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인각이 영남대학에 도착한 다음 날인 1월 20일, 영남대학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진인각 선생은 10여 개 나라의 문자에 능통하다. 서양의 한학자들도 진 선생에게 중국사를 배웠다. 그는 194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대단한 영예였다.…”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
1953년 10월, 역사연구위원회는 곽말약을 상고사연구소 소장으로, 진인각을 중고사연구소 소장으로, 그리고 범문란을 근대사연구소 소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역사연구위원회는 진인각의 제자였던 왕전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인각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진인각은 왕전에게 자신이 중고사연구소 소장을 맡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연구소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정치학습을 하지 않는 것을 허락한다. 둘째, 모공(毛公)과 유공(劉公)이 허락증명서를 내주어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진인각은 이처럼 실현 가능성이 없는 조건을 내세움으로써 “단지 학문을 물을 뿐 정치는 묻지 않는다(只問學問 不問政治)”는 원칙을 견지하고자 했다.
“우파로 몰려 공격을 받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면서, 진인각은 우파로 몰려 핍박받게 된다. “진인각은 학과 내외에서 부르주아 전문가 측의 대표로서 대백기(大白旗, 우파의 우두머리)입니다. 학과의 당 총지부에서는 진인각의 영향력을 반드시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주먹으로 늙은 고집불통을 때리고 발로 가짜 권위자를 걷어차자”는 문구가 유행할 정도였다. 이후 진인각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크나큰 고초를 겪는다. 물론 ‘원로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진인각은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입었으며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던 많은 동료 지식인들을 잃는 아픔을 죽을 때까지 겪게 된다.
중국 역사학계의 대가, 진인각
진인각은 1969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실명과 다리 골절 등 신체적 고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자유사상과 독립정신을 끝내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진인각은 중국 중세사 분야의 대가로서, 『수당제도 연원약론고』와 『당대 정치사술론고』 등을 저술했으며, 특히 『논재생연』, 『유여시별전』 등 그가 중국 문학 분야에서 남긴 탁월한 업적은 바로 ‘최후의 20년’에 집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제창한 ‘관롱집단설’은 현재까지도 역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 엄경망嚴耕望은 진인각을 전목錢穆, 진원陳垣, 여사면呂思勉과 함께 현대 중국의 4대 역사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머리말
서문 남쪽으로 옮겨가다
1장 침몰시기의 최후의 선택
2장 남쪽 땅의 온정과 생명의 침전
3장 만년 인생에서 첫 번째 생명력을 발산하다
4장 북경을 향해 문을 걸어 잠그다
5장 드디어 고난의 막이 오르다
6장 1956년, 흔하지 않은 봄날
7장 즐거움이 끝자락에 이르다
8장 폭풍 속의 고독한 학자
9장 지금 우리는 모두 되는대로 살고 있다
10장 흐느끼는 1958년
11장 환란의 여파
12장 구차하게 살아남다
13장 이 밤의 만남
14장 중국 학자의 비가
15장 한순간의 꿈과 같았던 시절
16장 만년의 '다리 골절'
17장 이 삶은 며칠 남지 않아
18장 만가는 이미 아득히 들리고
19장 기나긴 밤
20장 진인각의 죽음
21장 죽은 다음의 시비를 누가 상관하랴
22장 마지막 목소리
주/ 참고문헌/ 진인각 연보/ 진인각의 주요 저서/ 주요 인물 사건 저작 소개/ 찾아보기
머리말
서문 남쪽으로 옮겨가다
1장 침몰시기의 최후의 선택
2장 남쪽 땅의 온정과 생명의 침전
3장 만년 인생에서 첫 번째 생명력을 발산하다
4장 북경을 향해 문을 걸어 잠그다
5장 드디어 고난의 막이 오르다
6장 1956년, 흔하지 않은 봄날
7장 즐거움이 끝자락에 이르다
8장 폭풍 속의 고독한 학자
9장 지금 우리는 모두 되는대로 살고 있다
10장 흐느끼는 1958년
11장 환란의 여파
12장 구차하게 살아남다
13장 이 밤의 만남
14장 중국 학자의 비가
15장 한순간의 꿈과 같았던 시절
16장 만년의 '다리 골절'
17장 이 삶은 며칠 남지 않아
18장 만가는 이미 아득히 들리고
19장 기나긴 밤
20장 진인각의 죽음
21장 죽은 다음의 시비를 누가 상관하랴
22장 마지막 목소리
주/ 참고문헌/ 진인각 연보/ 진인각의 주요 저서/ 주요 인물 사건 저작 소개/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