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터뷰] 『시작점』 이량덕 작가편

2025 작가 인터뷰 『시작점』 이량덕 작가편



작가님, 사계절그림책상 수상작이자 오랜만의 차기작인 『시작점』 출간을 축하드려요.
이 원고가 상을 받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그저 오래 마음속에 품어 왔던 작은 씨앗 같은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아 상을 받고 이 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이 감사함을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시작점』은 아주 작은 시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여러 가지 시작으로 이어지는 그림책이에요.

이 그림책의 시작점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우연히 한국화가 이진주 작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어릴 때 개미를 관찰하다 보면 아주 작은 존재인데도 온 눈에 가득차 보일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그런 작은 존재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졌어요. 그때 ‘내가 있으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 말을 중심으로 이야기와 이미지를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장면은 직사각형 도형 안에 작은 점을 넣는 장면이었어요. ‘내가 있으면 파란 문이 열리고’라는 문장에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 갔어요.

그 문은 지금도 첫 페이지에 등장해요. 첫 시작점 이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어떤 하루’라는 제목으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작고 소소한 순간들을 담아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수상 후 스토리를 매만지다 보니, ‘하루’라는 단어에 몰두하느라 오히려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못해졌더라고요. 그래서 ‘하루’라는 이미지를 확장하기보다는 시작을 일으키는 작은 시점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작품이 훨씬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출판사에서 제안해 주신 ‘시작점’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메시지를 센스 있게 담아낸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점, 도형 소재를 이미지에 많이 이용하시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팬시 디자이너가 꿈이었어요. 그래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5년 정도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그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도형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도형은 군더더기 없는 형태라 누구나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작은 변주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열려 있는 언어 같아요. 단순하지만 깊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점은 크기는 없지만 아무리 작아도 모든 기하학의 시작점이라는 유클리드 수학자의 말이 있어요. 도형도 작은 점에서 시작되지요. 그림책 <시작점>의 표현 방식도 이와 같아요. 작은 점 하나가 이야기를 그리는 거죠.

형태도 질감도 독특한 이미지예요. 이런 기법은 어떻게 연구하셨나요? 
저는 작업할 때 주로 도형과 픽셀 같은 그래픽 요소 그리고 기하적인 표현 방식을 즐겨 사용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이에요. 픽셀 질감은 디지털 이미지의 가장 작은 단위인데 확대해서 보면 불완전하고 거칠지만 그 작은 점들이 모여 전체 이미지를 완성하잖아요. 보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각적 재미를 줄 수 있습니다. 단순한 도형이 모여 리듬을 만들고 픽셀 같은 작은 요소가 쌓여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이 『시작점』 내용과도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시작점’의 단상들을 계속 수집하셨어요. 그중 아쉽게 빠진 시작점들도 있나요?
사실 바늘과 실이 나오는 장면을 넣고 싶었어요. ‘인연은 이런 거래요’라는 문장이 떠올랐거든요. ‘인연’이라는 단어가 따뜻하고 소중에서 꼭 담고 싶었는데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전체 이야기와는 잘 맞지 않더라고요. 저는 작업할 때 패턴을 보면서 연상 게임을 하곤 해요. 그걸 변형해서 캐릭터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많이 하는데 저만의 드로잉 연습법이기도 합니다. 한 패턴이 사람으로도, 동물로도, 또 전혀 다른 존재로도 변주될 수 있죠. 이런 과정을 통해 이야기에 맞는 이미지가 조금씩 다듬어지고 완성되는 것 같아요.

짧지만 마음을 파고드는 글이 참 좋았어요. 작가님이 가장 손꼽으시는 글은 무엇인가요?
저는 시집을 좋아해요. 짧은 글이 주는 메시지를 특히 좋아합니다. 한 문장 안에도 여러 느낌이 담길 수 있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켜서요. 『시작점』도 그런 시처럼 한 문장 한 문장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우산으로 비 오는 소리를 담아 보는 건 어때요?” 이 글을 제일 좋아해요. 저는 우산을 좋아합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는 풍경,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쓰는 모습도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장면을 그림책 속에 떠올리게 되었나 봐요.



  




그럼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시계 장면이요. 어릴 때 일본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을 재밌게 보았습니다. 공상을 좋아하는 폴은 부모님께 선물 받은 인형과 함께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폴과 인형은 시간을 멈추어 문제를 해결하며 모험을 이어가는데, 저 역시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시간을 멈추고 싶은 순간이 많아요.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상한 나라 폴을 생각하며 나온 장면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게 하는 건 쉬운 일이죠." 장면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김도율 귀여워' '나무에는 미소가 있다' 같은 문장이 보여요. 어떤 문장들인가요?
제가 좋아하는 걸 썼어요. '김도율 귀여워'는 지금 고등학생인 아이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며 적었습니다. ‘나무에는 미소가 있다’는 나무를 볼 때마다 각각의 형태에서 표정이 느껴져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탕 먹고 싶다’도 있어요. 실제 사탕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사탕이라는 단어 자체가 귀여워서 가끔 닉네임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과 맛있어’도 있어요. 아오리 사과를 좋아하고요, 아침에 사과 먹는 기분도 참 좋아요.
작업을 할 때 종종 소음이 사라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을 상상하곤 해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맛있는 사과의 상큼함을 느끼고, 창밖에 보이는 초록빛 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사탕을 물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작은 감각과 상상들을 이어 이 장면을 생각했어요.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시작점, 전환점이 필요할 때 무엇을 하시나요?
작업을 하면서 전시를 자주 보러 가요. 작품 옆에 적힌 메시지를 꼼꼼히 읽는 걸 특히 좋아합니다. 또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일본 영화를 즐겨 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본 영화가 〈안경〉이에요. 〈안경〉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작은 기쁨을 보여 주어요. 저에게는 휴식 같은 영화예요.
저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특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혼자 테이블을 꾸민다던지, 작은 소품을 정리하는 등 사소한 일들이 저를 안정시키고 영감을 주거든요. 집은 저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고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작점이 필요하신 일이 있나요?
요즘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일 중 하나는 저속노화입니다. 저에게 저속노화는 시간을 붙잡는 게 아니라 삶을 관리하는 과정이에요. 매일의 습관이 쌓여서 나이 드는 속도를 바꾼다고 생각해요. 아침 햇살 속을 걷는 것, 좋은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 충분히 자고 잘 먹는 것. 그런 작은 관리들이 모여 삶을 천천히, 단단하게 빚어 준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시작을 망설이고 있는 이들에게 책에서처럼 짧은 글을 남겨 주신다면?
망설임도 좋아요. 시작은 어떤 시작이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