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무원록 - 억울함을 없게 하라
- 2247
• 지은이 : 왕여(王與)
• 옮긴이 : 김호
• 가격 : 38,000원
• 책꼴/쪽수 :
232*160mm, 565쪽
• 펴낸날 : 2003-08-13
• ISBN : 9788971969717
• 십진분류 : 역사 > 역사 (900)
• 태그 : #역사 #한국사 #조선 #영조 #정조 #법의학 #의학사
저자소개
지은이 : 왕여(王與)
(1261-1346)
중국 원나라의 법학자. 자(字)는 여지(與之). 복건 온주 사람이다. 동한의 처사 왕패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 왕승에 이르러 관직이 추밀승지가 되면서 거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학문에 힘을 쏟아 주야로 독서하였으며 특히 법률에 관심이 많았다. 유목의 추천으로 처음 온주군의 실무관료인 공조가 되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을 때 이들을 살리는데 공을 세워 곧 항주로 염관주 제공안독이 되었고, 이후 강절행성 이문소 제공, 처주로 총관지사를 역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옥사를 명쾌하게 처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승선랑 온주로 낙청현윤을 지낸 후 산림에 은거하였다. ≪우원록無寃錄≫ 이외에 ≪흠휼집欽恤集≫ ≪형명통의刑名通義≫ 등의 저작이 있다.
≪신주무원록≫의 집필진
최치운(崔致雲): 1390(공양왕 2)∼1440(세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집현전에 들어갔다. 이후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다. 법률에 밝아 ≪신주무원록≫의 편찬 사업을 책임졌다.
그리고 실제 업무는 이세형, 변효문, 김황이 담당하였다.
중국 원나라의 법학자. 자(字)는 여지(與之). 복건 온주 사람이다. 동한의 처사 왕패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 왕승에 이르러 관직이 추밀승지가 되면서 거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학문에 힘을 쏟아 주야로 독서하였으며 특히 법률에 관심이 많았다. 유목의 추천으로 처음 온주군의 실무관료인 공조가 되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을 때 이들을 살리는데 공을 세워 곧 항주로 염관주 제공안독이 되었고, 이후 강절행성 이문소 제공, 처주로 총관지사를 역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옥사를 명쾌하게 처결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승선랑 온주로 낙청현윤을 지낸 후 산림에 은거하였다. ≪우원록無寃錄≫ 이외에 ≪흠휼집欽恤集≫ ≪형명통의刑名通義≫ 등의 저작이 있다.
≪신주무원록≫의 집필진
최치운(崔致雲): 1390(공양왕 2)∼1440(세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이다. 1408년(태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집현전에 들어갔다. 이후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좌승지를 지냈다. 법률에 밝아 ≪신주무원록≫의 편찬 사업을 책임졌다.
그리고 실제 업무는 이세형, 변효문, 김황이 담당하였다.
