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마음의 정치학』 미리 보기 4 : 삼강과 오륜은 다르다!(5~6)



읽기 전에
삼강과 오륜은 다르다!(5. 삼강 대 오륜, 6. 유교는 하나가 아니다)



5. 삼강 대 오륜

오늘날 유교의 대명사로 쓰이는 삼강오륜의 속살은 결이 비틀어져 있음을 보았다. 삼강은 오륜이 아니며, 오륜은 삼강과 다르다. 그러니 삼강이 옳다면 오륜이 틀렸고, 삼강을 따른다면 오륜을 버려야 한다.18삼강과 오륜은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삼강은 군신 관계를 앞세우고, 오륜은 부자 관계를 중시한다. 삼강은 군주 중심의 상하 지배 체제를 사회의 세포인 가족 단위에까지 투사하려는 권력의 기획에서 비롯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 중심, 가부장 중심의 권력 논리가 일차적이다. 반면 오륜은 전쟁으로 가정이 붕괴된 전국시대를 뚫고 새 시대를 건설하려 한 신문명 프로그램이었다. 이에 오륜에서는 가족을 보존하기 위한 사회 윤리가 앞장선다. 또 삼강의 구조가 상명하복, 지배 종속, 수직적 권력 관계라면 오륜은 상호성, 호혜성, 균형을 위주로 한 쌍방 관계로 구성된다. 권력의 상하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삼강에서 통치자 중심의 위민爲民 정치론을 추출할 수 있다면, 상호성을 특징으로 하는 오륜에서는 너와 내가 함께 ‘우리’를 구성하는 여민與民 정치론을 찾아낼 수 있다(맹자의 정치사상은 위민이 아니라 오로지 여민이다). 그러니 오륜이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발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삼강이 동중서의 일통철학에서 비롯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만일 유교를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본질로 삼고 『논어』와 『맹자』를 경전으로 삼는 것이라고 본다면, 단연 오륜이 옳고 삼강은 그르다. 오륜이 유교의 정통이 되면, 삼강은 타락하고 왜곡된 정치 이념이 된다. 반면 “오늘에 살면서 옛날의 도를 따르려는 자에겐 재앙이 미칠 것”이라는 『중용』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제국의 시대에 발맞춰 법가와 유가를 융합한 동중서의 삼강이 시의적절한 것이다. 이때 오륜은 퇴행적인 것이 된다. 삼강의 더 큰 문제는 역사적으로 진화(?)하면서 동아시아 사람들의 숨통을 눌렀다는 사실이다. 즉 “임금이 임금답지 않더라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더라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신하는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라,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라는 식으로 흔히 이해되는 경향”19이 그렇다. 여기서 ‘아비가 아비 짓을 하지 못해도 자식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라는 노예의 윤리가 유교의 대명사로 둔갑한다. 이것은 삼강에서 더 타락한 형태다. ‘자식이 동쪽으로 가고 싶어도 아버지가 서쪽으로 가라시면 거기 따르는 것이 효’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낯익은 유교일 텐데 결단코 ‘원래 유교’와는 관련이 없다.


나는 『맹자』를 주석하는 입장에서 오륜의 관계론이 유교의 정통이며, 삼강은 청신한 본래 유교가 타락한 형태로 본다. 이 책을 저술하는 나의 뜻은 삼강의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고, 오륜의 유교를 오늘 이 땅에서 해석하고 부각하려는 것이다. 참고로 청말, 민국 초기를 살았던 한 중국 지식인은 삼강과 오륜을 아래와 같이 구분했는데, 나는 이 서술이 옳다고 본다.


삼강과 오륜은 구별해야 한다. 삼강처럼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윤리는 한대漢代에 성립된 것으로 본래의 유교와는 무관하다. …… 참된 유교 윤리는 오륜에서 볼 수 있으며, 군신은 의義에 의해 맺어지는 쌍무적인 관계에 다름 아니다.20



18 언제, 어떻게, 누가 삼강과 오륜을 합쳐서 ‘삼강오륜’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지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19 요시카와 고지로, 조영렬 옮김,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 뿌리와이파리, 2006, 188쪽.

20 何啓, 『勸學篇書後』, 著易堂仿聚珍版印, 1899.



6. 유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사상사와 정치사는 다르다. 정치사상사는 단순하지 않다. 오륜을 새 문명의 비전으로 제시한 맹자의 실제 처지는 지리멸렬했다. 전국시대 권력의 독점화 추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맹자는 이에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 그의 사후 천하는 황제 독재 체제로 귀결했고, 그는 철저히 잊힌 사상가가 되었다. 500년 뒤 후한後漢 시대 권력의 핍박을 받으며 유랑하던 망명객 조기趙岐가 지기知己의 별장에 몸을 숨긴 채 목숨을 걸고 주석한 것이 『맹자장구孟子章句』다. 최초의 『맹자』 주석이 맹자 사후 500년 뒤에나, 게다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망명객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은 맹자의 실제 처지와 『맹자』라는 텍스트의 반체제적 특성을 실증한다(훗날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앞서 소개했으니 참고하자).


