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하) (한국문화총서 12)
- 1647
• 지은이 : 안길정
• 가격 : 15,000원
• 책꼴/쪽수 :
223*152mm, 362쪽
• 펴낸날 : 2000-07-05
• ISBN : 9788971967010
• 십진분류 : 사회과학 > 사회과학 (300)
• 도서상태 : 절판
• 태그 : #역사 #조선 #관아 #생활사
저자소개
지은이 : 안길정
1956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으며, 1986년 전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출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등 어린이 교양도서를 기획·편집하였으며, 『근본주의자를 위한 수칙』, 『한국전쟁』, 『성서입문』 등을 번역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등 어린이 교양도서를 기획·편집하였으며, 『근본주의자를 위한 수칙』, 『한국전쟁』, 『성서입문』 등을 번역하였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10여 년에 걸친 현장 답사와 자료 수집 기간을 거쳐 전국의 관아에 대한 자료를 체계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관아는 과거 선인들의 생활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점이 집약되어 있는 공간임을 밝혔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연 속에 투영된 인간의 정치적 삶, 도시 계획, 공간 구성과 신분 구성의 상관관계 등에 주목하여 관아를 통해서 각 신분의 삶이 어우러진 생활사를 복원하고자 하였습니다.
목차
5장 질청 : 아전들의 집무처
이야기 한 도막 - 아전 노릇을 한 서울 유생
1. 질청과 아전의 역사
1) 질청 건축
2) 아전들이 남긴 전통
3) 아전의 역사
4) 육방 아전과 하례들
2. 아전의 생활과 문화
1) 거주지와 일과
3. 아전의 역사적 지위
1) 이두의 전승자
2) 탈춤의 주재자
3) 판소리의 후원자
4) 양반 신분을 향하여
6장 교방 : 기생들의 처소
1. 기생 습속
1) 관아에 구실 다니는 여자들
2) 기생의 일상
3) 교방
4) 여악과 수청
5) 구실에서 놓여나다
2. 성 풍속을 다시 본다
1) 기방 풍속
2) 사랑 - 생과 사의 고리
7장 관노청 : 노비들의 장소
이야기 한 도막 - 도망한 종을 찾습니다!
1. 관아 안 노비들의 장소
2. 역사로 보는 노비
1) 노비는 재산이다
2) 노비의 가격
3) 노비 부리는 풍속
4) 노비제 시비
5) 무너지는 노비제
3. 고전 속에 나오는 종들
8장 헐소와 뜰 : 양인들의 대기소
1. 역사의 주인, 양인
1) 양인이란 어떤 신분인가
2) 관아 안에서 양인의 자리
3) 양인의 일상
4) 세상은 무엇으로 바뀌나
2. 나라를 먹여 살리는 이들
1) 양인의 부담
2) 징세 방법과 세의 종류
3) 군역의 무게
4) 촌계와 자치
3. 백성이 진 부담을 환산한다
1) 베 한 필 짜는 데 얼마만큼의 공력이 들었나
2) 농민의 실제 부담은 얼마였나
9장 관아 밖 풍경 : 다시 보는 성황당
이야기 한 도막 - 부사또, 내 사당을 되찾아 주오
1. 성황당을 다시 본다
1) 성황당은 관아 시설이다
2) 성황당은 서낭당이나 산신당과 어떤 관계에 있나
3) 산신을 삼킨 국가 권력
4) 사전 체계 속에 들다
2. 현지에서 다시 본다
1) 지역 영웅들이 성황신이 되다
2) 순창에서 - 성황대신 사적기가 말하는 것
3) 곡성에서
4) 해평에서
5) 순흥에서
3. 성황제, 드디어 면 제사가 되다
1) 옛 사람들의 생활상과 초군청
2) 풀굿과 산신제
0장 나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이야기 한 도막 - 아전 노릇을 한 서울 유생
1. 질청과 아전의 역사
1) 질청 건축
2) 아전들이 남긴 전통
3) 아전의 역사
4) 육방 아전과 하례들
2. 아전의 생활과 문화
1) 거주지와 일과
3. 아전의 역사적 지위
1) 이두의 전승자
2) 탈춤의 주재자
3) 판소리의 후원자
4) 양반 신분을 향하여
6장 교방 : 기생들의 처소
1. 기생 습속
1) 관아에 구실 다니는 여자들
2) 기생의 일상
3) 교방
4) 여악과 수청
5) 구실에서 놓여나다
2. 성 풍속을 다시 본다
1) 기방 풍속
2) 사랑 - 생과 사의 고리
7장 관노청 : 노비들의 장소
이야기 한 도막 - 도망한 종을 찾습니다!