옮긴이 : 김호
1986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2000)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 가톨릭대, 연세대, 한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는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2000)가 있으며, 공저로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2000) ≪조선시대생활사2≫(2000),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학≫(2002)이 있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奎章閣 소장 ‘檢案’의 기초적 검토」(1998), 「18세기 후반 서울 거주 士族의 衛生과 의료」(1998), 「100년전 살인사건, 검안을 통해본 사회사」(2001), 「해방이후 ‘한국과학기술사’연구의 종합적검토」(2001), 「조선후기 宮中의 출산 풍속」(2002) 등이 있다. 조선시대 과학 및 의학의 사회사 그리고 생활사 논문들을 쓰고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조선의 과학, 조선의 정의
『신주무원록』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법의학의 기본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이 오랫동안 법의학 지침서로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검시의 구체적인 절차, 검시 과정의 엄밀성과 주의사항 등에 대한 행정 절차상의 규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다양한 원인으로 사망한 시체의 검시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주무원록』에서 마련한 행정상의 규식이 조선 후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준수되었다는 사실, 『신주무원록』의 과학적인 법의학 지식에 대해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신주무원록』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비록 『무원록』 자체는 중국에서 간행되었으나 이를 도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주석본을 만들었으며 또 이후에 이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용했다는 사실은 수준 높은 조선의 법정신을 가늠케 해준다.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정신이야말로 『신주무원록』 간행의 기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 옮긴이의 해제 중에서
『신주무원록』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법의학의 기본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이 오랫동안 법의학 지침서로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검시의 구체적인 절차, 검시 과정의 엄밀성과 주의사항 등에 대한 행정 절차상의 규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다양한 원인으로 사망한 시체의 검시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주무원록』에서 마련한 행정상의 규식이 조선 후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준수되었다는 사실, 『신주무원록』의 과학적인 법의학 지식에 대해 조선 후기까지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신주무원록』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비록 『무원록』 자체는 중국에서 간행되었으나 이를 도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주석본을 만들었으며 또 이후에 이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용했다는 사실은 수준 높은 조선의 법정신을 가늠케 해준다.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정신이야말로 『신주무원록』 간행의 기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 옮긴이의 해제 중에서
목차
책을 내면서
해재: <신주무원록>과 조선 전기의 검시檢屍
序
신주무원록 목록
新註無寃錄 券上
論辯
옛날과 지금의 검시법이 동일하지 않음
자액自縊이라는 글자의 뜻
익사한 시체의 경우, 남자는 엎드려 있고 여자는 누워 있다
검험檢驗에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함
검시에 소용되는 법물인 은비녀의 진위
중독의 경우
친생親生의 혈속血屬을 판별하는 법
식기상의 판별
장지주張知州가 악역惡逆의 무리를 명쾌하게 판별한 데 대하여
주야晝夜를 구분하는 방법
부모가 늙어 모실 사람이 없는데, 도형徒刑 이상의 죄를 저지른 경우
잉태孕胎한 부인의 시체
병사病死한 죄수
格例
1. 시장식屍帳式
2. 시장屍帳 사례
3. 시장에 오작 피고인이라고 서명하는 데 대하여
4. 죽은 이가 친속이 없는 경우, 이웃이나 지주地主 혹은 방정坊正등이 관에 고발한다
