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제2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안녕하세요, 사계절출판사입니다.
총 110편이 응모된 제2회 박지리문학상은 이기호 소설가, 김성중 소설가, 윤경희 평론가 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을 공개합니다.
세 분이 심사 과정에서 눈여겨본 작품들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들을 담아주셨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응모작이 들어 있는 거대한 종이상자가 도착했을 때, 사흘 정도 열어보지 않고 ‘숙성’ 기간을 가졌다. 모종의 준비가 필요했다고 할까. 상자에 담겨 있을 시간과 에너지를 상상하면 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내 한 편씩 읽어나가는 동안 원고 상자는 하나의 생물체처럼 우리 집 귀퉁이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소설은 노동이고, 장편소설은 중노동이다. 소설 안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다. 때문에 쓰는 이의 내부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기 마련이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돼!’ 
장편을 쓰다보면 자신의 폐활량과 체급을 확연하게 체크할 수 있다. 그래서 응모한 모든 분들께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당신은 장편을 완성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와 씨름해 마침표를 찍어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당선자는 한 명뿐이나 응모자 모두 이 경험을 통과한 창작자들이다. 장거리 비행을 마쳤으니 어떤 종이를 만나든 조금은 덜 두려울 것이다.

예심 과정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통적인 가족로망스나 대체 역사, 「미생」류의 오피스물, 동화풍의 환상소설과 관념 과잉의 사변소설 등 하나의 경향으로 묶기 힘들 만큼 다채로웠다. 서술이 줄고 대사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는데, 이는 박지리문학상뿐만 아니라 최근 젊은 창작자들의 전반적인 경향인 듯하다. 심사위원도 하나의 독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다음의 글은 나를 통과한 작품에 대한 독후감으로 읽어주었으면 한다.(달리 말해, 듣고 말고는 작가의 자유라는 소리다. 노파심에서 덧붙여둔다.)
예심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다음과 같다.  
「쾅」 외 2편은 현실에서 반음 정도 떠 있는 듯한 환상을 구사한다. 현실에 파고든 미세한 균열을 보여주며 그걸 듣거나 찾거나 감지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각 편마다 비슷한 상상의 부력을 보이는데, 이 작가의 진짜 관심사는 환상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다만 몇 군데 비약이 발생하는데, 그 비약에 맞먹을 만한 인물의 내적 변화가 적어 아쉬웠다. 
「햄스터의 안식」 외 2편은 별 볼일 없는 작가 지망생이 빈 둥지 증후군인 중년 여성을 만나 햄스터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뤘다.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은 실제로 벌어진 일, 두 번째 작품은 주인공이 쓴 소설, 세 번째 작품은 실제와 환상이 섞이고 글과 글 밖의 세계가 섞여드는 메타픽션이 된다. 나로서는 세 번째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비루한 현실 대신 펫이 되어 배부름/안락함/돌봄을 누리려는 퇴행적인 욕구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작가-햄스터가 케이지를 벗어나는 순간의 폭발력을 좀 더 높였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에게 보다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달콤한 퇴폐의 우리에서 ‘나’는 왜 하수구의 자유를 향해 달리는가? ‘나’의 탈주는 햄스터로서의 본능인가, 인간으로서의 각성인가? ‘쓴다’라는 것이 동물적 욕구와 어떻게 결합되고 단절되는가? 햄스터로의 변신이 생생했던 만큼 주인공을 탈주하게 만든 변화와 동력을 치열하게 벼린다면 카운터펀치가 묵직한 소설이 될 것이다.
「조용하고 잔잔하게」는 삶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상처를 남기는 찰나를 그려냈다. 각 장의 주인공이 되는 기혼 여성과 그의 삶 속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들의 모습을 겹쳐놓아 복잡한 태피스트리를 이룬다. 그런데 높은 밀도의 문장으로 잘 조직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새롭지가 않았다. 이러한 소재-삶이라는 통속 드라마-에는 좀 더 특수한 칼날이 필요하지 않을까? 통속은 ‘표면’이기 때문에 탈-통속의 순간은 인물 내부 깊은 곳에서 끌어오면 좋겠다. 이 여성들은 인생의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과 맞닥뜨리는데 악의, 환멸, 회피하고 부정했던 나의 죄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타인의 말밥에 오르내릴 성질이 아니라 고유하고 내밀한, 지극히 개인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부분을 묘파해나간다면 작품만의 특수한 순간이 발생하리라 생각된다. 