1. 관아 안 노비들의 장소
2. 역사로 보는 노비
1) 노비는 재산이다
2) 노비의 가격
3) 노비 부리는 풍속
4) 노비제 시비
5) 무너지는 노비제
3. 고전 속에 나오는 종들
8장 헐소와 뜰 : 양인들의 대기소
1. 역사의 주인, 양인
1) 양인이란 어떤 신분인가
2) 관아 안에서 양인의 자리
3) 양인의 일상
4) 세상은 무엇으로 바뀌나
2. 나라를 먹여 살리는 이들
1) 양인의 부담
2) 징세 방법과 세의 종류
3) 군역의 무게
4) 촌계와 자치
3. 백성이 진 부담을 환산한다
1) 베 한 필 짜는 데 얼마만큼의 공력이 들었나
2) 농민의 실제 부담은 얼마였나
9장 관아 밖 풍경 : 다시 보는 성황당
이야기 한 도막 - 부사또, 내 사당을 되찾아 주오
1. 성황당을 다시 본다
1) 성황당은 관아 시설이다
2) 성황당은 서낭당이나 산신당과 어떤 관계에 있나
3) 산신을 삼킨 국가 권력
4) 사전 체계 속에 들다
2. 현지에서 다시 본다
1) 지역 영웅들이 성황신이 되다
2) 순창에서 - 성황대신 사적기가 말하는 것
3) 곡성에서
4) 해평에서
5) 순흥에서
3. 성황제, 드디어 면 제사가 되다
1) 옛 사람들의 생활상과 초군청
2) 풀굿과 산신제
0장 나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편집자 추천글
이 책을 발행하면서
1. 관아 연구는 생활사 연구의 시발점이다
관아는 고전 풍속의 여러 양상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과거에 관아는 주민의 생활 근거지였으며, 동시에 고을간 거리를 재는 기산점이었다. 오늘날 시·군청이 도시 계획에서 설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어느 지점에서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들 청사는 고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담이나 역사 소설이나 고전류에서는 관아 묘사가 빈번히 나온다.
관아를 모르고서는 주민의 생활상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래되고 있는 수많은 사료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관아 사정을 모르면 어사출도시에 번개처럼 나타나는 역졸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고을 수령의 무력을 단숨에 제압하는지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다.
각 고을의 관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관아를 중심으로 한 고을은 공간 분할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을 예로 볼 때 궁궐을 중심으로 성 안팎에 각 신분의 거주지가 덩어리를 이루고 나뉘어 있듯이, 지방에서도 도로를 놓거나, 방 면을 나눌 때 치소가 기준이 되었다. 예를 들어 담양에 가면 객사리가 있고, 지침리가 있는데 이런 지명은 과거 관아와의 관련을 반영하고 있다. 객사리는 말할 나위 없이 객사가 있었던 곳이고, 지침리(紙砧里)는 관아의 필요에 따라 종이를 만들어 내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아마도 지침리에는 종이를 만드는 데 동원된 주민이나 장인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서울의 경우 경아전들은 육조에서 가까운 필운동(弼雲洞)에 몰려 살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고,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은 왕십리(往十里)에 몰려 살면서 폭동을 터뜨린다. 지방 관아를 볼 때 기생이나 아전들은 읍성 안에 거주함으로써 민란이 터지면 즉각 대처하여 농성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양반이나 여느 양인들처럼 읍성 바깥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더라면 무력의 원천인 식량 창고나 군기고를 그토록 잽싸게 지킬 수 있었을까?
