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 2357
• 지은이 : 잭 웨더포드
• 옮긴이 : 정영목
• 가격 : 18,000원
• 책꼴/쪽수 :
223*152mm, 436쪽
• 펴낸날 : 2005-02-01
• ISBN : 9788958280781
• 십진분류 : 역사 > 아시아 (910)
• 태그 : #역사 #중앙아시아사 #몽골제국 #칭기스칸
저자소개
지은이 :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매칼래스터(Macalester) 대학 인류학과 교수이다. 지은 책으로는 Indian Givers, Native Roots, Savages and Civilization, The History of Money 등이 있다. 부족민 연구 전문가인 그는 중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과 세계 교역의 역사에서 부족민이 차지하는 역할을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8년 동안 몽골의 옛 중심지들을 답사했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궁전에 이르는 길을 따라다니며, 고고학적 발굴 현장과 도서관을 찾아보고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8년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했다. 그는 800년 동안 금지된 구역이었던 그곳에 대한 현지 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의 성장 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 칸의 전쟁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한 서평은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을 호머의 『일리아드』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 책의 집필을 마친 그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칭기스 칸은 몇몇 종교 지도자를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8년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을 방문했다. 그는 800년 동안 금지된 구역이었던 그곳에 대한 현지 답사를 통해, 그동안 풀지 못한 의문들을 풀 수 있었다. 칭기스 칸의 성장 기반이었던 곳은 예상 외로 초원이 아니라 숲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러한 환경은 칭기스 칸의 전쟁 전술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800년 전의 칭기스 칸을 좀더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계절을 바꾸어 그의 고향을 방문했으며, 칭기스 칸이 유목민 생활을 했음을 감안하여 그의 이동 경로를 추측해 ‘이동의 고고학’ 탐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 한 서평은 필자의 피와 땀이 담긴 이 책을 호머의 『일리아드』에 비견하기도 했다.
이 책의 집필을 마친 그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칭기스 칸은 몇몇 종교 지도자를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옮긴이 : 정영목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신의 가면: 서양신화』『마르크스 평전』『마하트마 간디』『서재 결혼 시키기』『파라오의 역사』『호치민』『트로이 전쟁』『술탄 살라딘』『하느님이 여자였던 시절』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몽골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펴고, 보편적인 알파벳을 고안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폐를 유통시키는 등 일관된 보편주의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이데올로기적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이를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보편적 문화와 세계 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공화국,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나침반 등 유럽이 만들었을 것이라 당연시했던 문명들이 사실은 몽골 제국의 창조물이었던 것이다.
편집자 추천글
1. 기획 의도
>> ‘근대 기획자’, 칭기스 칸
볼테르는 자신의 희곡 『중국의 고아』에서 칭기스 칸을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로 묘사했다. 반면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도 칭기스 칸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며 ‘아시아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이렇듯 서양과 동양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만 칭기스 칸을 ‘활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문화인류학자의 15년 현지답사와 몽골 왕가의 비밀 서책 『몽골 비사』를 통해, 그 누구도 몰랐던 칭기스 칸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어떻게 유럽을 오랜 잠에서 흔들어 깨웠고,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근대 세계체제를 형성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 있다.