본심에는 「골목의 조」를 포함해 「햄스터의 안식」과 「조용하고 잔잔하게」까지 세 편을 올렸고, 최종심은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과 「골목의 조」로 좁혀졌다. 매력과 약점이 판이하게 다른 두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고민하고 오래 토론했다.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작자의 태도다. 내용과 형식 면에서, 주제와 정서적인 측면에서 이 작가는 안전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흐르는 것도, 비밀을 품은 구조가 끝까지 긴장감을 유발하며 추리/스릴러/호러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퀴어한 주요인물이 전부 크고 작은 폭력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작가가 인물을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었고, 무엇보다 추적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풀리지 않은 채로도 독자가 납득할 만한 장면이나 주인공의 해석이 제시되지 않은 채 감정에 도취된 인상을 주는 게 아쉬웠다. 죽은 자의 계정으로 디엠을 보낸 자의 정체는 경상도 언니든 귀신이든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정전의 순간 희숙이 티키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희숙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부적이 사라진 방에서 자신의 신칼에 찔려 죽은 할머니와 죽은 티키를 감지할 수 있는 희숙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정전의 순간은 정말이지 플루이드 상태여서, 이 소설 특유의 파토스와 마력이 폭발할 장이다. 그러니 조금 더 펜을 끌고 나아가주기를. 사라진 존재를 복원해내고자 하는 작가의 갈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골목의 조」 역시 죽음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물은 높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에피소드들은 연하고 담백한데 이상하리만큼 빠져들어 읽게 되는 묘한 소설이다. 소설을 다 통과할 때 불러오는 감정은 크고 강렬했는데, 재독이나 삼독을 해도 이 작품의 최종 감정이 휘발되지 않았다. 
고양이 두 마리에 유령 하나, 의욕 없는 술집 주인 조가 젊고 하릴없는 나의 지하방에 차례로 출몰해 함께 지낸다. 이들이 하나씩 더해지는 순간과 빠져나가는 순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생에 대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절기에 관한 이야기, 죽은 남자와 죽을 남자,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을 고양이와 더불어 한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마침내 외면해오던 자신의 슬픔과 마주하고 애도를 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전반부는 심드렁한 유머 때문에 웃으면서 읽었는데 후반부에 갈수록 이 소설의 진짜 과녁이 드러난다. 조의 죽음은 돌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데, 우연과 여백이 합쳐진 소설의 톤에 이미 몰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음과 상실에 대해 하나씩 아퀴 짓는 과정이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얼어붙은 채 성인이 된 내가 마침내 성장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의 매력적인 공간들! 말 없는 취객만 오는 술집이나 나의 자취방을 바꿔놓은 품새나, 아무도 모르는 골목을 발견한 후 비치웨어를 가져다놓는 식으로 조의 공간은 조라는 사람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자투리 골목에서 각자 고양이 한 마리씩 안고 햇볕을 쬐는 순간의 이미지는 스냅처럼 선명하다. 이제 죽은 그를 골목에 놓아둠으로써, 주인공은 상실을 지닌 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장점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추적이 끝나지 않은 인상을 준 것과 달리 「골목의 조」는 밀고 나가야 할 세계를 끝까지 좇아 자기만의 궤도에 편안하게 떠 있는 느낌을 주었기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신뢰로도 이어졌다. 다음 작품도 분명 재미있을 것 같은 신뢰감. 나는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을 준비도 이미 되어 있다. _김성중(소설가)



문학상 심사에 처음으로 임하며 응모작들을 읽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만들었다. 문학상 심사자는 어떤 주체이며 어떤 덕목을 지녀야 하는가. 문학상마다의 고유한 목적은 무엇이며 박지리문학상은 다른 문학상들과 비교하여 어떤 특색이 있는가. 어떤 기준에 따라 수상작 후보들을 선별하고 수상작을 선정할 것인가. 응모작들과 최종의 수상작에 대해 심사평을 어떻게 쓸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나는 심사자로서의 나를 일반 독자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정체화하고 싶었다. 심사 업무를 맡게 된 자가 은연중에 자기에게 허가하는 위계적 권력, 평가자로서 내려다보는 시선, 문단 내부자로서 새로운 자격 취득자의 입성을 반기는 폐쇄적이고도 시혜적인 환대의 태도를 나에게서 없애고 싶었다. 완벽히 제거하기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그러고 싶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으로 볼 수 있다면 너무나 기쁘겠다는 마음, 이 작가의 글쓰기라면 앞으로도 기대하며 계속 읽고 싶다는 마음, 좋은 책을 발견하고 읽기를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다른 일반 독자들에게 이런 책이 있으니 같이 읽자고 자발적으로 알리고 권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지나치게 순박하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이 드는 작품들이 커다란 상자에서 여러 편 발굴되기를 바랐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박지리문학상은 다른 여러 문학상과 비교하여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우리 곁에 실존했던 문학인의 이름으로 제정한 상이니만큼, 응모작들 가운데 그의 지난 글쓰기와 삶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비추어 문학적 우정의 관계를 새롭게 상상하는 작품들이 대다수이기를 기대했다. 만약 수상작을 하나만 선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후보작들이 많은 상황이라면, 되도록 박지리의 글쓰기와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줌과 동시에 그것의 곁 바로 너머 바깥에서 새로운 글쓰기와 삶을 이어나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정하고 싶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이에 따라 유연하게 도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심사자가 전문적 권위자가 아니라 일반 독자의 주체성을 고수함으로써, 즉 동료 독자들에게 소개하여 같이 읽고 싶은 작품인지, 아니면 그런 마음이 비교적 덜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작품인지가 판단과 결정의 기준이 됨으로써, 응모작들과 수상작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데 있어서 정직성과 훨씬 더 큰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아래의 심사평을 작성했다.