2. 조선의 관아는 사회 세력을 편입하여 형성된 통치기구이다
조선 왕조는 현실 사회의 주요 계급을 관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려고 하였으며, 고을의 대소사를 그들의 협조 아래 무난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각 신분 계급은 관아 기구에 편입되어 지방 통치에 이용되었으며, 관아의 각 기구는 주요 신분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도록 편성 되었다. 예를 들어 향청은 원래 양반들의 자치적 모임인 향회(유향소)에서 비롯된 것으로, 태종조 무렵에 지방 통치의 기틀이 잡히면서 관아 기구로 포섭되어 마을에서 세금을 걷는데 협력하는 기구가 되었다. 질청 역시 마찬가지다. 고을 토호들의 자치 기구가 조선 초에 수령에게 복종하는 관아 기구로 편입되었다. 관아 기구의 변천을 추적하면 이제껏 잘못 알려진 상식의 허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성황당은 생생한 실례가 될 것이다. 성황당을 민속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대신 비교적 후대까지 이어진 각지의 산신 신앙에 주목하여 이것이 면제사 내지 동제로 바뀐 내력에 의문을 품는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중심에 초군과 아전이 있었다. 초군은 20세기 초까지 산신제를 모시면서 산속에다 근거를 두고 생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집단이다. 그들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강고한 기율을 유지하기 위해 초군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초군청은 산신제를 치르는 제사 기구였으며, 동시에 위험하고 고된 나무베기를 원만하게 치러내기 위한 노동 조직이었다. 마치 농군들에게 두레라고 하는 노동 조직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산신 신앙은 생업의 터전을 산에다 둔 나무꾼이나 산간 주민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는데, 고려 조에 들면서 각지의 자연신들은 고을(郡縣) 단위의 지역 영웅에게 주신(主神)의 자리를 빼앗긴다. 이즈음부터 각지의 토호들은 가문의 중시조를 고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운동을 벌였으며, 성황제의 주관 집단이 됨으로써 고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각지의 토호들이 민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 왕조는 엄격한 제사 법령을 제정하여 성황제를 관아에서 주관하도록 하고, 토호나 무당이 멋대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금지 하였다. 이리하여 성황제는 오직 고을의 최고 어른인 수령이 초헌관(祭司長)이 되어 지내는 고을 축제로 바뀌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성황제를 지내는 제사 방식은 유교식으로 일관하지 못했으며, 전란시에는 곧잘 제사권이 무당에게 넘어갔다. 현재 순창에 전해오는 성황대신 사적기는 이런 점을 여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초군은 고전과 노래와 야담에서도 무수히 등장하며,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진주민란을 일으키는 주동 신분이 된다.)
그밖에 노비와 기생, 각종 천한 신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책에서는 부수적일지 모르지만 이 책에서는 본론이 되고 있다. 고을의 각 신분의 나날은 나라에서 매긴 구실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구실=역은 일상을 규정하는 질곡이었다.) 예를 들어 기생이 수령이나 왕의 사신에게 수청하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구실(役)이었다.
3. 새롭게 조망하는 신분들의 생활상
▶ 과거에 국민주택이었던 초가 삼간은 어떤 규모의 집을 가리키는가? 과연 삼간에 그쳤는가? 헛간이나 퇴가 계산에서 빠진 이유는? 그리고 <토정 이지함>의 경우를 보면 여행할 때 솥 단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요로원야화기>의 양반은 행리 속에 말린 반찬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자는 곳은 방이 아니라 봉당이다. 봉당은 봉노와 어떻게 다른가? 사전에는 봉노를 주막집의 가장 큰방이라 풀이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풀이가 나올 수 있을까?