5. 정관正官이 검시하고, 인명 사건을 수리受理하는 데 대하여
6. 인명 사건을 수리受理하고 검시하는 사례
7. 자액自縊을 면검免檢하는 경우
8. 관을 열고 검시할 경우의 처리 방법
9. 뼈가 드러난 것을 검험하는 데 일정한 법례法例가 결여된 데 대하여
10. 시체의 상흔이 불명확한 경우
11. 초검과 복검을 지연하거나 태만히 한 경우
12. 검험을 순검巡檢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는 안 될 일
13. 초적草賊들이 난으르 일으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면검할 것
14. 강도가 돈 주인을 죽인 경우에는 즉시 검험할 일
15. 성부省府에서 검시식檢屍式의 두 항목을 만들었다
16. 춥고 더운 데 따른 변동
17. 초검과 복검을 하는 관문關文 서식
新註無寃錄 券下
1. 초검과 복검의 총설
2. 검험하는 방법
3. 부인의 검험
4. 낙태된 소아 시체의 검시
5. 목졸려 죽은 경우
6. 스스로 목을 매 죽은 경우
7. 물에 빠지거나 몸을 던져 죽은 경우
8. 서로 구타 후에 물에 빠져 죽은 경우
9. 몽둥이로 맞아 묵은 경우
10. 칼날 등에 의해 살해된 경우
11. 칼에 찔려 죽은 경우
12. 머리와 몸이 떨어져 다른 곳에 있는 경우
13. 주먹이나 손발 등으로 구타당해 죽은 경우
14. 고한辜限 내에 병사한 경우
15. 스스로 베고 죽은 경우
16. 독을 먹고 죽은 경우
17. 불에 타 죽은 경우
18.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19. 병환으로 죽은 경우
20. 얼어 죽은 경우
21. 굶어 죽은 경우
22. 장杖을 맞아 사망한 경우
23. 죄수가 심문받다가 죽은 경우
24. 놀라서 죽은 경우
25. 부딪쳐 죽거나 실족失足하여 사망한 경우
26. 압사壓死한 경우
27. 우마牛馬에 밟혀 죽은 경우
28. 수레에 치여 죽은 경우
29. 침구鍼灸등을 시술받은 후 즉시 사망한 경우
30. 벼락에 맞아 죽은 경우
31. 호랑이에 물려 죽은 경우
32. 술과 음식을 포식하여 죽은 경우
33. 다른 물건으로 입과 코를 막아 질식해 죽은 경우
34. 딱딱한 물건에 부딪쳐 죽은 경우
35. 뱀과 벌레에 물려 죽은 경우
36. 남자가 지나치게 성교하여 사망한 경우
37. 희고 빳빳하게 말라 죽은 경우
38. 벌레·쥐·개에게 물려 죽은 경우
39. 죽은 후에 오랫동안 누웠거나 엎어져 있는 경우, 색이 약간 붉고 누런 빛이 돈다
40. 상하여 썩은 경우
41. 증빙할 근거가 없는 경우
42. 무덤이나 집 안에 임시 매장되어 있는 경우
43. 무덤을 도굴盜掘한 경우
跋文
해재: <신주무원록>과 조선 전기의 검시檢屍
序
신주무원록 목록
新註無寃錄 券上
論辯
옛날과 지금의 검시법이 동일하지 않음
자액自縊이라는 글자의 뜻
익사한 시체의 경우, 남자는 엎드려 있고 여자는 누워 있다
검험檢驗에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함
검시에 소용되는 법물인 은비녀의 진위
중독의 경우
친생親生의 혈속血屬을 판별하는 법
식기상의 판별
장지주張知州가 악역惡逆의 무리를 명쾌하게 판별한 데 대하여
주야晝夜를 구분하는 방법
부모가 늙어 모실 사람이 없는데, 도형徒刑 이상의 죄를 저지른 경우
잉태孕胎한 부인의 시체
병사病死한 죄수
格例
1. 시장식屍帳式
2. 시장屍帳 사례
3. 시장에 오작 피고인이라고 서명하는 데 대하여
4. 죽은 이가 친속이 없는 경우, 이웃이나 지주地主 혹은 방정坊正등이 관에 고발한다
5. 정관正官이 검시하고, 인명 사건을 수리受理하는 데 대하여
6. 인명 사건을 수리受理하고 검시하는 사례
7. 자액自縊을 면검免檢하는 경우
8. 관을 열고 검시할 경우의 처리 방법
9. 뼈가 드러난 것을 검험하는 데 일정한 법례法例가 결여된 데 대하여
10. 시체의 상흔이 불명확한 경우
11. 초검과 복검을 지연하거나 태만히 한 경우
12. 검험을 순검巡檢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는 안 될 일
13. 초적草賊들이 난으르 일으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면검할 것
14. 강도가 돈 주인을 죽인 경우에는 즉시 검험할 일
15. 성부省府에서 검시식檢屍式의 두 항목을 만들었다
16. 춥고 더운 데 따른 변동
17. 초검과 복검을 하는 관문關文 서식
新註無寃錄 券下
1. 초검과 복검의 총설
2. 검험하는 방법
3. 부인의 검험
4. 낙태된 소아 시체의 검시
5. 목졸려 죽은 경우
6. 스스로 목을 매 죽은 경우
7. 물에 빠지거나 몸을 던져 죽은 경우
8. 서로 구타 후에 물에 빠져 죽은 경우
9. 몽둥이로 맞아 묵은 경우
10. 칼날 등에 의해 살해된 경우
11. 칼에 찔려 죽은 경우
12. 머리와 몸이 떨어져 다른 곳에 있는 경우
13. 주먹이나 손발 등으로 구타당해 죽은 경우
14. 고한辜限 내에 병사한 경우
15. 스스로 베고 죽은 경우
16. 독을 먹고 죽은 경우
17. 불에 타 죽은 경우
18.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19. 병환으로 죽은 경우
20. 얼어 죽은 경우
21. 굶어 죽은 경우
22. 장杖을 맞아 사망한 경우
23. 죄수가 심문받다가 죽은 경우
24. 놀라서 죽은 경우
25. 부딪쳐 죽거나 실족失足하여 사망한 경우
26. 압사壓死한 경우
27. 우마牛馬에 밟혀 죽은 경우
28. 수레에 치여 죽은 경우
29. 침구鍼灸등을 시술받은 후 즉시 사망한 경우
30. 벼락에 맞아 죽은 경우
31. 호랑이에 물려 죽은 경우
32. 술과 음식을 포식하여 죽은 경우
33. 다른 물건으로 입과 코를 막아 질식해 죽은 경우
34. 딱딱한 물건에 부딪쳐 죽은 경우
35. 뱀과 벌레에 물려 죽은 경우
36. 남자가 지나치게 성교하여 사망한 경우
37. 희고 빳빳하게 말라 죽은 경우