>> 세계체제의 성립 시기를 앞당기다
이마뉴엘 월러스틴은 1974년에 내놓은 『근대세계체제』에서, 유럽지역의 봉건제 몰락과 자본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면서, 15~16세기에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남긴 족적을 살피지 않고 내놓은 성급한 결론일지 모른다. 저자 잭 웨더포드는 몽골 제국이 13세기에 이미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로 통합했고, 이를 통해 ‘근대세계체제’로 가는 길을 200년 먼저 뚫었다고 주장한다. 몽골 제국 아래 통합된 유라시아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 오리엔탈리즘, 이번엔 실증의 도마 위에 올리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의 ‘오리엔탈리즘’을 주창한 이래,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지적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책만 보더라도, J. J. 클라크의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 주겸지의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그리고 최근 출간된 존 M. 홉슨의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동양, 특히 중국이나 페르시아에 주목한 학자는 많았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낸 몽골 제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목한 연구자가 없었다. 서양중심주의자와 反오리엔탈리스트, 이 양측 모두가 몽골 제국의 역할을 왜곡, 은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 주요 내용
>>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몽골의 학자들
몽골 정부 내 서열 2위였던 티무르-오치르는 오논 강 옆 칭기스 칸 탄생지에 콘크리트 기념물을 세워도 좋다고 허락했고, 몽골 제국에 대한 학술대회도 후원했다. 몽골 공산당은 이를 반역죄로 규정하고, 그를 외딴곳으로 추방했으며, 끝내는 도끼로 찍어 죽였다. 고고학자 페를레는 몽골 제국사를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엄혹한 수감생활을 했고, 교사, 역사학자, 화가, 시인, 가수들 역시 칭기스 칸 시대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만 있으면 반당분자로 낙인찍혀 험한 꼴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몽골 학자들이 몽골 왕가의 비밀 서책『몽골 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칭기스 칸은 700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부활하기 시작했다. _ 본문 27~30쪽
>> 몽골 제국 대칸의 어린 시절
『몽골 비사』에 따르면,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들과 함께 부족에서 추방당해 쥐를 잡아먹으며 거의 짐승처럼 목숨을 연명한다. 심지어 대의를 위해 배다른 형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장차 성장하여 권좌에 오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칭기스 칸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뎌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_ 본문 59~73쪽
>> 초원의 오랜 관행을 깨다
칭기스 칸은 무엇보다도 전쟁 전술 운용에서 기존의 유목민 군주와 크게 달랐다. 이민족을 공격할 때 자신에게 항복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안전하게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수치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약탈과 분배 방식도 선진적이었다. 유목민족의 경우, 공격을 가하는 쪽이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을 추적하는 대신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채 바로 상대 진영을 약탈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 결과 패한 전사들 다수가 탈출하여 결국 반격을 하러 돌아왔다. 반면에 칭기스 칸은 항상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모든 물자를 중앙에서 통제하여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_ 본문 102~108쪽
>> 인간 칭기스 칸
몽골 제국을 건설한 칭기스 칸은 탕구트 원정의 최종 승리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죽었다. 칭기스 칸 사후에 그를 묘사한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의 여러 화가들이 칭기스 칸의 초상화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또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나는 소를 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을 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절제를 하고 있소.” 통치자로서의 칭기스 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칭기스 칸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_ 본문 200~203쪽
>> 몽골 제국과 근대 세계의 형성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몽골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펴고, 보편적인 알파벳을 고안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폐를 유통시키는 등 일관된 보편주의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이데올로기적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이를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보편적 문화와 세계 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공화국,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나침반 등 유럽이 만들었을 것이라 당연시했던 문명들이 사실은 몽골 제국의 창조물이었던 것이다. _ 본문 332~337쪽 3. 재미있는 대목들
>> 칭기스 칸과 세계사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 건너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의 문을 열자,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새로 흐르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다. 이런 이동에는 기념비적인 것도 있었고 사소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서구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옮겨놓았다. 중국에서 기독교 교회 건립, 페르시아에서 절과 탑 건립, 러시아에서 무슬림 쿠란 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_ 본문 20~21쪽
>> 일련의 가족법 개혁