▶ 나그네들이 이용했던 시설로는 역·원·참이 나온다. 이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옛 지도에 3일정이라 표기된 것은 두 지점간 거리가 3일 걸린다는 뜻인데, 과연 반란이나 전쟁같은 비상시에도 이 만큼 걸렸는가? 역·참 간의 표준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인 식(息)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하여 세종이 부린 급주의 빠르기를 추적한다. 왕의 물을 실고 달린 급주는 서울 전의간 250리 노정을 하룻밤 새에 돌파 해야 했다. 이런 속도를 내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했을까?
▶ 가족간에는 성별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경여직,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짰다. 남자는 한 마지기에 쌀을 몇 섬이나 생산했고, 여자는 1년에 베를 몇 필 이나 짤 수 있었을까? 나라에 내는 군포 두 필이 힘겨웠다고 하는데, 한 필의 베를 짜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은 얼마였는가? 요즘 돈으로 따져 옷 한 벌은 얼마이고, 베 한 필은 얼마인가? 과거의 화폐 단위로는 베와 쌀이 동시에 쓰였다. 왜 단일 화폐가 되지 않고 이 두 가지가 각각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쓰이게 되는 것일까?
▶ 옥은 어떻게 생겼는가? 갇힌 이들에게는 밥을 공짜로 주었을까? 아니라면 수인들은 어떻게 연명하였을까? 유배자들은 변방이나 섬에 귀양갔을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혹독하게 따돌림을 받는다. 귀양지에 닿자 마자 우선 몸을 누일 집을 마련해야 했으며, 시시로 닥치는 끼니 걱정은 구걸로나마 해소해야 했다. 모든 유배는 종신 연금형이며, 죄질이나 세도 여부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유배자의 생활 형편은 어떠했는가?
▶ ‘서낭당’은 우리가 알기로 길가에 돌무더기를 쌓아 두고 오가는 여행자들이 손비비를 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돌무더기 숭배는 고을 축제인 ‘성황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순흥 비봉산의 본당에 있는 신체는 이런 의문을 해소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탈춤 놀이를 주도한 집단은 전문 놀이패이거나 돈많은 상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틀렸단 말인가? 판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판을 벌이고 소리꾼을 먹인 것은 관아와 아전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 후기에 이르러 노비들의 도망이 부쩍 늘어나 사회 문제가 된다. 노비들의 도망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전 노비들은 주인집에서 나와 딴집살이를 하게 되며, 이것이 도망을 쉽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도망한 노비들은 어디에 가서 살았는가? 조선의 제도에서는 오가작통법이나 이웃에 책임을 물리는 인징이 있었는데 도망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아무 곳에나 가서 자유롭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의 증진이나 상업 작물의 재배에 따라 부유한 농민이 많이 생겨난다. 이들은 기왕의 신분을 벗어나 양반을 모칭하게 된다. 흔히 알기로 모칭자들이 호적을 고치고 양반 신분을 사서 딴 고을에 가서 양반 행세를 했다는데, 과연 그런가? 모칭자들 이 뜬골로 찾아간 타지에서 어엿한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모칭자들이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칭이 사회 전반에 고루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칭은 사그라들지 않고 유행처럼 번졌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 관아 연구는 생활사 연구의 시발점이다
관아는 고전 풍속의 여러 양상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과거에 관아는 주민의 생활 근거지였으며, 동시에 고을간 거리를 재는 기산점이었다. 오늘날 시·군청이 도시 계획에서 설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어느 지점에서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들 청사는 고을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담이나 역사 소설이나 고전류에서는 관아 묘사가 빈번히 나온다.
관아를 모르고서는 주민의 생활상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래되고 있는 수많은 사료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관아 사정을 모르면 어사출도시에 번개처럼 나타나는 역졸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고을 수령의 무력을 단숨에 제압하는지 알쏭달쏭할 수밖에 없다.
