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헌터걸 시리즈




<헌터걸> 시리즈
차별과 편견이 없는 도서관의 첫 번째 책

글 ✽ 서한솔(서울 상천초등학교 교사)


마스크를 쓰고 일주일에 하루 숨 막히는 수업을 하던 때였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놀아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럴 수가, 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운동장에 놓인 공을 발로 툭 건드리는 어린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도끼눈을 뜨는 것을 보았는지 재빠르게 발을 뗀 어린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학교 재미없어.” 울컥했다. 다행히 나의 분노를 눈치챈 다른 어린이가 친구를 달래며 말해 주었다. “야.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을 때야.”
화낼 타이밍을 놓쳐 어린이들을 보내고 한참을 생각했다. 정말 ‘저 때가 제일 좋은 때’인가?

솔직히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 나는 너무 무력하고, 대부분의 일을 도움과 호의에 기대어서 해야 했다. 그 시절 내 숨통은 책이었다. 판타지 소설만 많이 읽었다. 현실에서 이미 학원, 용돈, 숙제, 규칙 같은 것 때문에 가로막히는 일들이 소설에서 또 가로막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답답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교사가 된 이후 언젠가는 어린이들과 함께 꼭 판타지 소설을 읽으리라 생각했다. 올해가 바로 그 꿈을 실현할 때인 것 같았다. 가뜩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은 어린이들이 코로나를 겪으며 더욱 움츠러들지 않았겠는가. 어린이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신나는 이야기를 함께 읽고 싶었다. 그래서 <헌터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자 주인공이라 시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추측했던 어린이들은 자기 생각을 철회했다. 나 또한 답답했던 어린이들이 책에서라도 대리만족을 할 수 있도록 한 게 정답이었다며 뿌듯하게 다음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2학기 때에는 여자 주인공에 대한 편견을 가뿐하게 날려 버린 <헌터걸>처럼 차별과 편견이 없는 책을 찾아서 우리 학교의 도서관을 바꿔 볼 예정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헌터걸> 속 헌터들처럼 ‘화살’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료를 분석하는 국어, 사회, 도덕, 수학 교육 과정을 활용하기로 했다.

차별과 편견 없이 ‘나다움’을 키울 수 있는 책들을 어린이들에게 추천하자는 어른들의 프로젝트가 공격을 받아 좌초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나도 그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는데, 그날 내내 학교로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마음이 참 괴로웠다. 어른들도 이렇게 어려운데, 어린이들이 정말 해낼 수 있을까? 괜히 마음의 상처만 받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하필 그 주에 하기로 한 수업이 ‘차별과 편견 없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어린이들과 회의하여 정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어린이들에게 불쑥 물었다.
“얘들아. 그런데 우리가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어린이들이 심각해졌다.
“솔직히 어린이가 제안하면 좀 무시하긴 하죠?”
시니컬한 어린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헌터걸의 강지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더욱 말이 꼬이고 말았다.
“선생님, 근데 우리는 헌터처럼 마법 화살이 없잖아요.”
와, 이걸 대체 어쩌지? 그런데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니 우리도 블로그를 만들면 어떨까요?”
현실에선 못 하는 일들을 책에서 보며 대리만족을 했을 거란 나의 추측과 달리, <헌터걸>에서 어린이들이 열광한 부분은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어린이들은 끝끝내 악당의 정체를 밝힌 글을 블로그에서 지우지 않는 강지의 모습을 좋아했다. 헌터걸이 되기 위해 지옥 훈련을 견디는 모습에 감탄했고, 모둠 활동을 어려워하는 강지, 어른들이 만든 규칙을 바꾸기 위해 떨리는 마음을 무릅쓰고 발표를 하는 강지, 쓰기 싫은 글을 끙끙거리며 쓰는 강지를 좋아했다.
나는 그날 이후 어린이가 세상을 바꾸는 다양한 이야기를 두 종류로 나누게 되었다. 어린이가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로 말이다. 어린이들의 의견대로 블로그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주소를 공개하며 솔직하게 고백했다. 선생님이 헌터걸을 추천했던 잘못된 이유와, 어린 시절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 최근에 있었던 속상한 일에 대해서였다. 아이들은 쿨하게 내 사과를 받아 주고, 그럴 수도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힘이 났다. 어른이지만 이렇게 대부분의 일을 도움과 호의에 기대어 해내고 있다.

최근 <헌터걸>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독 모두에게 힘들었던 한 해, 헌터들도 시련을 겪는다. 특히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며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헌터들을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아니, 이렇게 끝이라고요? 어린이들에게 꼭 <헌터걸> 5권을 읽어 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쁘다. 그리고 작가님, 당연히 다음 편이 기다리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