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 민중의 흙에서 핀 연꽃 (오늘의 고전을 읽는다 3)
- 1760
• 지은이 : 정승석
• 가격 : 12,000원
• 책꼴/쪽수 :
212*140mm, 234쪽
• 펴낸날 : 2004-03-29
• ISBN : 9788958280088
• 십진분류 : 종교 > 불교 (220)
• 태그 : #고전 #법화경 #민중 #불교 #동아시아
저자소개
지은이 : 정승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 저서로 "인도의 이원론과 불교", "윤회의 자아와 무아", "번뇌·업·고통" 등이 있고, 역서로는 "불교철학의 정수", "딴뜨라 불교 입문", "유식의 구조"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 한국 민중의 역사를 밝혀줄 텍스트
법화경은 그저 여러 불교 경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가? 이 경전은 수많은 불교 경전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민중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려왔다. 따라서 법화경은 단순한 불교 경전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심성사를 복원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료이자 우리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법화경을 한국 사상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 제대로 복원시킬 때이다.
-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새 지평
서기 1세기 무렵 인도 서북부에서 태어나 구마라습이라는 전대미문의 번역자를 통해 중국 대륙을 휩쓸고, 급기야 한국과 일본의 민중들을 사로잡아 동아시아에 법화 신앙으로 거듭나기까지, 2천 년 ‘법화경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추적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지평을 더욱 넓힌다.
- 과연 정치 이데올로기인가?
중국 수나라는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고 고려는 창업의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중의 심성에 잘 부합하는 법화경을 널리 유포하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불가사의한 법인 법화경에 귀의합니다’라고 읊게 해서 민중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법화경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과연 민중 지배를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였나?
법화경은 그저 여러 불교 경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가? 이 경전은 수많은 불교 경전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민중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려왔다. 따라서 법화경은 단순한 불교 경전이 아니라, 한국 민중의 심성사를 복원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료이자 우리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법화경을 한국 사상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 제대로 복원시킬 때이다.
-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새 지평
서기 1세기 무렵 인도 서북부에서 태어나 구마라습이라는 전대미문의 번역자를 통해 중국 대륙을 휩쓸고, 급기야 한국과 일본의 민중들을 사로잡아 동아시아에 법화 신앙으로 거듭나기까지, 2천 년 ‘법화경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추적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 문명 교류사의 지평을 더욱 넓힌다.
- 과연 정치 이데올로기인가?
중국 수나라는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고 고려는 창업의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민중의 심성에 잘 부합하는 법화경을 널리 유포하고자 했다. 일본에서는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불가사의한 법인 법화경에 귀의합니다’라고 읊게 해서 민중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법화경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과연 민중 지배를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였나?
편집자 추천글
1. 기획 의도
법화경은 신라인과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도입하고 발전시킨 이래 한국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의 와중에서도 법화경은 민중들의 입을 통해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역사적 영향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늘날에도 법화경을 주요 경전으로 삼는 종파가 많다. 그러나 국내에는 정작 법화경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저서가 별로 없다. 법화경 원전의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 연구서의 번역물이거나 일반 독자보다는 불교 신자들을 염두에 둔 개설서이다. 법화경의 범어 원전이 다양한 사본으로 현존한다는 사실과 국외의 다각적이고 방대한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법화경이 여전히 과거의 전설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 법화경이 대승 불교의 역동성을 대변했던 만큼, 법화경은 정(靜)의 불교를 동(動)의 불교로 일신하는 데 공헌했다. 따라서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명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길을 법화경의 정신에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법화경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경전의 하나로만 각인되어온 법화경을 한국 사상사와 민중사,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사라는 더 큰 틀에서 재해석하고, 그 현대적 변용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이 책의 특징
- 법화경 탄생의 속사정
최초의 불교는 일정 정도의 부를 지닌 계층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경전에 대한 지적 이해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연히 당시 인도 민중들의 삶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처가 열반한 후 성체(聖體)를 봉안한 탑이 여러 곳에 세워지자 민중들이 그 탑을 신봉하기 시작했고, 집에서 불교를 믿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오면서 기존의 종단을 넘어서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자연히 보수 세력으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순교와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들도 시간에 지나면서 기존 종단이 세속화, 보수화 경향을 답습한다. 이런 현상에 반발하여 기원전 1세기 인도 서북부에서 진보적인 보살단(菩薩團)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법화경을 성립시킨 장본인들이다.
