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해양사 연구
- 1314
• 지은이 : 윤명철
• 가격 : 33,000원
• 책꼴/쪽수 :
232*160mm, 534쪽
• 펴낸날 : 2003-08-30
• ISBN : 9788971969755
• 십진분류 : 역사 > 역사 (900)
• 추천기관 :
대한민국학술원
2004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선정
2004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선정
• 태그 : #역사 #한국사 #고구려 #해양사 #동아시아
저자소개
지은이 : 윤명철
동국대와 성균관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고구려 해양교섭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전임연구원이자 해양문화연구소장으로서 우리나라 역사를 ‘바다’를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대한해협과 황해, 동중국해를 뗏목으로 건너는 등 여러 차례 고대 해상항로를 직접 운항하면서 해양활동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해 왔다.
저서로 『해모수』(대한해협 뗏목 학술 탐험기), 『일본 기행』, 『동아지중해와 고대 일본』, 『역사 는 진보하는가』, 『말 타고 고구려 가다』(고구려 문화유적 답사기), 『고구려 산성과 해양방어 체제』(공저) 등이 있으며, 『신단수』, 『당나무』, 『환웅, 세상에 나서다』(단군신화 서사시) 등 여러 권의 시집이 있다
저서로 『해모수』(대한해협 뗏목 학술 탐험기), 『일본 기행』, 『동아지중해와 고대 일본』, 『역사 는 진보하는가』, 『말 타고 고구려 가다』(고구려 문화유적 답사기), 『고구려 산성과 해양방어 체제』(공저) 등이 있으며, 『신단수』, 『당나무』, 『환웅, 세상에 나서다』(단군신화 서사시) 등 여러 권의 시집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서 바다는 소외된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몽골 등의 내륙국가와는 달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없지는 않았으나 전문적인 학술 연구로 이어진 것은 윤명철의 박사학위 논문이 최초이다.
그 논문이 바로 <고구려 해양교섭사 연구>인데, 학위 논문 발표 이후 고구려사를 해양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고구려 해양사 연구>로 업그레이드하여 본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미 박사학위 논문에서 해양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재해석하는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보인 바 있는 윤명철은 고구려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다시 보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해양과 육지를 등가로 고려하는 ‘해륙사관’이 그의 독특한 사관이다.
본서에서는 그의 해륙사관을 토대로 고구려뿐 아니라 고구려 해양 활동의 배경이 되었던 고조선 해양사가 일부 포함되고, 본인이 직접 뗏목을 타고 체험한 고대 항로 탐사의 과학적 내용이 들어 있다.
해양을 중심으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찾아내고, 이를 통하여 현재와 미래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할로서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동북아시아 물류중심국가 건설 등을 화두로 삼는 오늘날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역사로 평가된다.
그 논문이 바로 <고구려 해양교섭사 연구>인데, 학위 논문 발표 이후 고구려사를 해양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고구려 해양사 연구>로 업그레이드하여 본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미 박사학위 논문에서 해양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재해석하는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보인 바 있는 윤명철은 고구려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다시 보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해양과 육지를 등가로 고려하는 ‘해륙사관’이 그의 독특한 사관이다.
본서에서는 그의 해륙사관을 토대로 고구려뿐 아니라 고구려 해양 활동의 배경이 되었던 고조선 해양사가 일부 포함되고, 본인이 직접 뗏목을 타고 체험한 고대 항로 탐사의 과학적 내용이 들어 있다.
해양을 중심으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찾아내고, 이를 통하여 현재와 미래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할로서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동북아시아 물류중심국가 건설 등을 화두로 삼는 오늘날 반드시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역사로 평가된다.