각 고을의 관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관아를 중심으로 한 고을은 공간 분할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을 예로 볼 때 궁궐을 중심으로 성 안팎에 각 신분의 거주지가 덩어리를 이루고 나뉘어 있듯이, 지방에서도 도로를 놓거나, 방 면을 나눌 때 치소가 기준이 되었다. 예를 들어 담양에 가면 객사리가 있고, 지침리가 있는데 이런 지명은 과거 관아와의 관련을 반영하고 있다. 객사리는 말할 나위 없이 객사가 있었던 곳이고, 지침리(紙砧里)는 관아의 필요에 따라 종이를 만들어 내는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아마도 지침리에는 종이를 만드는 데 동원된 주민이나 장인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서울의 경우 경아전들은 육조에서 가까운 필운동(弼雲洞)에 몰려 살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고,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은 왕십리(往十里)에 몰려 살면서 폭동을 터뜨린다. 지방 관아를 볼 때 기생이나 아전들은 읍성 안에 거주함으로써 민란이 터지면 즉각 대처하여 농성할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양반이나 여느 양인들처럼 읍성 바깥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더라면 무력의 원천인 식량 창고나 군기고를 그토록 잽싸게 지킬 수 있었을까?
2. 조선의 관아는 사회 세력을 편입하여 형성된 통치기구이다
조선 왕조는 현실 사회의 주요 계급을 관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려고 하였으며, 고을의 대소사를 그들의 협조 아래 무난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각 신분 계급은 관아 기구에 편입되어 지방 통치에 이용되었으며, 관아의 각 기구는 주요 신분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도록 편성 되었다. 예를 들어 향청은 원래 양반들의 자치적 모임인 향회(유향소)에서 비롯된 것으로, 태종조 무렵에 지방 통치의 기틀이 잡히면서 관아 기구로 포섭되어 마을에서 세금을 걷는데 협력하는 기구가 되었다. 질청 역시 마찬가지다. 고을 토호들의 자치 기구가 조선 초에 수령에게 복종하는 관아 기구로 편입되었다. 관아 기구의 변천을 추적하면 이제껏 잘못 알려진 상식의 허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성황당은 생생한 실례가 될 것이다. 성황당을 민속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대신 비교적 후대까지 이어진 각지의 산신 신앙에 주목하여 이것이 면제사 내지 동제로 바뀐 내력에 의문을 품는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중심에 초군과 아전이 있었다. 초군은 20세기 초까지 산신제를 모시면서 산속에다 근거를 두고 생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집단이다. 그들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강고한 기율을 유지하기 위해 초군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초군청은 산신제를 치르는 제사 기구였으며, 동시에 위험하고 고된 나무베기를 원만하게 치러내기 위한 노동 조직이었다. 마치 농군들에게 두레라고 하는 노동 조직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산신 신앙은 생업의 터전을 산에다 둔 나무꾼이나 산간 주민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는데, 고려 조에 들면서 각지의 자연신들은 고을(郡縣) 단위의 지역 영웅에게 주신(主神)의 자리를 빼앗긴다. 이즈음부터 각지의 토호들은 가문의 중시조를 고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운동을 벌였으며, 성황제의 주관 집단이 됨으로써 고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각지의 토호들이 민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 왕조는 엄격한 제사 법령을 제정하여 성황제를 관아에서 주관하도록 하고, 토호나 무당이 멋대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금지 하였다. 이리하여 성황제는 오직 고을의 최고 어른인 수령이 초헌관(祭司長)이 되어 지내는 고을 축제로 바뀌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성황제를 지내는 제사 방식은 유교식으로 일관하지 못했으며, 전란시에는 곧잘 제사권이 무당에게 넘어갔다. 현재 순창에 전해오는 성황대신 사적기는 이런 점을 여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초군은 고전과 노래와 야담에서도 무수히 등장하며,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진주민란을 일으키는 주동 신분이 된다.)
그밖에 노비와 기생, 각종 천한 신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책에서는 부수적일지 모르지만 이 책에서는 본론이 되고 있다. 고을의 각 신분의 나날은 나라에서 매긴 구실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구실=역은 일상을 규정하는 질곡이었다.) 예를 들어 기생이 수령이나 왕의 사신에게 수청하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구실(役)이었다.