- 동아시아 전파의 역사적 맥락
서기 406년 중국어로 전해진 법화경은, ‘법화8유(法華八喩)’라는 여덟 가지 비유와 법화경을 읊기만 하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설법을 바탕으로 중국 민중 속으로 넓고 깊숙이 침투했다. 이러한 법화경의 특징은 전도자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했다. 중국 천태종을 개창한 지의대사는 법화경을 통해 강한 호국의식과 중생 구제의 염원을 관철시키고자 수나라 양제에게 유서를 남겼다. 이러한 사회의식은 법화경을 받아들인 이후의 한국과 일본에서도 엿보인다. 고려가 개국할 무렵 일부 승려들은 태조 왕건에게 법화경을 통해 삼국의 통일을 더욱 확고히 하고 왕실을 번영케 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고, 대각국사 의천은 국가 이익과 민생 복리를 위해 주전론(鑄錢論)을 주창하여 화폐 경제의 문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일련이 『입정안국론』을 저술하여 법화경에 의한 위정자의 의식 변화와 국가 전체의 개혁을 주창하기도 했다.
- 법화경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법화경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중국에 거주하던 신라 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지성적인 태도로 세미나를 벌이며 법화경을 신봉했다. 그러나 세속의 민중들은 그와 반대로 법화경에 관한 온갖 영험한 이야기를 통해 법화경을 흡수했다. 이처럼 법화경을 둘러싸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공존했다. 상부 구조는 법화경 사상에 심취하여 이것을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신봉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다. 반면 하부 구조는 법화경 자체나 상부구조의 지도를 거의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다수의 집단이다. 이들이 심취한 것은 독실한 신심으로 소원을 성취하려는 기복 신앙이며, 이들을 유인하는 것은 법화경의 기복적 요소이다. 따라서 법화경 문화의 양태를 결정한 것도 그 양부 구조이다. 상부구조는 천태종을 대표로 하는 법화경 종파의 흥기로 결실을 맺고, 하부 구조는 관음 신앙을 대표로 하는 기복적 양상이 종교 활동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조선이 성립한 후 천태종이 선종에 통폐합되면서, 법화경 문화의 상부 구조는 거의 해체되고 하부 구조만 남게 되었다.
- 법화경은 동아시아의 성경?
법화경의 산스크리트 원전을 최초로 영역한 유럽의 학자는 『바가바드 기타』가 법화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바그바드 기타』는 유일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성실한 믿음을 다른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일부 학자들은 이 고전이 기독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화경에 기독교적 요소가 스며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법화경에는 부처의 생애를 묘사하고 무궁한 자비심을 실천하는 구제자로서의 부처를 부각시키는 부분이 제법 등장한다. 마치 성경에 예수의 행적이 상세히 묘사되듯이 말이다. 법화경은 어쩌면,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관계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3. 흥미로운 부분
- 석가탑과 다보탑이 같이 있는 까닭은?
법화경 견보탑품에는 이불병좌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과거의 부처와 현재의 부처가 같이 존재한다는 뜻으로서 곧 부처의 영원성을 설파한다. 중국의 가람양식을 본받은 우리 사찰은 대웅전 앞에 탑을 두 개씩 조성하였는데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도 그런 경우다. 현재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를 통일하는 최고의 부처가 석가탑에 있으며 과거에 입멸한 부처는 다보탑에 있다. 이 두 탑이 같이 있다는 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부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영원한 존재라는 법화경의 독특한 생명신앙을 말해주는 것이다.(본문 83쪽 참조)
- 손오공이 삼장법사에게 꼼짝 못한 이유는?