38. 벌레·쥐·개에게 물려 죽은 경우
39. 죽은 후에 오랫동안 누웠거나 엎어져 있는 경우, 색이 약간 붉고 누런 빛이 돈다
40. 상하여 썩은 경우
41. 증빙할 근거가 없는 경우
42. 무덤이나 집 안에 임시 매장되어 있는 경우
43. 무덤을 도굴盜掘한 경우
跋文
편집자 추천글
1. 출간 의의
화성연쇄살인사건, 개구리소년 피살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지난 몇 년간 수사와 재판 과정이 끊임없이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며 온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의 수사 과정에는 수많은 법의학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간의 의견 대립과 혼선은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곤 하였다. 우리나라 검시제도는 사건 현장조차 제대로 보존하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데다 전문 검시관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서구 선진국의 검시제도를 비교 분석하며 우리의 검시제도를 점검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데 몰두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법의학 전통을 되짚어보고 그 맥락 속에서 해법을 마련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 법의학의 고전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조선 법의학의 기존 지침서로 활용되었던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에 대해 지금까지 번역서나 해설서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본 사료 연구가 얼마나 척박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을 다룬 법의학서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범죄와 얽힌 생활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자료이기도 한 귀중한 사료이다. 연구 분야가 확대되고, 다채로운 연구 방법이 적용되는 시점에 이를 만큼 최근의 생활사 연구는 진일보했지만, 막상 생활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기초 사료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 현재 학계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시대 과학과 의학 분야의 생활사 연구를 통해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선두주자인 김호가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신주무원록>의 출간은 우리 학계의 값진 성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한문 원문과 번역문을 효과적으로 병기한 편집 방식이 더해져 난해한 고전의 가독성을 한층 높이면서, 생소하기만 할 것 같은 15세기의 법의학서 <신주무원록>을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게끔 했다.
2. <신주무원록>의 간행 과정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1261-1346)의 저작인 <무원록>은 1308년에 저술되었다. 왕여는 기왕의 법의학서와 원대의 다양한 판례들을 참고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435년(세종 17), 조선의 조정에서도 법의학 지침서로 <무원록> 활용이 거론되었다. 검시하는 격례格例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이과吏科, 율과律科의 시험 과목으로 정하고 조사朝士들도 이를 익히게 하여 검험에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독해가 까다롭고 조선과 다른 중국의 제도에 기초하였다는 점이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무원록>의 조선판 간행과 주석 작업을 명하게 되었다. 세종은 최치운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에게 음주音註를 달도록 명하였고, 최치운 등은 <무원록>뿐만 아니라 다른 참고서도 고찰하여 주석을 달고 음훈을 병기하여 <신주무원록>을 완성했다. 세종은 이듬해인 1439년 봄, 의학에 정통하여 의서 편찬 경력이 있는 강원도 관찰사 유효통에게 <신주무원록>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도록 명하였고, 이듬해 봄에 드디어 초간본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에서 간행된 <신주무원록>이 전국으로 보급되어 활용되는 데는 강원도라는 지역이 장애로 작용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경주, 진주, 남원, 원주 등 각지에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후 18세기 <증수무원록>이 간행될 때까지 <신주무원록>은 300여 년간 조선 시대 검시의 표준 서적이 되었다.