칭기스 칸은 적자(嫡子) 문제를 둘러싼 분열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부인이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아이는 적자라고 선언했다. 같은 이유로 간통도 금지했다. 사실 몽골족은 간통을 다른 민족과 다르게 규정했다. 여기에는 여자와 남편의 가까운 친척들 사이의 성관계, 남자와 여자 하녀 또는 가족 내의 다른 남자의 부인 사이의 성관계는 포함되지 않았다. 게르의 일은 게르 내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초원의 일은 초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칭기스 칸의 언명에 따라, 간통은 서로 분리된 가구의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었다. 또 이 관계가 가족들 사이의 공개적인 갈등을 낳지 않는 한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_ 본문 126~127쪽
>> 명예는 승리에서 나온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을 쓰든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 싸우든 또는 어떻게 싸움을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묘한 기만책으로 이기든 잔인한 책략으로 이기든 이긴 것은 이긴 것이었으며 전사들의 용맹에는 아무런 오점도 남지 않았다. 전장에서 무용을 보여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전사에게 싸움은 지고 개인적인 명예는 얻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칭기스 칸이 말했다고 하듯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_ 154쪽
>> 유럽과 송나라를 동시에 겨누다
유럽 침공을 원하는 쪽과 송나라 공격을 선호하는 쪽으로 가족의 의견이 갈리자,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우구데이는 전례 없는 주목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사방으로 몽골군을 밀어낸다는 결정이었다. 즉 몽골군을 나누어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몽골군은 거리로는 8000킬로미터, 위도로는 100도가 넘는 땅으로 펼쳐지며 전투를 하게 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연합국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는 어떤 군대도 이루어낸 적이 없는 위업이었다. _ 219쪽
>>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종교 토론회
뭉케 칸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속하는 세 심판을 앉혀놓고 토론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 하나가 되어 불교의 교리를 논박하려 했다. 이 사람들은 몽골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평원에 세운 천막에서 각자의 예복을 입고 함께 모여 토론을 했다. 역사상 학자나 신학자들이 모여서 이런 토론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물며 다양한 무슬림이나 불교도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토론을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 학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사상으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들 뒤에 있는 통치자나 군대의 권위를 빌릴 수 없었다. 오로지 말과 논리만으로 자신의 사상의 설득력을 시험해야 했던 것이다. _ 본문 257쪽
>> 화폐제도의 개혁
쿠빌라이 칸은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뽕나무 껍질로 지폐를 만든다고 묘사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종이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몰랐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지폐의 첫 번째 장점은 당시 사용되던 주화에 비해 다루거나 운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제국 전역에서 지폐가 통용되었다고 기록했다. “지폐를 거부하려면 사형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폐를 무척 반겼다. 그것으로 진주, 보석, 금, 은을 포함하여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_ 297쪽
>> 유럽, 몽골 제국의 수혈을 받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 기술 혁신의 결과물은 유럽으로 속속 도입되었다. ……새로운 연장, 기계, 기계화된 장치는 배와 부두에서부터 창고와 운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더 빨리 더 잘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전에 몽골이 전쟁 기술을 발전시켜 전보다 개선된 대포와 화약으로 더 빠르게 파괴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_ 333~335쪽
>> 세계의 석학들이 말하는 칭기스 칸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업었다.” _ 제프리 초서
“왕 중 왕인 사나운 칭기스 칸, 그는 아시아의 비옥한 들판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의 예술, 우리의 관습, 우리의 법을 혐오하며, 따라서 그 모든 것을 바꾸려 하고, 이 화려한 제국이 있는 자리를 그들의 땅처럼 거대한 사막으로 만들려고 한다.” _ 볼테르
“물론 그들은 도시예술 같은 것은 잘 몰랐지만 자신들의 세계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이루어냈으며, 복잡한 조직을 만들었다.…… 규율과 조직, 그리고 무엇보다도 칭기스 칸의 뛰어난 지도력 때문에 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도 칭기스 칸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 _ 네루
“칭기스 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_ 에드워드 기번
“그들은 과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인은 열렬히 전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철학 원리를 습득하는 데 여가시간을 바쳤기 때문에 그렇게 앞서 나갈 수 있었다.” _ 로저 베이컨
>> ‘근대 기획자’, 칭기스 칸
볼테르는 자신의 희곡 『중국의 고아』에서 칭기스 칸을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로 묘사했다. 반면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도 칭기스 칸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며 ‘아시아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이렇듯 서양과 동양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만 칭기스 칸을 ‘활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문화인류학자의 15년 현지답사와 몽골 왕가의 비밀 서책 『몽골 비사』를 통해, 그 누구도 몰랐던 칭기스 칸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칭기스 칸이 어떻게 유럽을 오랜 잠에서 흔들어 깨웠고,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근대 세계체제를 형성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 있다.