법화경은 민중들에게 온갖 곤경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불, 물, 바람, 칼, 귀신, 형벌, 도둑에 의한 곤경을 피할 수 있다. 또 생노병사의 모든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며 바라는 대로 아이도 얻을 수 있다. 한 마디로 관세음보살에 의지하면 자연재해나 인생만사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서유기의 현장법사가 서역을 통과할 때 손오공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방법으로 염불을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본문 60쪽, 122쪽 참고)
- “목숨도 필요없다. 가르침만이 모든 것이다.”
법화경 원전이 성립하는 배경이 되는 것 중 하나로 특수한 신앙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굳건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들의 집요함을 참을 수 없었던 기존 불교는 이들의 행태를 비난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법난이라고 규탄하며 더욱 결속을 다졌다. 이 사람들이 법화경의 초기 형태를 작성하였는데 기존 불교의 압력에 대해 “목숨도 필요없다. 가르침만이 모든 것이다.”라며 그들의 뜻을 굽히지 않는 광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본문 77쪽 참조)
- 천재 번역가를 데려오기 위한 전쟁
중국이 인도에서 불교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번역자가 필요했다. 전진(前秦)은 쿠차국의 젊은 승려였던 구마라습을 데려오기 위해 정벌전쟁을 감행한다. 16년 간 중국에 억류되어 있던 구마라습은 그동안 한문을 익혀 본격적인 불경 번역사업을 진행해 무려 36권의 주요 경전을 번역해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낸 그의 번역 작업은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번역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법화경이었다. (본문 68쪽 참조)
- 중생을 구제하는 여덟 가지 비유 법화경
원전에 나오는 25가지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8가지 비유를 일컬어 ‘법화8유’라고 한다. 그 중 「불난 집의 비유」, 「가난한 아들의 비유」, 「가짜 도성의 비유」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비유들은 대승 불교 사상의 핵심과 인간 삶의 진상을 드러내는 불교 문학의 백미이다. 저자가 원전의 내용을 새롭게 간추려 소개한다.(본문 133쪽 참고)
- 붓다의 유다, 제바달다
붓다의 종형이었던 제바달다는 제자이면서도 교권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5백 명의 제자를 이끌고 세력을 결집하여 대립하였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 역시 나중에는 붓다의 구제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기존 소승불교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여자의 성불도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여자와 악인은 사회적으로 가장 열등한 지위에 있었는데 이를 구제한다는 것은 법화경이 대승불교의 성립근거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경전임을 말해준다.(본문 178쪽 참고)
- 100년에 한 번 수면에 오르는 거북이
법화경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100년에 한 번 수면에 오르는 거북이가 우연히 바다에 떠 있는 궤짝 속으로 그 머리를 넣는 것만큼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 일보다 더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 바로 인간과 부처가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한다. ‘가장 귀중한 일을 이루기 위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부처가 민중의 불성(佛性)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게(開示悟入)하는 ‘가장 귀중한 일’을 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이 세상에 오는 이유를 설명한다. (본문 99쪽 참고)
- 원효 화쟁사상의 연원
원효가 신라 통일의 기치로 내건 화쟁사상은 법화경의 중심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화경이후 의천도 고려의 통합을 위해 원효와 법화경이 추구한 통합과 조화를 내세웠다. 이는 분열되어 있던 고려 불교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으로써 법화경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본문 32쪽 참고)
법화경은 신라인과 고려의 의천이 천태종을 도입하고 발전시킨 이래 한국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의 와중에서도 법화경은 민중들의 입을 통해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역사적 영향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늘날에도 법화경을 주요 경전으로 삼는 종파가 많다. 그러나 국내에는 정작 법화경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저서가 별로 없다. 법화경 원전의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 연구서의 번역물이거나 일반 독자보다는 불교 신자들을 염두에 둔 개설서이다. 법화경의 범어 원전이 다양한 사본으로 현존한다는 사실과 국외의 다각적이고 방대한 연구 성과를 고려하면, 국내에서는 법화경이 여전히 과거의 전설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 법화경이 대승 불교의 역동성을 대변했던 만큼, 법화경은 정(靜)의 불교를 동(動)의 불교로 일신하는 데 공헌했다. 따라서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명과의 조화를 모색하는 길을 법화경의 정신에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법화경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 경전의 하나로만 각인되어온 법화경을 한국 사상사와 민중사,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사라는 더 큰 틀에서 재해석하고, 그 현대적 변용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2. 이 책의 특징
- 법화경 탄생의 속사정
최초의 불교는 일정 정도의 부를 지닌 계층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경전에 대한 지적 이해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연히 당시 인도 민중들의 삶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처가 열반한 후 성체(聖體)를 봉안한 탑이 여러 곳에 세워지자 민중들이 그 탑을 신봉하기 시작했고, 집에서 불교를 믿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오면서 기존의 종단을 넘어서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자연히 보수 세력으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순교와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들도 시간에 지나면서 기존 종단이 세속화, 보수화 경향을 답습한다. 이런 현상에 반발하여 기원전 1세기 인도 서북부에서 진보적인 보살단(菩薩團)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법화경을 성립시킨 장본인들이다.