목차
책을 내면서
1. 고구려 해양 활동의 배경
동아시아의 해양 환경
역사적 배경
2. 고구려 전기의 해양 활동_신해양 세력 고구려의 등장
해양 활동의 지정학적 배경
고대 국가 성장과 해양 활동의 전기
3.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Ⅰ)_광개토대왕의 대외 정책과 해양 활동
동아 질서의 변동과 역학 관계의 변화
광개토대왕의 정책 배경과 해양 활동
광개토대왕의 수군 활동과 군사 작전
4.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Ⅱ)_장수대왕의 남진 정책과 해양 활동
국제 환경의 변화와 대외 정책
수도 남천의 해양적 배경과 조건
수도의 기능과 조건 검토
5. 고구려 말기의 해양 활동
고수전쟁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고당전쟁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
동아지중해 대전의 완결, 삼국통일전쟁
6. 결론
부록|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능력
해양 활동의 범위
항해술과 조선술
대외 교섭 항로
목록: 도판·지도·도표
찾아보기
1. 고구려 해양 활동의 배경
동아시아의 해양 환경
역사적 배경
2. 고구려 전기의 해양 활동_신해양 세력 고구려의 등장
해양 활동의 지정학적 배경
고대 국가 성장과 해양 활동의 전기
3.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Ⅰ)_광개토대왕의 대외 정책과 해양 활동
동아 질서의 변동과 역학 관계의 변화
광개토대왕의 정책 배경과 해양 활동
광개토대왕의 수군 활동과 군사 작전
4.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Ⅱ)_장수대왕의 남진 정책과 해양 활동
국제 환경의 변화와 대외 정책
수도 남천의 해양적 배경과 조건
수도의 기능과 조건 검토
5. 고구려 말기의 해양 활동
고수전쟁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고당전쟁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
동아지중해 대전의 완결, 삼국통일전쟁
6. 결론
부록|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능력
해양 활동의 범위
항해술과 조선술
대외 교섭 항로
목록: 도판·지도·도표
찾아보기
편집자 추천글
1) 고구려 해양 활동의 배경 - 고조선과 자연지리환경
고구려의 해양 활동은 주변의 해양 환경과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받는 등 역사 문화 환경을 토대로 가능했다.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해류, 조류, 계절풍 등을 볼 때 황해뿐만 아니라 남해와 동해 또한 해양 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황해 유역에서는, 압록강 하구 유역 등에서 발견된 5천 년 전 선박 유물이나 절강 지역에서 발견된 7천여 년 전 선박 유물로 볼 때 선사 시대부터 해양 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조선은 물론 이러한 해양 능력을 이어받았으며, 나아가 황해 교역권을 형성하고 또한 그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황해교역권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대립한 두 나라의 전쟁으로 파악한다. 위만조선이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황해의 주도권은 한나라가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회복하기까지는 고구려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2) 고구려 전기의 해양 활동
고구려가 해양 활동 능력을 국가적으로 키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제 정세의 요구 때문이었다. 중국이 삼국(위,촉,오)으로 나뉘어지자, 황해는 한나라에 이어 위나라의 세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나라를 가운데 두고 고구려와 오나라는 협력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는데, 고구려와 오나라의 교섭을 해양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실제로 해양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위나라가 황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연안항로를 피해 먼바다의 사단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위해서 고조선에서 이어져 오던 조선술을 보다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한 배에 말을 무려 80필이나 실어 날랐다는 기록을 볼 때 고구려의 해양 활동 능력은 초기에 굉장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양 능력의 성장은 고구려 이남의 낙랑과 대방 등 한 군현의 정벌을 용이하게 하였는데, 성장한 해양력을 이용하여 한의 군현들과 한나라를 이은 위나라의 연결고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해전의 요충지 서안평 전투는 황해 세력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I - 광개토대왕 시대
광개토대왕 시대의 중국은 5호16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 각국은 인접 지역과 서로 경쟁하면서 다른 지역과 연합을 맺는 합종연횡의 복잡한 국제 정세가 연출되었다. 이들이 인접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과 동맹을 맺는 통로로서 바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황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눈부신 성공에는 수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황해의 영향력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이 심각해지는데, 고구려-신라 동맹과 백제-왜 동맹으로 한반도의 대립 전선이 이루어진다. 백제-왜 동맹에서는 황해뿐만 아니라 남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왜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황해에 이어 남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4)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II - 장수대왕 시대