조기는 책의 서문(「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맹자라는 인물을 소개하는데, 놀랍게도 그때 이미 그의 자字를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제국의 시대를 지나면서 맹자가 철저히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공자의 법통을 계승하여 유교를 이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여, 공자 옆에 반드시 맹자를 병기하는 오늘날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처지였던 것이다(2000년이란 세월이 단순하지 않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오늘날 맹자를 유교의 적통으로 보고, 공자와 맹자를 병기하는 전통은 언제 어디서 비롯했을까. 조기가 맹자를 발견하고 또 1000년 세월이 흐른 뒤 주희에 의해서였다. 주희는 서양 종교사에서 루터Martin Luther가 담당했던 종교개혁을 유교 사상사에서 실행한 혁신가였다. 루터가 부패한 가톨릭에 저항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자’며 회심 운동을 펼친 것처럼(그래서 ‘프로테스탄트’다), 중국에서 불교에 침윤되고 도교에 얼룩진 유교, 아니 ‘삼강 이데올로기’로 타락하여 사람을 국가 권력의 노예로 만든 유교를 원시 유교로 회복하려는 개신 운동을 일으킨 사상가다. 그의 사상은 ‘인성이 곧 천리’라는 뜻의 성즉리性卽理로 압축되기에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스승인 정씨 형제(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를 함께 거명하여 정주학이라고도 하며, 당대인 남송 시대를 특기하여 송학이라고도 하고, 또 그를 존숭하여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요컨대 주희의 사상사적 기여는 원시 유교 정신, 곧 공자와 맹자의 오륜을 회복한 것이다(이 사조를 서양에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 하는데, 나는 개신 유교라고 칭하겠다).


개신 유교 운동의 핵심에 삼강 이데올로기에 짓밟힌 『맹자』를 발굴하고 발현하는 작업이 있었다. 주희는 조기가 일곱 편으로 나누고, 각 편을 또 상하로 나눠 전체 열네 편으로 편술한 『맹자장구』의 체제와 내용을 계승하되 당시 유교, 불교, 도교의 지식을 주석에 담아서 『맹자집주』라는 위대한 작업을 완성한다. 우리에게 주희의 『맹자집주』가 의미 깊은 까닭은 이성계가 정도전과 손을 잡고 고려를 뒤집어엎고 조선을 혁명할 때 그 정당성과 새 나라의 건국이념을 『맹자』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은 주자학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 물밑에는 맹자의 비전, 오륜의 세계가 저류한다는 말이다. 21


오늘날 서쪽으로 베트남에서 중국과 대만을 거쳐 남북한, 그리고 동쪽의 일본에 이르기까지를 유교 문화권이라고 한다. 모두 공자의 『논어』가 상식의 좌표, 사회의 기층을 이룬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남한 땅만큼은 ‘맹자의 나라’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여기에서 정도전의 혁신 문명 설계도가 나왔고, 성삼문의 절의파가 나왔으며, 조광조가 피를 뿌리고, 이황과 조식이 권력에 저항하고,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비롯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경직된 주자학을 개혁하려는 사상 혁신 작업도 『맹자』에서 자원을 얻었다. 재야의 성호 이익이 『맹자』를 주석하였고, 동학의 최재우는 『맹자』에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길어 올렸다. 뿐만 아니라 이항로의 단식과 황현의 자결, 안중근의 저격에 이르기까지 『맹자』는 조선 사람을 조선 사람답게 하는 문화적 유전자로서 구실하였다.


나아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과 의열단이라는 이름에 오롯이 박혀 있는 반식민지 투쟁의 한 동력도 『맹자』에서 나왔다. 해방 후 오늘까지 연면한 자유와 정의, 자립과 자주를 향한 몸짓, 이를테면 4・19 혁명과 여러 학생운동, 유신정권에 저항한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6・10 시민항쟁과 촛불혁명에 이르는 시민들의 발밑에도 맹자의 저항 정신이 깔려 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 가운데 한국인이 평등의식과 민주의식에 유난한 까닭도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에 앞서 맹자의 여민주의 정치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22


유교는 단순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크게 변화해왔다. 특히 전국시대 맹자의 유교와 한제국 시기 동중서의 유교는 전혀 달랐으며, 원시 유교의 정신은 주자학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발밑에 집요하게 흐르고 있음을 일별했다. 정리하면 유교 사상사에서 공자와 맹자의 ‘원시 유교’와 동중서의 ‘제국 유교’가 다르고, 송대 성리학자들의 ‘개신 유교’가 또 다르다. 그리고 특별히 이 땅은 맹자와 매우 친화적인 곳이다. 


이제 흐린 눈을 닦고 자본주의에 무르익은 비만한 몸을 일으켜 2000여 년 전 원시 유교인 『맹자』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 길은 쉽지 않을 것이나 우리를 형성한 바탕 자리이니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23


21 이방원이 정도전을 척살하고, 형제를 살상하는 짓을 거쳐 임금(태종)이 된 뒤 조선은 이씨 왕가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아들 세종에 의해 『삼강행실도』가 반포되면서 ‘삼강 유교’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확정된다. 그럼에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맹자의 사상, 곧 오륜은 학교에서 배우고 과거시험을 통해 습득되면서 조선 사회에 뿌리내린다. 그러므로 조선 정치사는 삼강과 오륜이 갈등한 역사로 묘사할 수 있고, 그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조선 중기의 사화士禍라고 할 수 있다.



22 2017년 겨울, 촛불혁명의 현장을 참관한 한 사회학자의 리포트에는 한국인과 맹자의 관련성이 묘사되어 있다. 요약하면 “지극히 평화롭고 축제적이나 그 태도는 엄정하고 단호하다. 아니, 경건하기조차 하였다. 저 촛불의 모습은 바로 맹자의 모습, 맹자의 전통 아닌가.” 김상준, “촛불은 맹자다”, 〈다른백년〉, 2017년 1월 16일자(http://thetomorrow.kr/archives/3675).


23   이 글은 필자가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녹색평론사, 2012)에 실었던 같은 제목의 글을 새롭게 고쳐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