- 동아시아 전파의 역사적 맥락
서기 406년 중국어로 전해진 법화경은, ‘법화8유(法華八喩)’라는 여덟 가지 비유와 법화경을 읊기만 하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설법을 바탕으로 중국 민중 속으로 넓고 깊숙이 침투했다. 이러한 법화경의 특징은 전도자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했다. 중국 천태종을 개창한 지의대사는 법화경을 통해 강한 호국의식과 중생 구제의 염원을 관철시키고자 수나라 양제에게 유서를 남겼다. 이러한 사회의식은 법화경을 받아들인 이후의 한국과 일본에서도 엿보인다. 고려가 개국할 무렵 일부 승려들은 태조 왕건에게 법화경을 통해 삼국의 통일을 더욱 확고히 하고 왕실을 번영케 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고, 대각국사 의천은 국가 이익과 민생 복리를 위해 주전론(鑄錢論)을 주창하여 화폐 경제의 문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일련이 『입정안국론』을 저술하여 법화경에 의한 위정자의 의식 변화와 국가 전체의 개혁을 주창하기도 했다.
- 법화경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법화경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중국에 거주하던 신라 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지성적인 태도로 세미나를 벌이며 법화경을 신봉했다. 그러나 세속의 민중들은 그와 반대로 법화경에 관한 온갖 영험한 이야기를 통해 법화경을 흡수했다. 이처럼 법화경을 둘러싸고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공존했다. 상부 구조는 법화경 사상에 심취하여 이것을 국가와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신봉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다. 반면 하부 구조는 법화경 자체나 상부구조의 지도를 거의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다수의 집단이다. 이들이 심취한 것은 독실한 신심으로 소원을 성취하려는 기복 신앙이며, 이들을 유인하는 것은 법화경의 기복적 요소이다. 따라서 법화경 문화의 양태를 결정한 것도 그 양부 구조이다. 상부구조는 천태종을 대표로 하는 법화경 종파의 흥기로 결실을 맺고, 하부 구조는 관음 신앙을 대표로 하는 기복적 양상이 종교 활동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조선이 성립한 후 천태종이 선종에 통폐합되면서, 법화경 문화의 상부 구조는 거의 해체되고 하부 구조만 남게 되었다.
- 법화경은 동아시아의 성경?
법화경의 산스크리트 원전을 최초로 영역한 유럽의 학자는 『바가바드 기타』가 법화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바그바드 기타』는 유일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성실한 믿음을 다른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일부 학자들은 이 고전이 기독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화경에 기독교적 요소가 스며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법화경에는 부처의 생애를 묘사하고 무궁한 자비심을 실천하는 구제자로서의 부처를 부각시키는 부분이 제법 등장한다. 마치 성경에 예수의 행적이 상세히 묘사되듯이 말이다. 법화경은 어쩌면,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관계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3. 흥미로운 부분
- 석가탑과 다보탑이 같이 있는 까닭은?