광개토대왕의 대른 이은 장수대왕의 시대 중원은 남북조로 이전 시대보다 통합되고 안정적인 세력이 자리잡았다. 장수대왕은 이중적인 정책 기조를 펼쳤는데, 중원에는 화친 정책을, 남부의 신라와 백제에는 압박 정책을 취하였다. 백제나 신라가 바다를 통하여 중원 세력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나아가 남부로 영역을 확장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장수대왕은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구려로서는 백제-왜 동맹에게 황해를 빼앗기면 결국 중원과 한반도 남부 세력에 포위되어 위기의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수대왕은 수도를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남부전선을 지휘하기 위한 지리적 이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국내성에 비해 해양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대왕 시대 또한 황해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확보함으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국제 역관계의 모델을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늠하는 저자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5) 고구려 말기의 해양 활동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의 멸망은 당연히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당시 중원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황해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제국의 안녕을 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하여 왕조를 잇지 못하고, 이어서 세계제국 당나라가 수립된다. 당나라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중원의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려 80년에 걸친 기나긴 대고구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당은 무려 500여 척의 군선과 4만3천여 수군을 포함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당은 전략을 바꾸어 먼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했다. 대백제 전투에 참여했던 나당 연합군 중에서 당나라 군대는 무려 13만 대군이었고, 모두 황해를 거쳐 곧바로 백제로 진격하여 백제를 무너뜨렸다. 이후 당나라는 수군의 압록강 등지의 상륙작전과, 남쪽 신라와의 공조 등에 힘입어 결국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한나라에 이어 황해를 장악했던 고구려의 시대는 마감하고, 대당 제국이 황해의 주인이 되었으며, 물론 동아시아의 군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6) 동아지중해 문화권의 형성
황해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등장과 패망 과정에서 파란만장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다양한 세력들의 합종연횡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해와 남해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한중일 지역의 운명이 서로 얽히게 되었다. 일방의 흥망성쇠는 바로 다른 일방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의미 이외에 교역권으로서의 경제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황해를 동아지중해라 명명하며,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이는 본서의 전편에 걸쳐 상세한 사료들로 입증되고 있으며, 고구려사를 새롭게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해양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중요한 관점을 제출하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이루어진 해양중심사관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했고 또한 그 중심적 논거로 이용되었던 저서이다.
7)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능력
당연하게도 해양에서는 육지에서와 달리 유적과 유물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고구려의 해양 활동 능력을 활동 범위와 항로 등의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본서의 부록에서는 각종 문헌들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고구려의 해양 활동 범위를 상세히 추적하였으며, 사료들뿐만 아니라 조선술, 항해술, 항로, 계절풍, 조류 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술조건으로 이러한 자연조건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직접 점검하기 위하여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수차례에 걸쳐 직접 뗏목을 타고 황해 지역을 탐사했으며, 그 결과 검증을 거친 자료들이 부록에 실려 있다.
고구려의 해양 활동은 주변의 해양 환경과 고조선의 전통을 이어받는 등 역사 문화 환경을 토대로 가능했다.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해류, 조류, 계절풍 등을 볼 때 황해뿐만 아니라 남해와 동해 또한 해양 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황해 유역에서는, 압록강 하구 유역 등에서 발견된 5천 년 전 선박 유물이나 절강 지역에서 발견된 7천여 년 전 선박 유물로 볼 때 선사 시대부터 해양 활동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조선은 물론 이러한 해양 능력을 이어받았으며, 나아가 황해 교역권을 형성하고 또한 그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황해교역권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대립한 두 나라의 전쟁으로 파악한다. 위만조선이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황해의 주도권은 한나라가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회복하기까지는 고구려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2) 고구려 전기의 해양 활동
고구려가 해양 활동 능력을 국가적으로 키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제 정세의 요구 때문이었다. 중국이 삼국(위,촉,오)으로 나뉘어지자, 황해는 한나라에 이어 위나라의 세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위나라를 가운데 두고 고구려와 오나라는 협력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는데, 고구려와 오나라의 교섭을 해양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실제로 해양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위나라가 황해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연안항로를 피해 먼바다의 사단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위해서 고조선에서 이어져 오던 조선술을 보다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한 배에 말을 무려 80필이나 실어 날랐다는 기록을 볼 때 고구려의 해양 활동 능력은 초기에 굉장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양 능력의 성장은 고구려 이남의 낙랑과 대방 등 한 군현의 정벌을 용이하게 하였는데, 성장한 해양력을 이용하여 한의 군현들과 한나라를 이은 위나라의 연결고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해전의 요충지 서안평 전투는 황해 세력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I - 광개토대왕 시대
