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낭만 복숭아』_오주영 작가
- 2025-02-12 10:35:00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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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어떤 작품인가요?
어릴 적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렸던 제 친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동화 작가로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2. 「낭만 복숭아」와 「지금은, 봄」 두 단편은 복숭앗빛 향이 폴폴 나는 작품이에요. 사랑스러운 로맨스(!)를 쓰는 작가님만의 비법이 있다면요?
제가 어릴 적 짝사랑의 달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은성이,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누구누구. 초중고만 합쳐도 12년입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길어요. 짝사랑을 뗀 연애는 대학 시절부터 했죠.
생각해 보면 진짜 설레는 순간들은 혼자 좋아할 때, 사귈락 말락 할 때, 막 사귀기 시작할 때가 최고인 것 같아요. 다들 갖고 있겠지만, 저에게도 있는 설레면서 아팠던 경험과 툭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언제 꼭 글로 담고 싶었어요. 그게 작품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던 그 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하고 과즙 터질 듯한 경험들, 설렘들이 작품이 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3. 우산을 빌려 달라는 승아에게 이찬이가 “다는 안 되고, 반쪽만 쓸래?”라고 답하는 부분은 제 마음속 최고의 명장면인데요! (볼 때마다 속으로 꺄아 소리를 지른답니다.) 작가님의 최애 장면이 궁금해요.
저도 이 장면 좋아합니다. 우산만큼 마음을 딱 보여 주는 바로미터도 없지 않나요?
우산을 쓰면 빗소리가 꼭 심장 소리처럼 둥당둥당 들려요. 그런 우산을 같이 쓰는 거죠. 우산대가 점점 내 쪽으로 기울 때, 어떨 것 같으세요? 그 애의 우산이 점점,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애의 어깨가 나와 부딪히고, 반대쪽 어깨는 방울방울 비에 젖어 물 얼룩이 집니다. 그 젖은 어깨가 꼭 나에게로 가랑가랑 젖어 드는 듯 느껴지는 그 순간. 마음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빗소리가 음악이 되고, 옆에 있는 그 애의 체온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터질 것같이 두근거리고 행복한 순간. 상상되지 않으세요? 우산은 사랑입니다.

4. 서라와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영혼 단추」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사실 아빠와 사랑, 이별, 그리움에 대한 얘기는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제가 삼십 대 초반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입원하셨고, 그날 바로 수술에 들어가시게 됐어요. 그때 화곡동에서 허겁지겁 아주대 병원으로 찾아갔어요. 아버지가 몇 시간 뒤 수술실로 들어가시는데, 너무 힘이 없으셨어요. 말도 없으시고, 표정도 없으시고, 아프다는 말도 없으시고. 아빠 손을 잡았는데 마음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 식구 모두 무뚝뚝한 편이었거든요. 그때 그 마음이 생생해요.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은데 하는 게 유난 같고, 수술 잘 끝내고 눈 뜨실 텐데 이게 뭐라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연히 깨어나실 줄 알았는데,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겨지신 뒤 한 번도 눈 뜨지 못하시고 며칠 만에 돌아가셨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상실이에요.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손을 잡았는데 차가웠어요. 딱딱하고. 돌아가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째 밖으로 나왔는데 햇살이 환했어요. 그 햇살 때문에 울었어요. 나는 여기 있고, 아버지는 여기 없구나, 아버지는 이 햇볕을 쬐지 못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제 안에서 많은 것들이 바뀐 것 같아요. 우선 불쑥불쑥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요.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릴까 봐요.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햇살이 고마워요.
두서없는데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제 곁에 머물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랫동안 제가 갖고 있던 아버지의 옷을 버리지 못했어요. 저를 사랑해 주시고 제가 사랑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동화로 써지지는 않더라고요.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버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이 단편은 언젠가는 아버지에게 꼭 동화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담고 있어요. 사랑해요, 아빠.
5. 이 작품집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해요. 뭐라 딱 자를 수 없는 관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꼭 맞는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궁금해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쁩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기보다 글을 쓰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쳐요. 가장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담기 위해서 프린트한 종이가 새까매지도록 문장을 닦아 냅니다. 그러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처음에는 날것이었던 문장들이 가장 알맞은 형태로 변화하는 것 같아요. 정말 많이 고칩니다. 꼴도 보기 싫을 만큼 고쳐요.
6. 「고요하지 않은 밤」 속 “위험하다고 스스로 날지 않는 새는 없어.”라는 문장이 마음 깊이 남았어요. 고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나의 몇몇 멋진 친구에 관한 이야기예요. 생각보다 가장 가까운, 안전한 집이 되어 주어야 할 이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 가까이에도 있었어요. 친구가 폭력을 당하는 그 자리에 제가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폭력 앞에 얼어붙어 제대로 돕지도, 당당히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잘 모르는 타인의 일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폭력을 당했고, 당하고 있었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두렵고 무서웠죠. 혼란스럽고. 그런 자신이 오랫동안 부끄러웠어요.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서 돕지 못했던 그 친구들은 스스로 멋진 사람으로 거듭났어요. 나와 다른 친구들, 주변의 다른 많은 이들의 영향이 아주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죠. 좋은 관계, 지지 안에서 우린 힘을 얻으니까요. 그런데 그 영향은 상호적이었어요. 누구도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지 않았어요. 그 친구들에게 상처가 있듯 나에게도 상처가 있었고, 그 친구들은 상처만이 아닌 다른 많은 무형의 빛나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친구들은 제게, 저는 그 친구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지지대가 되어 주었어요. 여러 굴곡이 있었지만 그 친구들은 자기 내면의 힘으로, 자신이 가진 날개로 삶을 멋지게 만들어 나갔어요. 존경스러울 만큼. 저는 그 친구들이 가슴으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위험하다고 스스로 날지 않는 새는 없다.’