3. <신주무원록>의 구성과 성과
1) 구성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뜻의 <신주무원록>은 살인사건의 검시 방법을 다루는 법의학 지침서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상권은 논변(論辯)과 격례(格例) 부분이고 하권은 시체 검험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상권의 격례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이에 따르는 각론이 하권의 내용이다. 격례에서는 구체적인 검시 절차, 검시 보고서 양식, 상부 기관에 대한 보고 방식 등을 모두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책 p. 21 참조)
2) <신주무원록>의 성과
- 놀랍도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검시
검시의 핵심은 바로 시체의 안색顔色을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신주무원록>에 표현된 색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적색 계통만 보아도 적색에서부터 적자색, 적흑색, 담홍적, 미적, 미적황색, 청적색 등 여러 단계로 색이 세분화되었다. 이와 같은 안색의 관찰은 전통적으로 색(色)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색은 곧 ‘기(氣)의 발화(發化)’라는 <황제내경>의 사상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한편 시체의 상태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안색이 매우 달랐는데 이를 구별하는 일 또한 중요하였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반의 변화를 정확히 안다면 거꾸로 사망 후 경과 시간을 추급하여 사망 일자를 과학적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흔의 위장(僞裝)을 찾아내는 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가령 타물他物로 구타, 살해한 경우 상흔이 푸르거나 붉게 나타날 것이 틀림없지만, 갯버들나무의 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상흔 안이 짓무르고 상하여 검은색이 되는 등 구타 흔적을 위조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손으로 만져보아 부어오르거나 단단하지 않으면 위장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칼로 살해한 후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경우, 범인이 검시인들을 사주하여 시체의 상처에 초를 발라 상흔을 지운 경우,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얼어 죽은 경우 등 그 상황에 맞게 다양한 약재와 보조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적인 판별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 정확하고 표준화된 검시와 행정 절차
<신주무원록>의 내용 전체가 검시의학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마련했는데, 그 철학은 바로 정확성과 엄격함이었다. 예컨대 검시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항인行人과 이인吏人 등에게는 잠시라도 검시관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다짐받고 또 이를 검시관이 감독하였으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뇌물에 연루될까 미리 예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엄밀함과 정확성을 기하려는 정신은 ‘타물他物’, ‘자액自縊’, ‘중독中毒’ 등과 같은 용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검안 문서의 표현에도 나타난다. 가령 ‘피부가 파손되었는데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피부가 약간 손상되어 피는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신주무원록>이 강조하는 정확한 용어 및 서술 정신은 이를 활용하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번역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했고, 그 이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법의학 지식과 행형상行刑上의 절차가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 애민 정신의 통치 철학이 반영
조선 초기에도 살인사건은 상당수에 이르며 그 방법과 원인 또한 매우 다양했으므로, 죽음의 원인과 범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절차가 복잡하고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법률과 규칙이 모두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검시와 살인사건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고 검시 또한 직접 하지 않았고, 정해진 검시 절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통상적으로 범인을 확정하는 데 과학적인 방법과 엄밀한 심문과정이 아닌, 단지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죄수들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진범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 세종은 <신주무원록> 간행을 명하게 되었는데, 그 바탕이 된 세종의 애민 정신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혹시나 백성이 억울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시어...... 음주를 달도록 명을 내리시었다...... 우리 조선 억만세에 백성의 생명을 살리고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이 책에 힘입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정신이야말로 <신주무원록> 간행의 기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4. 주목할 만한 내용들
- 목매달린 것인가, 목매달은 것인가?