법화경 견보탑품에는 이불병좌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과거의 부처와 현재의 부처가 같이 존재한다는 뜻으로서 곧 부처의 영원성을 설파한다. 중국의 가람양식을 본받은 우리 사찰은 대웅전 앞에 탑을 두 개씩 조성하였는데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도 그런 경우다. 현재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를 통일하는 최고의 부처가 석가탑에 있으며 과거에 입멸한 부처는 다보탑에 있다. 이 두 탑이 같이 있다는 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부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영원한 존재라는 법화경의 독특한 생명신앙을 말해주는 것이다.(본문 83쪽 참조)
- 손오공이 삼장법사에게 꼼짝 못한 이유는?
법화경은 민중들에게 온갖 곤경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불, 물, 바람, 칼, 귀신, 형벌, 도둑에 의한 곤경을 피할 수 있다. 또 생노병사의 모든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며 바라는 대로 아이도 얻을 수 있다. 한 마디로 관세음보살에 의지하면 자연재해나 인생만사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서유기의 현장법사가 서역을 통과할 때 손오공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방법으로 염불을 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본문 60쪽, 122쪽 참고)
- “목숨도 필요없다. 가르침만이 모든 것이다.”
법화경 원전이 성립하는 배경이 되는 것 중 하나로 특수한 신앙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굳건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들의 집요함을 참을 수 없었던 기존 불교는 이들의 행태를 비난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법난이라고 규탄하며 더욱 결속을 다졌다. 이 사람들이 법화경의 초기 형태를 작성하였는데 기존 불교의 압력에 대해 “목숨도 필요없다. 가르침만이 모든 것이다.”라며 그들의 뜻을 굽히지 않는 광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본문 77쪽 참조)
- 천재 번역가를 데려오기 위한 전쟁
중국이 인도에서 불교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번역자가 필요했다. 전진(前秦)은 쿠차국의 젊은 승려였던 구마라습을 데려오기 위해 정벌전쟁을 감행한다. 16년 간 중국에 억류되어 있던 구마라습은 그동안 한문을 익혀 본격적인 불경 번역사업을 진행해 무려 36권의 주요 경전을 번역해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낸 그의 번역 작업은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이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번역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법화경이었다. (본문 68쪽 참조)
- 중생을 구제하는 여덟 가지 비유 법화경
원전에 나오는 25가지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8가지 비유를 일컬어 ‘법화8유’라고 한다. 그 중 「불난 집의 비유」, 「가난한 아들의 비유」, 「가짜 도성의 비유」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비유들은 대승 불교 사상의 핵심과 인간 삶의 진상을 드러내는 불교 문학의 백미이다. 저자가 원전의 내용을 새롭게 간추려 소개한다.(본문 133쪽 참고)
- 붓다의 유다, 제바달다
붓다의 종형이었던 제바달다는 제자이면서도 교권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5백 명의 제자를 이끌고 세력을 결집하여 대립하였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 역시 나중에는 붓다의 구제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기존 소승불교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여자의 성불도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여자와 악인은 사회적으로 가장 열등한 지위에 있었는데 이를 구제한다는 것은 법화경이 대승불교의 성립근거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경전임을 말해준다.(본문 178쪽 참고)
- 100년에 한 번 수면에 오르는 거북이
법화경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100년에 한 번 수면에 오르는 거북이가 우연히 바다에 떠 있는 궤짝 속으로 그 머리를 넣는 것만큼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 일보다 더 희귀하고 귀중한 것이 바로 인간과 부처가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한다. ‘가장 귀중한 일을 이루기 위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부처가 민중의 불성(佛性)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게(開示悟入)하는 ‘가장 귀중한 일’을 한다는 것으로 부처가 이 세상에 오는 이유를 설명한다. (본문 99쪽 참고)
- 원효 화쟁사상의 연원
원효가 신라 통일의 기치로 내건 화쟁사상은 법화경의 중심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화경이후 의천도 고려의 통합을 위해 원효와 법화경이 추구한 통합과 조화를 내세웠다. 이는 분열되어 있던 고려 불교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으로써 법화경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본문 32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