>> 세계체제의 성립 시기를 앞당기다
이마뉴엘 월러스틴은 1974년에 내놓은 『근대세계체제』에서, 유럽지역의 봉건제 몰락과 자본주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면서, 15~16세기에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남긴 족적을 살피지 않고 내놓은 성급한 결론일지 모른다. 저자 잭 웨더포드는 몽골 제국이 13세기에 이미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로 통합했고, 이를 통해 ‘근대세계체제’로 가는 길을 200년 먼저 뚫었다고 주장한다. 몽골 제국 아래 통합된 유라시아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 오리엔탈리즘, 이번엔 실증의 도마 위에 올리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의 ‘오리엔탈리즘’을 주창한 이래, 서양중심주의에 대한 지적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책만 보더라도, J. J. 클라크의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 주겸지의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그리고 최근 출간된 존 M. 홉슨의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동양, 특히 중국이나 페르시아에 주목한 학자는 많았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낸 몽골 제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목한 연구자가 없었다. 서양중심주의자와 反오리엔탈리스트, 이 양측 모두가 몽골 제국의 역할을 왜곡, 은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 주요 내용
>>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몽골의 학자들
몽골 정부 내 서열 2위였던 티무르-오치르는 오논 강 옆 칭기스 칸 탄생지에 콘크리트 기념물을 세워도 좋다고 허락했고, 몽골 제국에 대한 학술대회도 후원했다. 몽골 공산당은 이를 반역죄로 규정하고, 그를 외딴곳으로 추방했으며, 끝내는 도끼로 찍어 죽였다. 고고학자 페를레는 몽골 제국사를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엄혹한 수감생활을 했고, 교사, 역사학자, 화가, 시인, 가수들 역시 칭기스 칸 시대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만 있으면 반당분자로 낙인찍혀 험한 꼴을 당했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몽골 학자들이 몽골 왕가의 비밀 서책『몽골 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칭기스 칸은 700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부활하기 시작했다. _ 본문 27~30쪽
>> 몽골 제국 대칸의 어린 시절
『몽골 비사』에 따르면, 칭기스 칸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들과 함께 부족에서 추방당해 쥐를 잡아먹으며 거의 짐승처럼 목숨을 연명한다. 심지어 대의를 위해 배다른 형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장차 성장하여 권좌에 오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칭기스 칸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뎌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_ 본문 59~73쪽
>> 초원의 오랜 관행을 깨다
칭기스 칸은 무엇보다도 전쟁 전술 운용에서 기존의 유목민 군주와 크게 달랐다. 이민족을 공격할 때 자신에게 항복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안전하게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수치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약탈과 분배 방식도 선진적이었다. 유목민족의 경우, 공격을 가하는 쪽이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을 추적하는 대신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채 바로 상대 진영을 약탈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 결과 패한 전사들 다수가 탈출하여 결국 반격을 하러 돌아왔다. 반면에 칭기스 칸은 항상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모든 물자를 중앙에서 통제하여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_ 본문 102~108쪽
>> 인간 칭기스 칸
몽골 제국을 건설한 칭기스 칸은 탕구트 원정의 최종 승리를 불과 며칠 남겨놓고 죽었다. 칭기스 칸 사후에 그를 묘사한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의 여러 화가들이 칭기스 칸의 초상화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또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소.…… 나는 소를 치는 목동이나 말을 모는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소. 우리는 똑같이 희생을 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절제를 하고 있소.” 통치자로서의 칭기스 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칭기스 칸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_ 본문 200~203쪽
>> 몽골 제국과 근대 세계의 형성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이룩한 몽골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펴고, 보편적인 알파벳을 고안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지폐를 유통시키는 등 일관된 보편주의를 보여주었다. 몽골은 이데올로기적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고, 이를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보편적 문화와 세계 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공화국, 선거, 공립학교, 우편제도, 대포, 주판, 나침반 등 유럽이 만들었을 것이라 당연시했던 문명들이 사실은 몽골 제국의 창조물이었던 것이다. _ 본문 332~337쪽 3. 재미있는 대목들
>> 칭기스 칸과 세계사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군대와 물자를 더 빠르게 이동시키려면 내와 강을 수백 개 건너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몽골이 세계의 문을 열자, 물자만이 아니라 사상과 지식도 새로 흐르기 시작했다. 몽골인은 독일의 광부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고, 중국 의사들을 페르시아에 데려갔다. 이런 이동에는 기념비적인 것도 있었고 사소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양탄자를 퍼뜨렸고, 레몬과 당근을 페르시아에서 중국에 이식했으며, 국수, 카드, 차를 중국에서 서구로 가져갔다. 그들은 파리의 금속세공 장인을 데려와 몽골의 건조한 초원지대에 분수를 만들게 했고, 영국의 귀족을 데려와 군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했으며, 지문을 찍는 중국의 관행을 페르시아에도 옮겨놓았다. 중국에서 기독교 교회 건립, 페르시아에서 절과 탑 건립, 러시아에서 무슬림 쿠란 학교 건립을 위한 자금을 댔다. 몽골인은 정복자로서 지구를 휩쓸었지만, 문화의 전달자 역할에서도 달리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_ 본문 20~21쪽