무엇보다도 살해 후 자살한 것처럼 시체의 목을 매 조작한 ‘조액사弔縊死’가 가장 판별하기 어려웠다. 죽기 전에 즉시 목을 매달면, 시체의 상흔이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자액自縊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을 맨 장소가 목을 맬 수 있는 높이인지, 목을 맨 들보나 기둥 위에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목을 매단 끈이나 줄이 단단하게 탄성을 유지하면 자액이지만, 끈이 느슨하고 늘어지면 이는 시체를 옮겨 매단 흔적이다. 마지막으로 시체를 관찰하면서 ‘눈을 감았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검험하도록 하였다. 타살이라면 입과 눈을 벌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는 칼에 찔린 경우, 독을 먹은 경우, 서로 구타 후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등에서 검시를 통해 신중하게 판별해야 할 사항이었다.
- 검시에 사용되는 은비녀의 진위?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 은비녀를 인후咽喉 안에 깊이 넣었다가 잠시 후 꺼내면 비녀의 색이 검어진다.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긴요한 법물法物을 검시에 닥쳐서야 검시 관리들이 이웃이나 피고의 집에서 얻어다 사용하는데, 시장이나 공장에서 동銅을 섞어 만든 가짜 은비녀들이 많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따라서 백성의 원망과 억울함을 없게 하려면 관官의 관리 하에 품질 좋은 은으로 은비녀를 만들어 검시 전용으로 보관해야 한다. 이처럼 합법적으로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도구 및 수단들, 즉 법물法物로는 관척官尺이라든지, 시체의 조사 과정에서 사용되는 지게미, 초, 파의 흰 부분, 소금, 매실 과육 등과 시체의 악취를 제거하는 창출, 조각 등의 다양한 약재가 사용되었다.
- 부모가 늙어 모실 사람이 없는데, 도형(徒刑) 이상의 죄를 저지른 경우는?
중죄인의 죄를 심문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나이와 질병의 유무를 살펴야 한다. 노친이 있으나 모실 사람이 없을 때는 거듭 신중하게 살펴 돈을 받고 형을 면제해주는 속형贖刑 등으로 처리함으로써 노친을 봉양토록 해야 한다. 이것이 인정仁政의 베풀어짐을 우러러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부모에 대한 효孝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았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벌에도 유연성이 있었다.
- 조선 시대에도 교통사고가?
조선 시대 주요 운송 수단은 수레였고, 대부분 소와 말이 끌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에 치여서 사망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수레에 치이거나 밀려 죽은 경우 대개 심장과 가슴 앞 부위 그리고 양쪽 늑골이 상한 경우가 많으며, 우마牛馬에 밟혀 죽은 경우는 살빛이 누렇고 두 손을 펴고 있으며 머리의 상투가 풀어지고, 어느 부위엔가 상처가 있는데 길이와 너비, 깊이가 어느 정도 된다. 만약 나귀에게 차였다면 상흔은 이보다 훨씬 작다. 또한 호랑이에게 물린 경우나, 벌레, 쥐, 개에게 물려 죽은 경우 각각 시체를 판별하는 방법이 다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개구리소년 피살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지난 몇 년간 수사와 재판 과정이 끊임없이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며 온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의 수사 과정에는 수많은 법의학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간의 의견 대립과 혼선은 우리나라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곤 하였다. 우리나라 검시제도는 사건 현장조차 제대로 보존하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데다 전문 검시관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서구 선진국의 검시제도를 비교 분석하며 우리의 검시제도를 점검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데 몰두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법의학 전통을 되짚어보고 그 맥락 속에서 해법을 마련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 법의학의 고전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조선 법의학의 기존 지침서로 활용되었던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에 대해 지금까지 번역서나 해설서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본 사료 연구가 얼마나 척박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을 다룬 법의학서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범죄와 얽힌 생활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자료이기도 한 귀중한 사료이다. 연구 분야가 확대되고, 다채로운 연구 방법이 적용되는 시점에 이를 만큼 최근의 생활사 연구는 진일보했지만, 막상 생활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기초 사료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 현재 학계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시대 과학과 의학 분야의 생활사 연구를 통해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선두주자인 김호가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신주무원록>의 출간은 우리 학계의 값진 성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한문 원문과 번역문을 효과적으로 병기한 편집 방식이 더해져 난해한 고전의 가독성을 한층 높이면서, 생소하기만 할 것 같은 15세기의 법의학서 <신주무원록>을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오게끔 했다.
