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등에 불을 지고> 김혜빈 작가

『등에 불을 지고』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현혹하는 오늘날의 사회 모습과 유사한 배경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 중에서도 작가님께서 ‘비무장지대 안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 주목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초기에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정확히 정하지 못했어요. 작년에 ‘미상물체’ 후에는 ‘오물풍선’이라고 명명된 물체를 처음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해졌죠. ‘대남 전단’ ‘확성기’ ‘피해’ 같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이 분명 저 안에 있는데, 왜 나는 그곳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을까? ‘안보’라는 단어야말로 누군가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꺼풀이지 않나? 그 같은 자각이 소설의 뼈대를 만들었어요. 비무장지대야말로 그곳 주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본질을 가리는 정보들이 넘쳐나는 곳이잖아요. 저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모순이라고 믿어요. 그 모순의 원리를 파악하는 과정이 제 주요 창작 동기 중 하나고요. 선택적으로 고통을 수용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의 그 같은 모순을 이해하는 데는 비무장지대 안 마을이 배경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호연과 희슬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유독 시선이 가는데요. 희슬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하다가, 유명한 작가나 감독의 작품을 본 뒤에야 깨달음을 얻은 척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호연은 사람들은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지만 반복되는 불길 속에서 점점 지쳐가고 무기력해질 뿐이라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다소 상반되어 보이는 두 인물을 통해 작가님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다양한 사건 사고에 끊임없이 노출돼요. 누군가는 그에 크게 충격받아 실제로 어떤 행동에 나서기도 하지만 절대다수는 현재에 안주하는 쪽을 선택할 거예요. 행동에 나섰던 사람도 모든 사건에 일일이 관여하지는 못할 거고요. 희슬과 호연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혹여 누군가가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고 삶에 안주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무관심을 드러내는 일은 아닐 거라고, 끓기 전의 물이 가장 뜨겁듯이 그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격렬한 상태일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보면 절대다수(물론 그 안에는 저도 포함돼 있겠죠)를 위한 변호이면서,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를 설명해보려는 나름의 시도였습니다. 동시에 해당 장면을 통해 호연과 희슬의 다른 성격을 드러내고 싶기도 했고요.


 

더불어 호연에 대해 더 질문을 이어가보려 해요. 호연은 방사선과를 졸업한 뒤 영상학과에 다시 진학합니다. 두 전공은 ‘순간을 포착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엑스레이는 사실을 드러내는 반면 영상은 ‘불안한 행복을 사실처럼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듯해요. 작가님이 설정하신 이 차이가 혹, 호연이 사건을 바라보고 파헤치는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요?

호연은 강단 있는 인물이라 사건들에 마냥 끌려다니지 않아요. 동생인 호수와는 대조적이죠. 그렇다고 희슬의 엄마인 이모경만큼 진실을 파헤칠 용기는 없어요. 중심을 파고드는 듯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고, 자기가 만들어낸 의심과 싸우느라 분투합니다. 하지만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사건 속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돼요.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요. 호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면한 사건이 멈춰진 프레임이 아니라 각기 다른 맥락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프레임과 영상의 대비를 가져다 쓴 이유는 결국 하나의 사건을 정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동적 존재로 볼 것이냐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진택은 과거 팔 차선 도로에 뛰어들며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사고를 ‘바라는’ 수동적인 행동으로 보이는데, 이후 유기영의 소설을 읽고 ‘책이 불길을 불러오게 도와주는 일’에 나서는 모습은 훨씬 더 능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러한 배진택의 태도 변화(죽음과 삶에 대한)는 혹 의도하신 걸지 궁금해요.

배진택은 개인적으로 구상하느라 좀 애를 먹었던 인물이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수동성’은 그를 구성하는 주축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고 싶을 때도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어 해요. 그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지만요. 어쨌든 그는 항상 타인이 자기 욕망을 실현해주기를 바라다가 매번 실패하고 결국 스스로 결단을 내려요. 그 결과 고향을 떠나고 팔 차선 도로에서 살아남죠.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세상에서 그가 능동적으로 찾아 한 일은 소설을 읽는 것뿐이에요. 죽음이나 삶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의도했다기보다는 녹우리에서 태어나며 보고 배운 수동적 삶에서 멀어진 끝에 눈앞의 불길에 홀린 듯이 사로잡혔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누군가가 바람을 계속 집어넣으면 아무리 탄력 좋은 풍선도 터지게 되죠. 수동의 극단은 결국 능동일지도 모른다는 제 나름의 해석일 수도 있고요.