>> 일련의 가족법 개혁
칭기스 칸은 적자(嫡子) 문제를 둘러싼 분열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부인이 낳았건 첩이 낳았건 모든 아이는 적자라고 선언했다. 같은 이유로 간통도 금지했다. 사실 몽골족은 간통을 다른 민족과 다르게 규정했다. 여기에는 여자와 남편의 가까운 친척들 사이의 성관계, 남자와 여자 하녀 또는 가족 내의 다른 남자의 부인 사이의 성관계는 포함되지 않았다. 게르의 일은 게르 내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초원의 일은 초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칭기스 칸의 언명에 따라, 간통은 서로 분리된 가구의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었다. 또 이 관계가 가족들 사이의 공개적인 갈등을 낳지 않는 한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_ 본문 126~127쪽
>> 명예는 승리에서 나온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그들의 모든 원정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완전한 승리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전술을 쓰든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 싸우든 또는 어떻게 싸움을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교묘한 기만책으로 이기든 잔인한 책략으로 이기든 이긴 것은 이긴 것이었으며 전사들의 용맹에는 아무런 오점도 남지 않았다. 전장에서 무용을 보여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전사에게 싸움은 지고 개인적인 명예는 얻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칭기스 칸이 말했다고 하듯이, 끝장을 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_ 154쪽
>> 유럽과 송나라를 동시에 겨누다
유럽 침공을 원하는 쪽과 송나라 공격을 선호하는 쪽으로 가족의 의견이 갈리자,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우구데이는 전례 없는 주목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사방으로 몽골군을 밀어낸다는 결정이었다. 즉 몽골군을 나누어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몽골군은 거리로는 8000킬로미터, 위도로는 100도가 넘는 땅으로 펼쳐지며 전투를 하게 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연합국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는 어떤 군대도 이루어낸 적이 없는 위업이었다. _ 219쪽
>>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종교 토론회
뭉케 칸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속하는 세 심판을 앉혀놓고 토론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 하나가 되어 불교의 교리를 논박하려 했다. 이 사람들은 몽골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평원에 세운 천막에서 각자의 예복을 입고 함께 모여 토론을 했다. 역사상 학자나 신학자들이 모여서 이런 토론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물며 다양한 무슬림이나 불교도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토론을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 학자들은 자신의 신앙과 사상으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들 뒤에 있는 통치자나 군대의 권위를 빌릴 수 없었다. 오로지 말과 논리만으로 자신의 사상의 설득력을 시험해야 했던 것이다. _ 본문 257쪽
>> 화폐제도의 개혁
쿠빌라이 칸은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뽕나무 껍질로 지폐를 만든다고 묘사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종이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몰랐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지폐의 첫 번째 장점은 당시 사용되던 주화에 비해 다루거나 운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제국 전역에서 지폐가 통용되었다고 기록했다. “지폐를 거부하려면 사형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폐를 무척 반겼다. 그것으로 진주, 보석, 금, 은을 포함하여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_ 297쪽
>> 유럽, 몽골 제국의 수혈을 받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 기술 혁신의 결과물은 유럽으로 속속 도입되었다. ……새로운 연장, 기계, 기계화된 장치는 배와 부두에서부터 창고와 운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더 빨리 더 잘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전에 몽골이 전쟁 기술을 발전시켜 전보다 개선된 대포와 화약으로 더 빠르게 파괴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_ 333~335쪽
>> 세계의 석학들이 말하는 칭기스 칸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업었다.” _ 제프리 초서
“왕 중 왕인 사나운 칭기스 칸, 그는 아시아의 비옥한 들판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의 예술, 우리의 관습, 우리의 법을 혐오하며, 따라서 그 모든 것을 바꾸려 하고, 이 화려한 제국이 있는 자리를 그들의 땅처럼 거대한 사막으로 만들려고 한다.” _ 볼테르
“물론 그들은 도시예술 같은 것은 잘 몰랐지만 자신들의 세계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이루어냈으며, 복잡한 조직을 만들었다.…… 규율과 조직, 그리고 무엇보다도 칭기스 칸의 뛰어난 지도력 때문에 전장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도 칭기스 칸 앞에서는 작아 보인다.” _ 네루
“칭기스 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_ 에드워드 기번
“그들은 과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인은 열렬히 전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철학 원리를 습득하는 데 여가시간을 바쳤기 때문에 그렇게 앞서 나갈 수 있었다.” _ 로저 베이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