예심은 응모작 110편을 심사자 세 명이 나누어 읽은 다음 각자 본심에 올릴 후보작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읽은 응모작 40편 중에서는 본심에 올리고 싶은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심사자 두 분께서 네 편을 후보작으로 선정하셔서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읽으며 본심을 진행했다.

나는 소설 창작자가 아니므로 응모작들 중 몇몇을 호명하여 그것의 장점 및 단점을 언급하고 단점에 대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조언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예심을 진행하며 왜 본심에 올리고 싶은 작품이 없었는지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및 위계폭력의 고발 이후 문학계에서는 그동안 인지되지 않았거나 묵살되었던, 특히 여성을 향한, 폭력을 비판하고 지양하는 흐름이 생성되었다. 그럼에도 응모작들 중 여러 편은 여전히 남성의 입지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동물 및 다른 약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함을 넘어 짜릿함을 유발하는 폭력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글쓴이가 한국의 근과거를 향수 어린 어조로만 재현한 이야기들도 몇몇 있었는데, 우리는 독재와 국가 폭력의 역사에 무지하지 않으며, 오늘날의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미화된 과거의 박제품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잔존하는 희생 및 미해결의 문제들을 되비추는 거울을 읽기를 원한다. SF의 틀을 빌린 응모작도 상당했으나, 과학과 기술의 최신 지식을 갖추고 기후, 환경, 지질, 물질, 동식물 생명체를 비롯한 모든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진지한 상상과 사유를 보여주는 대신 무미한 설정과 전개로 무마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독자의 지성을 존중하는 서사를 읽기를 원한다.

본심에 오른 네 편의 후보작 중에서 박지리문학상의 제정 목적에 비추어 박지리의 글쓰기 및 삶과 우정의 관계를 형성할 법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골목의 조」와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이었다. 두 작품은 여러 지점에서 공명한다. 젊은 등장인물들, 비수도권 또는 저개발 지역의 기억, 친밀한 주변인의 죽음, 환상적이거나 불가해한 사건 등. 두 작품을 두고 오래 생각하다가 우리는 최종적으로 「골목의 조」를 택했다.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그와 친밀했던 생존자로서 그 죽음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의 무속적 불가해성보다는 「골목의 조」에서의 위스키, 맥주, 피자의 세속적 장례식을 택한 것이다. 무속이 아닌 세속에 실천적 용기가 있다고 여기며. 박지리 이후, 이 작은 애도와 생존의 용기를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 _윤경희(평론가)



