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 평전
- 1408
• 지은이 : 강영주
• 가격 : 18,000원
• 책꼴/쪽수 :
223*152mm, 296쪽
• 펴낸날 : 2004-10-25
• ISBN : 9788958280415
• 십진분류 : 역사 > 전기 (990)
• 추천기관 :
문화체육관광부
2005년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 학술도서 선정
2005년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 학술도서 선정
• 태그 : #문학 #문학이론 #평전 #임꺽정 #홍명희
저자소개
지은이 : 강영주
195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3년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 유학하여 비교문학?독문학?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인 1982년부터 현재까지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역사소설의 재인식』, 『벽초 홍명희 연구』, 『벽초 홍명희 평전』, 『그들의 문학과 생애, 홍명희』가 있으며, 편저(공편)로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재조명』, 『벽초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가 있다. 논문으로는 「국학자 홍기문 연구」1~4, 「홍기문의 학문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역사소설의 재인식』, 『벽초 홍명희 연구』, 『벽초 홍명희 평전』, 『그들의 문학과 생애, 홍명희』가 있으며, 편저(공편)로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재조명』, 『벽초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가 있다. 논문으로는 「국학자 홍기문 연구」1~4, 「홍기문의 학문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임꺽정』이 일제시대 때 태어나 지금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자 홍명희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상명대 교수 강영주는 1920~30년대 역사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임꺽정』을 연구하다가 그 저자인 홍명희에게 연구 영역을 확대하여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공편, 1996)와 『벽초 홍명희 연구』(1999) 등 저술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홍명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의 20년 연구 성과를 총결산하여 『벽초 홍명희 평전』을 내놓았다.
편집자 추천글
1. 기획 의도
- 최초의 홍명희 평전
한국 민족문학의 최고봉 『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벽초 홍명희. 그러나 해방 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간 홍명희의 삶은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이제 전문 연구가의 시선으로 벽초 홍명희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 복원한다.
- 봉건사회를 몸소 체험한 근대 작가 홍명희
한국 근대 작가들 가운데 양반 출신은 극히 드물며 특히 왕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의 작가는 홍명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28~40년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에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유례가 드물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출신과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처럼 홍명희의 생애를 복원함으로써,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임꺽정』의 또 다른 매력과 탁월한 점을 발굴하고자 했다.
- ‘홍명희 전문가’의 20년 외길 연구
『임꺽정』이 일제시대 때 태어나 지금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자 홍명희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상명대 교수 강영주는 1920~30년대 역사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임꺽정』을 연구하다가 그 저자인 홍명희에게 연구 영역을 확대하여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공편, 1996)와 『벽초 홍명희 연구』(1999) 등 저술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홍명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의 20년 연구 성과를 총결산하여 『벽초 홍명희 평전』을 내놓았다.
2. 주요 내용
- 명문가에서 태어난 벽초 홍명희
벽초 홍명희는 혜경궁 홍씨가 태어난 풍산 홍씨 추만공파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부친은 경술국치 때 비분 끝에 자결한 인물로 유명한 홍범식이다. 홍명희는 유년기에 한학 수업을 받을 때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열한 살 무렵에는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읽기 시작해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후일 신교육을 받고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독서를 계속하여 근대문학과 신사상에 정통하게 됨으로써 어릴 때 받은 한학 교육과 함께 민족 주체적 입장에서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바람직하게 통합한 지식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 신문물과 근대사상과의 만남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인 학교가 활발히 설립되던 무렵 홍명희는 중교의숙 일어과에 입학해 초보적인 수준의 근대학문을 배운다. 일본 다이세이 중학 유학시절에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만조보(萬朝報)』에 한인수재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삼재’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일본 유학은 또한 홍명희에게 여러 면에서 새로운 체험과 지식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가 『대한흥학보』에 기고한 글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특히 「일괴열혈」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 앞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은 ‘지방열’, 즉 지역감정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는 것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 독립운동의 모색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부친 홍범식이 자결한다. 부친의 순국 이후 한동안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내던 홍명희는 1912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한다. 이 시절 홍명희는 새로운 서양 문물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가로서나 문학인으로서 내면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해외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홍명희는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검거되어 1년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다양한 사회활동에 전념한 그는 1926년 말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하여 ‘참다운 민족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간회운동’을 전개하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다.