 

이 소설에서는 불이 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심지어 그 불 때문에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죠. 이 작품에서 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더불어 ‘책의 야성’이 불러온 사나운 불길과 유태영이 말한 ‘저 지면 아래의 불씨’ 사이의 차이가 궁금해요.

이 소설에서 불은 사람들을 현혹해 다치게 하는 동시에 깨달음을 주는 이중적인 존재예요. 전자는 누군가가 자기 욕망을 따라 움직인 끝에 불러온, 인위적인 불길입니다. 혹은 불의 그림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문제는 우리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는데, 이를 재가공해 전달하는 순간 등 뒤가 아니라 눈앞의 조그만 불씨에 눈길을 빼앗기게 되죠. 풍선 너머에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숨어 있는데 눈앞의 ‘오물풍선’에 집중하게 되는 것처럼요.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눈앞의 불길을 따라 움직입니다. 인쇄소 화재 사건과 관련해 자극적인 이슈들을 찾아 나서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서로를 현혹하죠.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 만큼 누군가는 상처 입고요. 하지만 이 사건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잊히는 것을 막을 때, ‘저 지면 아래의 불씨’가 ‘사람들의 얼어붙은 발밑으로’ 도착할 때의 불은 다릅니다. 지중화라고도 표현한 이 불은 이따금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고, 진실을 말하고, 책의 야성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죠. 이 불은 우리가 등 뒤를 마주할 힘을 줘요. 호연이 마지막에 뒤를 돌아보는 장면에도 이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등에 불을 지고> 제목은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더 강렬하게 그 의미가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제목 관련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위 질문과 연결된 답변일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등에 불을 진 이미지라고 하면 호연의 꿈속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텅 빈 도로에서 호연의 아버지와 기수라가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가운데 걸어오죠. 지금은 삭제되고 없지만, 기획 단계에서는 불길을 배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했어요. 어떤 불안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항상 등을 뜨겁게 달구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도요. 그 불길을 좀 더 잘 느껴줘, 후세대까지 옮겨붙지 않게 등 뒤에 불이 있다는 걸 봐줘. 등에 불을 진 이미지를 통해 그 같은 말을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가 뒤돌아 목격하지 않으면 이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작가의 말’에 적어주신 소설에 대한 내용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사이에도 소설은 생의 자각을 향해 나아갑니다.” “계엄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소설은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님에게 지난겨울을 지나는 동안 소설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평상시 소설은 제게 있어 살아 있다는 걸 자각하게 만드는 무언가였어요. 하지만 지난겨울에는 좀 더 의미 깊었습니다. 저는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중학생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어요. 그 당시 제가 다녔던 학교는 5월 18일이면 항상 5·18민주항쟁 피해자들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강제로 시청하게 했어요. 견학 때면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얼굴이 으깨진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보기도 했죠. 정말 충격적이어서 그날의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2024년 12월 3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는 소설은 아주 쓸모 있다고, 예술과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말로 강력하다고 믿게 됐습니다. 소설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지난겨울 동안 소설은 제게 삶의 버팀목 이상이었어요. 소설의 쓸모를 믿게 해준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일련의 옹호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네요.




 

이 소설에게 독자들에게 가장 건네고 싶은 문장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나와 완전히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게 묻고 싶어. 우리가 쓴 이야기가 현혹에 그친다고 해도 멈추지 않을 수 있겠냐고. 고민해봤는데 난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야.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가 꺼지려는 불길을 되살릴 수도 있으니까. 저 지면 아래의 불씨를 사람들의 얼어붙은 발밑으로 끌어올 수도 있는 거니까.’ 260p

 

제게 하는 다짐이기도 한 문장이라 소개하고 싶었어요. 독자님들이 뽑은 문장은 무엇일지도 궁금하네요. 긴 인터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