예심 과정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유연한 채식주의자의 낮과 밤」, 「버스」, 「일 미터는 없어」  그리고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이었다.
먼저 「유연한 채식주의자의 낮과 밤」. 이 소설은 동물구조센터에서 일하는 지오의 서로 다른 낮과 밤에 대한 서사로, 동물권에 대한 질문을 전면화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구조된 매의 생사를 걱정하고 채식을 실천하는 지오는, 그러나 김 선생의 제안으로 밤에는 유해 조수의 가죽을 벗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 낮과 밤의 격차가 이 소설의 핵심 전언이기도 하다. 동물구조센터에 대한 성실한 묘사와 전문적인 취재가 돋보였고, 문장도 안정적이었다. 다만 갈등이 너무 단순화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동물권 문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른 저작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소설은 거기에서부터 한발 더 나아가는, 작가 자신만의 질문을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낮과 밤처럼 이분화된 질문은 자칫 하나의 ‘가르침’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밤의 서사가 낮에 비해 너무 기계적이었다는 인상도 따로 적어둔다.
「버스」는 2미터 8센티미터의 국내 최장신 최연소 센터인 언니와 그의 동생을 다룬 소설이었다. 언니의 재능으로 인해 학교 근처까지 이사한 가족, 그러나 뜻하지 않은 취객의 폭행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희망과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는 버스에서 내릴 순 없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낯선 설정과 폭행으로 인한 환청과 환시를 주인공의 내면과 합치시키는 지점은 매력적이었으나, 불필요한 대사의 빈번한 사용과 성급한 결말이 못내 아쉬웠다. 대사를 조금 더 아끼고, 후반부(사고 이후)의 주인공과 언니의 응답에 힘을 기울인다면 보다 더 완성된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 미터는 없어」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측정에 대해 유달리 예민하고 민감한 한 여자의 실종을 추적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과학이 합의하고 통일한 측정 단위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작품 전면에 드러낸다. ‘모든 측정에는 변수가 개입한다’는 말처럼 그의 삶 역시 변수의 나열로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하나의 세목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루기에 분량이 너무 짧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묘사보다는 지나치게 진술에 의지하는 면을 보였고, 그것이 캐릭터의 형상화에도 단점으로 작동했다. 진술하는 화자인 ‘나’와 그와의 관계를 입체적이고 현장감 있게 보강한다면 훨씬 더 울림 있는 작품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력적이어서 더 아쉬움이 남았다.

본심에서 주목한 소설은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과 「골목의 조」, 두 작품이었다.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이 두 작품으로 인해 심사 시간은 오후 늦게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심사위원들 그 누구도 그 시간을 지루해하거나 원망하진 않았다. 그만큼 이 두 작품이 지닌 미덕은 다양했고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았다. 소설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가 있는데, 이 두 작품이 본심에서 만난 것 자체가 그와 같은 경우다. 그만큼 두 작품은 어떤 면에선 비슷했고, 또 어떤 면에선 차이가 났지만, 둘 다 똑같이 특정한 개인의 경험과 의미를 완성도 있게 끌고 나가는 데 성공한 소설들이었다.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은 나와 함께 살던 티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티키로부터 디엠이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죽은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SNS상으로 계속 연락을 취해온다는 이 설정은, 주인공인 희숙의 외할머니 이야기와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바오바브의 서사와 겹쳐지면서 우리에게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져준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존재처럼 숨어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유령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주인공인 희숙 또한 그런 존재와 다름없었다. 애인의 폭력으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그는 그러나 그 트라우마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 접시를 모으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데 급급하다. 중간에 등장하는 502의 캐릭터도 유령이 아닌 것 같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서 티키에게 집착하는, 또 다른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유니크한 표현과 형식, 밀도 높은 플롯까지 소설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나아간다. 후반부에 이르러 정념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대정전의 밤이 모호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있었다. 나 역시 그 의견들에 동의하지만 또 한편 그런 과하고 모호한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그러나 내 아쉬움은 어떤 설득력으론 이어지진 못했다. 소설 공모전은 단점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다. 더 큰 장점과 더 큰 매력을 찾아내는 절차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작품의 작가는 사소한 지적에 지지 말고 오직 자신의 미덕만 더 생각하길 바란다. 그 미덕으로 또 다른 작품을 써주길 바란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운명은 본심에서 「골목의 조」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또 다른 두 번째 운명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골목의 조」는 「어두울 때마다 보이고 밝다면 보이지 않는」과 같이 죽음의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지만, 정념 과밀현상에서 벗어나 오히려 차분하고 조용한 정서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소설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홀로 살게 된 주인공이 다시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고 홀로 남게 된다는, 얼핏 보면 감상적이고 신파적인 이 이야기는, 그러나 섬세한 주인공의 내면 묘사와 시선으로 인해 낯설고 새로운 서사로 변모한다. 그 과정에서 특히 벽에서 돋아난 아저씨에 대한 묘사와 조와 함께 바라보던 골목에 대한 묘사, 이 두 가지 요소가 이 소설을 단순한 감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로 이끌었다. 말하자면 어떤 장소를 통해 우린 달라지고 변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성장까지 할 수 있다는 것. 그 장소에 ‘있고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거리감각을 통해서 다시 나를 발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어떤 ‘장소’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벽에서 돋아난 아저씨는 인물이 곧 장소가 되어버리는 특이한 상징인데, 작품 후반부에서 그 아저씨를 지하철에서 만난다는 설정은 ‘나’의 어떤 변화를 암시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쓸쓸하게 남겨진 작은 골목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올해의 박지리문학상 당선작은 「골목의 조」이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들 모두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어서 빨리 보고 싶다는 기대를 앞다투어 전했다. 그것 이상의 상찬은 없을 것이다. _이기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