- 해방 후의 활동
일제 말 홍명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하기 위해 창작을 포함한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에 들어간다. 1945년 드디어 고대하던 해방을 맞은 후 홍명희는 정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투신한다. 하지만 신탁통치 파동 중에 좌, 우익 양측에서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좌, 우익 양측 모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중간파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중간파 정당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문맹 타파, 과학사상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같은 정책을 내세운 계몽적 성격이 강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당 결성 이후 중간파 정치세력은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한 방도로서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의 회합을 구상하고 추진하기에 이르는데,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된다. 그리고 홍명희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측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 길에 오르게 되며 이때 남북연석회의 이후 북에 잔류하게 된다. 북에 남은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팔순의 나이로 북에서 사망할 때까지 고위직에 남아 있었다. 그는 현재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부인 민순영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3. 홍명희와 『임꺽정』
- 장장 13년에 걸친 신문 연재
홍명희가 역사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신간회운동으로 분주하던 1928년 11월 21일부터였다. 그후 『임꺽정』은 몇 차례 연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40년까지 장장 13년간이나 연재가 계속된다. 야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사, 특히 조선의 민중사에 대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계몽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었다. 한국 근대 작가들 가운데 양반 출신은 극히 드물며 특히 왕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의 작가는 홍명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28~40년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에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유례가 드물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출신과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상의 유명 인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역사소설이 지배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궁중비화나 권력투쟁을 다룸으로써 통속적인 흥미를 자아내려는 작품이 대다수였는데, 천민인 백정 신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에서 식민지시기 역사소설 중 극히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주인공을 선택한 데에는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 보는 홍명희의 진보적인 역사관과 역사소설은 궁중비화를 배격하고 민중의 사회사를 지향해야 한다는 그의 진보적 역사소설관이 작용한 것이다.
- 영원히 기억될 스테디셀러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첫 연재가 중단된 이후 신병 등의 이후로 여러 차례 연재가 중단되었던 『임꺽정』은 1939년 10월 조선일보사에서 전8권 예정으로 제1권이 출간된다. 당시 조선일보사에서는 유례가 드물 정도로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펼치기도 했는데, 대하 장편소설의 붐과 대규모 광고에 의한 베스트셀러 만들기의 선례를 반세기 전에 보여준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홍명희는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임꺽정』 재판을 출간함으로서 독서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으며, 특히 해방 후 세대에게 문호로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후 『임꺽정』은 작가의 정치적 행적 때문에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됨으로써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 최초의 홍명희 평전
한국 민족문학의 최고봉 『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벽초 홍명희. 그러나 해방 이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인간 홍명희의 삶은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이제 전문 연구가의 시선으로 벽초 홍명희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 복원한다.
- 봉건사회를 몸소 체험한 근대 작가 홍명희
한국 근대 작가들 가운데 양반 출신은 극히 드물며 특히 왕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의 작가는 홍명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28~40년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에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유례가 드물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출신과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처럼 홍명희의 생애를 복원함으로써,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임꺽정』의 또 다른 매력과 탁월한 점을 발굴하고자 했다.
- ‘홍명희 전문가’의 20년 외길 연구
『임꺽정』이 일제시대 때 태어나 지금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자 홍명희의 존재는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상명대 교수 강영주는 1920~30년대 역사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임꺽정』을 연구하다가 그 저자인 홍명희에게 연구 영역을 확대하여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공편, 1996)와 『벽초 홍명희 연구』(1999) 등 저술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홍명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의 20년 연구 성과를 총결산하여 『벽초 홍명희 평전』을 내놓았다.