광개토대왕 시대의 중국은 5호16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 각국은 인접 지역과 서로 경쟁하면서 다른 지역과 연합을 맺는 합종연횡의 복잡한 국제 정세가 연출되었다. 이들이 인접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과 동맹을 맺는 통로로서 바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황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눈부신 성공에는 수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황해의 영향력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이 심각해지는데, 고구려-신라 동맹과 백제-왜 동맹으로 한반도의 대립 전선이 이루어진다. 백제-왜 동맹에서는 황해뿐만 아니라 남해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왜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황해에 이어 남해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4)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II - 장수대왕 시대
광개토대왕의 대른 이은 장수대왕의 시대 중원은 남북조로 이전 시대보다 통합되고 안정적인 세력이 자리잡았다. 장수대왕은 이중적인 정책 기조를 펼쳤는데, 중원에는 화친 정책을, 남부의 신라와 백제에는 압박 정책을 취하였다. 백제나 신라가 바다를 통하여 중원 세력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나아가 남부로 영역을 확장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장수대왕은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구려로서는 백제-왜 동맹에게 황해를 빼앗기면 결국 중원과 한반도 남부 세력에 포위되어 위기의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수대왕은 수도를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남부전선을 지휘하기 위한 지리적 이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국내성에 비해 해양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대왕 시대 또한 황해의 주도권을 확고하게 확보함으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국제 역관계의 모델을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늠하는 저자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5) 고구려 말기의 해양 활동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던 고구려의 멸망은 당연히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당시 중원을 통일했던 수나라가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황해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제국의 안녕을 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하여 왕조를 잇지 못하고, 이어서 세계제국 당나라가 수립된다. 당나라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중원의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려 80년에 걸친 기나긴 대고구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당은 무려 500여 척의 군선과 4만3천여 수군을 포함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이후 당은 전략을 바꾸어 먼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공격했다. 대백제 전투에 참여했던 나당 연합군 중에서 당나라 군대는 무려 13만 대군이었고, 모두 황해를 거쳐 곧바로 백제로 진격하여 백제를 무너뜨렸다. 이후 당나라는 수군의 압록강 등지의 상륙작전과, 남쪽 신라와의 공조 등에 힘입어 결국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한나라에 이어 황해를 장악했던 고구려의 시대는 마감하고, 대당 제국이 황해의 주인이 되었으며, 물론 동아시아의 군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6) 동아지중해 문화권의 형성
황해를 중심으로 고구려의 등장과 패망 과정에서 파란만장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다양한 세력들의 합종연횡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해와 남해를 사이에 두고 현재의 한중일 지역의 운명이 서로 얽히게 되었다. 일방의 흥망성쇠는 바로 다른 일방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의미 이외에 교역권으로서의 경제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황해를 동아지중해라 명명하며,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이는 본서의 전편에 걸쳐 상세한 사료들로 입증되고 있으며, 고구려사를 새롭게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해양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중요한 관점을 제출하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이루어진 해양중심사관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했고 또한 그 중심적 논거로 이용되었던 저서이다.
7) 고구려 발전기의 해양 활동 능력
당연하게도 해양에서는 육지에서와 달리 유적과 유물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고구려의 해양 활동 능력을 활동 범위와 항로 등의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본서의 부록에서는 각종 문헌들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고구려의 해양 활동 범위를 상세히 추적하였으며, 사료들뿐만 아니라 조선술, 항해술, 항로, 계절풍, 조류 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술조건으로 이러한 자연조건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직접 점검하기 위하여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수차례에 걸쳐 직접 뗏목을 타고 황해 지역을 탐사했으며, 그 결과 검증을 거친 자료들이 부록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