2. <신주무원록>의 간행 과정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1261-1346)의 저작인 <무원록>은 1308년에 저술되었다. 왕여는 기왕의 법의학서와 원대의 다양한 판례들을 참고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435년(세종 17), 조선의 조정에서도 법의학 지침서로 <무원록> 활용이 거론되었다. 검시하는 격례格例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이과吏科, 율과律科의 시험 과목으로 정하고 조사朝士들도 이를 익히게 하여 검험에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독해가 까다롭고 조선과 다른 중국의 제도에 기초하였다는 점이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종은 <무원록>의 조선판 간행과 주석 작업을 명하게 되었다. 세종은 최치운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에게 음주音註를 달도록 명하였고, 최치운 등은 <무원록>뿐만 아니라 다른 참고서도 고찰하여 주석을 달고 음훈을 병기하여 <신주무원록>을 완성했다. 세종은 이듬해인 1439년 봄, 의학에 정통하여 의서 편찬 경력이 있는 강원도 관찰사 유효통에게 <신주무원록>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도록 명하였고, 이듬해 봄에 드디어 초간본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에서 간행된 <신주무원록>이 전국으로 보급되어 활용되는 데는 강원도라는 지역이 장애로 작용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경주, 진주, 남원, 원주 등 각지에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후 18세기 <증수무원록>이 간행될 때까지 <신주무원록>은 300여 년간 조선 시대 검시의 표준 서적이 되었다.
3. <신주무원록>의 구성과 성과
1) 구성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뜻의 <신주무원록>은 살인사건의 검시 방법을 다루는 법의학 지침서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상권은 논변(論辯)과 격례(格例) 부분이고 하권은 시체 검험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상권의 격례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이에 따르는 각론이 하권의 내용이다. 격례에서는 구체적인 검시 절차, 검시 보고서 양식, 상부 기관에 대한 보고 방식 등을 모두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책 p. 21 참조)
2) <신주무원록>의 성과
- 놀랍도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검시
검시의 핵심은 바로 시체의 안색顔色을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신주무원록>에 표현된 색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적색 계통만 보아도 적색에서부터 적자색, 적흑색, 담홍적, 미적, 미적황색, 청적색 등 여러 단계로 색이 세분화되었다. 이와 같은 안색의 관찰은 전통적으로 색(色)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색은 곧 ‘기(氣)의 발화(發化)’라는 <황제내경>의 사상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한편 시체의 상태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안색이 매우 달랐는데 이를 구별하는 일 또한 중요하였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반의 변화를 정확히 안다면 거꾸로 사망 후 경과 시간을 추급하여 사망 일자를 과학적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상흔의 위장(僞裝)을 찾아내는 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가령 타물他物로 구타, 살해한 경우 상흔이 푸르거나 붉게 나타날 것이 틀림없지만, 갯버들나무의 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상흔 안이 짓무르고 상하여 검은색이 되는 등 구타 흔적을 위조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손으로 만져보아 부어오르거나 단단하지 않으면 위장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칼로 살해한 후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경우, 범인이 검시인들을 사주하여 시체의 상처에 초를 발라 상흔을 지운 경우,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얼어 죽은 경우 등 그 상황에 맞게 다양한 약재와 보조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적인 판별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 정확하고 표준화된 검시와 행정 절차
<신주무원록>의 내용 전체가 검시의학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마련했는데, 그 철학은 바로 정확성과 엄격함이었다. 예컨대 검시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항인行人과 이인吏人 등에게는 잠시라도 검시관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다짐받고 또 이를 검시관이 감독하였으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뇌물에 연루될까 미리 예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엄밀함과 정확성을 기하려는 정신은 ‘타물他物’, ‘자액自縊’, ‘중독中毒’ 등과 같은 용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검안 문서의 표현에도 나타난다. 가령 ‘피부가 파손되었는데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피부가 약간 손상되어 피는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신주무원록>이 강조하는 정확한 용어 및 서술 정신은 이를 활용하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번역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했고, 그 이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법의학 지식과 행형상行刑上의 절차가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 애민 정신의 통치 철학이 반영
조선 초기에도 살인사건은 상당수에 이르며 그 방법과 원인 또한 매우 다양했으므로, 죽음의 원인과 범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절차가 복잡하고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법률과 규칙이 모두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검시와 살인사건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고 검시 또한 직접 하지 않았고, 정해진 검시 절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통상적으로 범인을 확정하는 데 과학적인 방법과 엄밀한 심문과정이 아닌, 단지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로 인해 죄수들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진범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 세종은 <신주무원록> 간행을 명하게 되었는데, 그 바탕이 된 세종의 애민 정신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혹시나 백성이 억울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시어...... 음주를 달도록 명을 내리시었다...... 우리 조선 억만세에 백성의 생명을 살리고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이 책에 힘입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정신이야말로 <신주무원록> 간행의 기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4. 주목할 만한 내용들
- 목매달린 것인가, 목매달은 것인가?