2. 주요 내용
- 명문가에서 태어난 벽초 홍명희
벽초 홍명희는 혜경궁 홍씨가 태어난 풍산 홍씨 추만공파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부친은 경술국치 때 비분 끝에 자결한 인물로 유명한 홍범식이다. 홍명희는 유년기에 한학 수업을 받을 때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열한 살 무렵에는 중국의 고전 소설들을 읽기 시작해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후일 신교육을 받고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독서를 계속하여 근대문학과 신사상에 정통하게 됨으로써 어릴 때 받은 한학 교육과 함께 민족 주체적 입장에서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을 바람직하게 통합한 지식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 신문물과 근대사상과의 만남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인 학교가 활발히 설립되던 무렵 홍명희는 중교의숙 일어과에 입학해 초보적인 수준의 근대학문을 배운다. 일본 다이세이 중학 유학시절에는 학업 성적이 우수해 『만조보(萬朝報)』에 한인수재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삼재’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일본 유학은 또한 홍명희에게 여러 면에서 새로운 체험과 지식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의식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가 『대한흥학보』에 기고한 글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특히 「일괴열혈」이라는 시에서는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 앞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은 ‘지방열’, 즉 지역감정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분열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는 것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 독립운동의 모색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부친 홍범식이 자결한다. 부친의 순국 이후 한동안 은둔하다시피 하며 지내던 홍명희는 1912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한다. 이 시절 홍명희는 새로운 서양 문물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가로서나 문학인으로서 내면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해외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홍명희는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검거되어 1년 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다양한 사회활동에 전념한 그는 1926년 말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하여 ‘참다운 민족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신간회운동’을 전개하다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다.
- 해방 후의 활동
일제 말 홍명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하기 위해 창작을 포함한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에 들어간다. 1945년 드디어 고대하던 해방을 맞은 후 홍명희는 정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투신한다. 하지만 신탁통치 파동 중에 좌, 우익 양측에서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좌, 우익 양측 모두와 분명한 선을 긋고 중간파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중간파 정당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문맹 타파, 과학사상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같은 정책을 내세운 계몽적 성격이 강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당 결성 이후 중간파 정치세력은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한 방도로서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의 회합을 구상하고 추진하기에 이르는데,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된다. 그리고 홍명희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측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 길에 오르게 되며 이때 남북연석회의 이후 북에 잔류하게 된다. 북에 남은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팔순의 나이로 북에서 사망할 때까지 고위직에 남아 있었다. 그는 현재 평양 교외 애국열사릉에 부인 민순영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3. 홍명희와 『임꺽정』
- 장장 13년에 걸친 신문 연재
홍명희가 역사소설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신간회운동으로 분주하던 1928년 11월 21일부터였다. 그후 『임꺽정』은 몇 차례 연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40년까지 장장 13년간이나 연재가 계속된다. 야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사, 특히 조선의 민중사에 대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계몽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었다. 한국 근대 작가들 가운데 양반 출신은 극히 드물며 특히 왕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의 작가는 홍명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28~40년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에서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속과 일상생활을 유례가 드물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출신과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역사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상의 유명 인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역사소설이 지배층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궁중비화나 권력투쟁을 다룸으로써 통속적인 흥미를 자아내려는 작품이 대다수였는데, 천민인 백정 신분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에서 식민지시기 역사소설 중 극히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주인공을 선택한 데에는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 보는 홍명희의 진보적인 역사관과 역사소설은 궁중비화를 배격하고 민중의 사회사를 지향해야 한다는 그의 진보적 역사소설관이 작용한 것이다.
- 영원히 기억될 스테디셀러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첫 연재가 중단된 이후 신병 등의 이후로 여러 차례 연재가 중단되었던 『임꺽정』은 1939년 10월 조선일보사에서 전8권 예정으로 제1권이 출간된다. 당시 조선일보사에서는 유례가 드물 정도로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펼치기도 했는데, 대하 장편소설의 붐과 대규모 광고에 의한 베스트셀러 만들기의 선례를 반세기 전에 보여준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홍명희는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임꺽정』 재판을 출간함으로서 독서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으며, 특히 해방 후 세대에게 문호로서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후 『임꺽정』은 작가의 정치적 행적 때문에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됨으로써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