나는 날 수 있고, 날겠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자기 길을 찾아 더 단단하게 바로 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아이들이 많죠. 크고 작은 폭력으로 얼룩진 아이들이 있어요. 그 고요하지 않은 밤을 견뎌야 한다는 게 현실인 아이들에게 미래를 꿈꾸는 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어려움 속에서도 별을 보고 날기를 꿈꾸는 것이, 자신을 믿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친구로서 그 곁을 지켜주고, 그 친구에게 곁을 지킴받으면서 함께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때 우리의 뿌리가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7.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면서 사람들의 말은 듣지 못하는 여행자와 지구인의 대화법이 흥미로웠어요. 둘의 계급을 보여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는데요. 「담이의 지구 수첩」의 여행자와 지구인은 어떻게 설정하게 되었나요?
언어는 말 그대로 세계의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힘 같아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영어가 대표 언어로 사용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죠. 소수 민족의 언어는 그만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가 쓰일 일은 거의 없고, 그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예요. 그 사람들과의 친선이나 교류 또는 연구 등의 목적이 있지 않은 한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체험을 한다고 할 때 그곳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는 않죠.
「담이의 지구 수첩」에서 외계의 존재에게 지구가 변방이라고 설정하니, 그들에게 지구의 말은 변방 소수 민족의 언어 정도로 여겨질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문명이 무너진, 그러나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변방의 지구 행성에, 지구인을 여행 편의를 위한 서비스 제공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광지의 현지인 정도로 생각하는 외계인들이 온다면 어떨까. 그런 외계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어요. 지구인과 소통하지 못하지만 소통할 생각도 없는 외계인의 일방적 의사 전달 방식으로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하는 방식을 만들었죠. 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몸짓과 행동 등을 보며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친밀감을 쌓아요.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지만 (그건 같은 지구인끼리도 마찬가지죠)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인류의 문명이 무너진 지구에서 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사실 근미래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설사 그런 모습으로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그런 세상에서 자란 아이에게 필요한 게 후회나 체념, 분노는 아닐 거로 생각해요.
8. 담이는 모두가 “쫄딱 망했”다고 하는 지구를 직접 보고, 걷고 싶은 아이입니다. 작가님이라면 폐허가 된 지구에서 어떤 꿈을 가질 것 같나요?
담이처럼 세상으로 나가고 싶을 것 같아요. 지구 안에서 인간의 역사는 아주 짧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문명이 탄생하고 스러졌을 겁니다. 언젠가 우리의 시대가 저물 수 있고, 아마도 저물 것이고, 또 다른 세대가 지구에서 번성하겠죠. 제가 어느 시점에 태어나 살더라도 현재의 지구를 긍정하고 그 지구 위에서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9. 「안녕」의 가온은 외면했던 따돌림당하는 반 아이를 외면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요. 비슷한 감정에 놓인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외면당했던 일도, 친구를 외면했던 일도 있습니다. 외면당했을 때 직접 떨리는 눈과 마주치기도 했고, 외면하며 다른 아이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어요. 잘못을 상자 안에 넣은 뒤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법이었죠. 저는 실수가 잦았어요. 그 실수가 좋은 약이 된 것 같아요. 여러 경험을 하며 상자를 닫아 두는 게 여는 것보다 힘들지만, 상자를 한번 열고 나면 다시 열고 용기 내는 게 훨씬 쉬워진다는 걸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웠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실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실수를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만 그게 나를 더 작고 모자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요. 실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많은 것들을 실수로 배우고, 그 배움이 제 마음을 키웠어요. 실수는 부끄럽고 되새기기 싫지만, 그 실수 덕에 상자를 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부족한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10. 「지금은, 봄」은 두나의 짝사랑만큼이나 할아버지들의 사랑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에요. 작품 속 다양한 모습의 사랑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점점 더 사랑의 온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미지근한 사랑도, 뜨거운 사랑도, 징검다리 같은 사랑도, 믿음으로 결속된 사랑도, 삐죽삐죽 못난이 같은 사랑도 다 제 모습대로 제 온도대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열두 살 두나의 입장에서는 처음 느끼는 설렘과 끊어 낼 수 없는 마음이 당황스러워요. 첫사랑이니까요. 그런데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다른 사랑을 찾으며 늙어 온 분들의 입장은 다르죠. 배우자뿐 아니라 자식과 손자와 이웃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분들이니만큼 사랑하는 방식도 가지가지일 수 있죠. 그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두나의 짝사랑과 할아버지들의 사랑을 대비하면서 아이들이 아직 겪지 못했을 여러 사랑의 형태를 보여 주며 말하고 싶었죠. 우리 모두는 어리든 늙든 각자의 시간을 살며, 서로 사랑하는 존재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