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아소가 정치에 완패했다.”

英연방정부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시위물결

“탁아소가 정치에 완패했다.”

저자는 영국의 탁아소가 ‘저변 시대’에서 ‘긴축 시대’로 바뀌면서 겪게 된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빈민 지역에 있는 탁아소를 통해 저자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꾸었던 꿈은 패배했다. 탁아소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긴축 시대에 더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푸드 뱅크’가 들어섰으니 말이다.

저변 시대란 노동당이 영국을 통치하며 사회의 ‘저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그래도 복지와 안전망을 제공하던 때를 말한다. 사회의 저변에 국가가 관심을 두고 있었다. 다양한 복지 제도가 있었다. 특히 육아와 양육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작동한 것은 국가만이 아니라 사회이기도 했다. 국가가 제공하는 것을 복지라고 한다면, 그 복지를 활용하여 연대와 상호 부조를 통해 열정적으로 사람이 움직이며 자활과 자립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사회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혜택을 받는 수혜자들이지만, 사회라는 관점에서는 더불어 같이 움직이는 주체가 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며 사회에참여하는 존엄한 존재 말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저자가 일/활동하던 탁아소가 그랬다. 이 탁아소는 전형적인 하층민들의 지역에 있다. 탁아소를 설립한 이는 ‘애니’라는 소신 있고 열정적이며 철학이 분명한 이였다. 그를 중심으로 아나키스트, 평화주의자 등이 모여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한다. 또 직접 고용되지 않았더라도 중산층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거나 부적응하여 반강제로 쫓겨난 히피 같은 사람들이 이 탁아소를 중심으로 모여 서로 협력한다.

물론 이 시대라고 해서 탁아소가 잘 굴러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저변의 아이들은 거칠고, 부모들도 거칠다. 그러나 저자는 저변 시대의 탁아소에는 활기찬 유동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갈등하고 부딪치며 성장을 도모하던 곳이다. 여러 가지 색을 그저 갖추어두는 것만으로도 좋은 교육의 씨앗이 되었다. 시키는대로 잘 따르는 천사를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신을 가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런 노력을 하려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탁아소는 ‘사회 변혁의 장’이었다.

그러나 보수당의 긴축 재정으로 복지제도가 대폭 축소된 긴축 시대, 탁아소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저변(언더 클래스)의 사람들, 즉 ‘노동하지 않는 노동 계층’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다. 노골적인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은 ‘차브’라는 경멸적 이름으로 불리며 사회를 위협하는 범죄집단 취급을 받는다. 마약에 찌들어 있고, 알코올 중독이며, 청소년 시기부터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자기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집단으로 여겨진다.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며 눈을 부릅뜨고 말할 사람들이 하층민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낸다.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긴축 시대의 불가촉천민이다. 이 시대에는 계급이 인종이 되었고, 계급에 따라 분리 정책이 실행되고 정당화된다. 내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하층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정치적으로 완벽히 ‘옳은 것’처럼 실천된다.

자기 아이를 이 위험한 존재들로부터 떼어놓고 싶은 것은 인종차별을 당하는 이주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더 위험하고 전망 없는 곳에서 이주해온 이 이민자들은 비록 지금 자신의 처지가 초라할지라도 영국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꿈을 자녀들에게 투사한다. 그런데 이 구제 불능의 하층민들이 언제 자기 자녀들을 공격하고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을 혐오하고 피한다. 슬프게도 영국 하층 백인들은 이주 노동자를 차별하고, 이주 노동자는 이들 백인 하층을 혐오한다. 여기에는 저변 시대의 탁아소가 보이던 다양성을 통한 역동성은 없다. 분열만 있고 그저 파괴적이기만 하다.

그렇다면 과연 탁아소는 졌는가?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탁아소가 문을 닫던 날 이 탁아소가 삶을 바꾸었던 이들이 모인다. 그리고 저자는 웃을 수만 있으면 아직 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이 정신승리인 것만은 아니다. 긴축 시대의 탁아소는 문을 닫기 전 비키를 변화시켰다. 전형적인 영국 하층 계급 청소년이었던 비키는 탁아소에서 그림책 낭독 자원봉사를 하며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탁아소가 비키에게 공간이 되어준 것이다. 한 사람을 존중하여 그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깨닫고 삶의 다른 가능성에 눈을 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탁아소가 정치에 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행위인 존중의 힘이다. 그리고 존중을 돌려받은 사람이 보이는 존엄의 힘이다. 존엄에 눈뜬 사람을 이길 방법은 없다. 사회에 대한 숱한 이야기는 ‘비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의 힘을 모으기 위해 존중하는 법을 서로 배우는 장이어야 한다. 이 책은 영국에서 탁아소를 배경으로 아나키스트들이 펼치는 그런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다.

 

_ 엄기호(문화연구자,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