3. 새롭게 조망하는 신분들의 생활상
▶ 과거에 국민주택이었던 초가 삼간은 어떤 규모의 집을 가리키는가? 과연 삼간에 그쳤는가? 헛간이나 퇴가 계산에서 빠진 이유는? 그리고 <토정 이지함>의 경우를 보면 여행할 때 솥 단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요로원야화기>의 양반은 행리 속에 말린 반찬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자는 곳은 방이 아니라 봉당이다. 봉당은 봉노와 어떻게 다른가? 사전에는 봉노를 주막집의 가장 큰방이라 풀이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풀이가 나올 수 있을까?
▶ 나그네들이 이용했던 시설로는 역·원·참이 나온다. 이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옛 지도에 3일정이라 표기된 것은 두 지점간 거리가 3일 걸린다는 뜻인데, 과연 반란이나 전쟁같은 비상시에도 이 만큼 걸렸는가? 역·참 간의 표준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인 식(息)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하여 세종이 부린 급주의 빠르기를 추적한다. 왕의 물을 실고 달린 급주는 서울 전의간 250리 노정을 하룻밤 새에 돌파 해야 했다. 이런 속도를 내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했을까?
▶ 가족간에는 성별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경여직,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짰다. 남자는 한 마지기에 쌀을 몇 섬이나 생산했고, 여자는 1년에 베를 몇 필 이나 짤 수 있었을까? 나라에 내는 군포 두 필이 힘겨웠다고 하는데, 한 필의 베를 짜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은 얼마였는가? 요즘 돈으로 따져 옷 한 벌은 얼마이고, 베 한 필은 얼마인가? 과거의 화폐 단위로는 베와 쌀이 동시에 쓰였다. 왜 단일 화폐가 되지 않고 이 두 가지가 각각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쓰이게 되는 것일까?
▶ 옥은 어떻게 생겼는가? 갇힌 이들에게는 밥을 공짜로 주었을까? 아니라면 수인들은 어떻게 연명하였을까? 유배자들은 변방이나 섬에 귀양갔을 때 마을 사람들로부터 혹독하게 따돌림을 받는다. 귀양지에 닿자 마자 우선 몸을 누일 집을 마련해야 했으며, 시시로 닥치는 끼니 걱정은 구걸로나마 해소해야 했다. 모든 유배는 종신 연금형이며, 죄질이나 세도 여부에 따라 처우가 달랐다. 유배자의 생활 형편은 어떠했는가?
▶ ‘서낭당’은 우리가 알기로 길가에 돌무더기를 쌓아 두고 오가는 여행자들이 손비비를 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돌무더기 숭배는 고을 축제인 ‘성황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순흥 비봉산의 본당에 있는 신체는 이런 의문을 해소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탈춤 놀이를 주도한 집단은 전문 놀이패이거나 돈많은 상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틀렸단 말인가? 판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판을 벌이고 소리꾼을 먹인 것은 관아와 아전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 후기에 이르러 노비들의 도망이 부쩍 늘어나 사회 문제가 된다. 노비들의 도망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전 노비들은 주인집에서 나와 딴집살이를 하게 되며, 이것이 도망을 쉽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도망한 노비들은 어디에 가서 살았는가? 조선의 제도에서는 오가작통법이나 이웃에 책임을 물리는 인징이 있었는데 도망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아무 곳에나 가서 자유롭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의 증진이나 상업 작물의 재배에 따라 부유한 농민이 많이 생겨난다. 이들은 기왕의 신분을 벗어나 양반을 모칭하게 된다. 흔히 알기로 모칭자들이 호적을 고치고 양반 신분을 사서 딴 고을에 가서 양반 행세를 했다는데, 과연 그런가? 모칭자들 이 뜬골로 찾아간 타지에서 어엿한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모칭자들이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칭이 사회 전반에 고루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칭은 사그라들지 않고 유행처럼 번졌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