무엇보다도 살해 후 자살한 것처럼 시체의 목을 매 조작한 ‘조액사弔縊死’가 가장 판별하기 어려웠다. 죽기 전에 즉시 목을 매달면, 시체의 상흔이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자액自縊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을 맨 장소가 목을 맬 수 있는 높이인지, 목을 맨 들보나 기둥 위에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또한 목을 매단 끈이나 줄이 단단하게 탄성을 유지하면 자액이지만, 끈이 느슨하고 늘어지면 이는 시체를 옮겨 매단 흔적이다. 마지막으로 시체를 관찰하면서 ‘눈을 감았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검험하도록 하였다. 타살이라면 입과 눈을 벌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는 칼에 찔린 경우, 독을 먹은 경우, 서로 구타 후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등에서 검시를 통해 신중하게 판별해야 할 사항이었다.
- 검시에 사용되는 은비녀의 진위?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 은비녀를 인후咽喉 안에 깊이 넣었다가 잠시 후 꺼내면 비녀의 색이 검어진다.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긴요한 법물法物을 검시에 닥쳐서야 검시 관리들이 이웃이나 피고의 집에서 얻어다 사용하는데, 시장이나 공장에서 동銅을 섞어 만든 가짜 은비녀들이 많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따라서 백성의 원망과 억울함을 없게 하려면 관官의 관리 하에 품질 좋은 은으로 은비녀를 만들어 검시 전용으로 보관해야 한다. 이처럼 합법적으로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도구 및 수단들, 즉 법물法物로는 관척官尺이라든지, 시체의 조사 과정에서 사용되는 지게미, 초, 파의 흰 부분, 소금, 매실 과육 등과 시체의 악취를 제거하는 창출, 조각 등의 다양한 약재가 사용되었다.
- 부모가 늙어 모실 사람이 없는데, 도형(徒刑) 이상의 죄를 저지른 경우는?
중죄인의 죄를 심문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나이와 질병의 유무를 살펴야 한다. 노친이 있으나 모실 사람이 없을 때는 거듭 신중하게 살펴 돈을 받고 형을 면제해주는 속형贖刑 등으로 처리함으로써 노친을 봉양토록 해야 한다. 이것이 인정仁政의 베풀어짐을 우러러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부모에 대한 효孝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았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벌에도 유연성이 있었다.
- 조선 시대에도 교통사고가?
조선 시대 주요 운송 수단은 수레였고, 대부분 소와 말이 끌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에 치여서 사망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수레에 치이거나 밀려 죽은 경우 대개 심장과 가슴 앞 부위 그리고 양쪽 늑골이 상한 경우가 많으며, 우마牛馬에 밟혀 죽은 경우는 살빛이 누렇고 두 손을 펴고 있으며 머리의 상투가 풀어지고, 어느 부위엔가 상처가 있는데 길이와 너비, 깊이가 어느 정도 된다. 만약 나귀에게 차였다면 상흔은 이보다 훨씬 작다. 또한 호랑이에게 물린 경우나, 벌레, 쥐, 개에게 물려 죽은 경우 각각 시체를 판별하는 방법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