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기 2012 l 밀알두레학교

내가 쓰는 역사 일기 대회 2012 / 단체 부문 우수상
밀알두레학교
지도교사: 김동미
 
 
 
 
민식이와 한 판 승부(세종 1445년 3월 15일)
5학년 김시찬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빠는 시장에 물건을 팔러 가셨고 엄마는 동생과 함께 수놓는 공방에 가셨다. 나는 연과 제기, 팽이 등을 가지고 민식이네 집으로 갔다. 
“야! 민식아!!! 그러자 민식이가 나왔다.”
내가 연날리기 하자고 하니까 민식이도 “아함~ 잘 잤다”며 연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강가로 갔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그 순간 나는 연을 날렸다. 민식이도 연을 날렸다. ‘날아라!! 제발’ 나는 외쳤다. 그런데 민식이는 자기가 이길 거라고 말했다. 우리 둘의 승부는 점점 세져 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승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숙제 일주일 대신 해주기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연을 날렸다. 코가 가려워 기침을 하는 순간 연을 놓쳤다. 나는 졌다. 민식이가 좋아서 웃는 순간 나는 패배에 쓴 맛을 느껴야 했다. 속으로는 민식이가 얄미웠다. 일주일동안 저 녀석의 숙제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집에 들어왔다. 피곤하다. 내일은 방학이 끝나 서당을 가야 하니까 피곤하다. 일찍 자야겠다.

훈민정음??(세종1445년 3월 17일)
 
어제 밤 아빠가 시장에서 돌아오셨다. 아빠는 시내에 붙어있는 공고문을 보셨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른 나라에는 글씨가 다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글씨가 없어 서민들은 글씨공부를 하기 힘들어서 세종왕께서 글씨인 훈민정음을 만드신다고 하신 것이다. 나는 그 훈민 뭐시기가 먹는 거든 노는 거든 상관없다. 
오늘 서당에 갔다가 글공부를 하고 쉬는 시간에 훈장님에게 훈민정음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런데 훈장님이 너도 봤냐면서 세종왕께서 아주 큰 일을 하시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훈민정음이 뭐길래 큰일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훈장님께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니가 싫어하는 글공부가 쉬워진다고 말하셨다. 
그러면 100% 좋은 일이다. 나는 애들을 불러놓고 이제 세종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들면 글공부는 끝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애들이 너도 나도 신나했다. 애들도 나처럼 글공부에 불만이 많았나보다.
 
 
 
시골 소녀 연희의 산골 일기
6학년 최재연
 
3월 
오늘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다.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셔서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신다. 동생 달구는 아직도 꿈나라에 빠져있다. 아마도 송이와 노는 꿈일 거다. 하긴, 나도 어젯밤에 철이 오빠 꿈을 꿨으니까. 7시 30분이 되자 모두가 돌쇠아저씨네 논으로 갔다. 드디어 모내기가 시작됐다. 나는 근처에서 나물을 뜯었다. 약 2시간이 지나자 달구는 풀피리를 불고 있었고, 만수는 또 무슨 잘못을 했는지 혼나고 있었다. 철이 오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글을 읽고 있었다. 나는 오빠에게 다가가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줬다. 오빠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나도 같이 웃어줬다.
 
5월 
단오날이다. 나와 여자아이들은 창포가 많은 계곡으로 갔다. 우리는 가마솥에 창포를 차곡차곡 채워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곧 창포물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나부터 머리를 감았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창포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고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 늙어서 머리숱이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우린 즐겁게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수리취떡도 먹었다. 어른들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우승 상품인 황소는 훈이네 아저씨가 가져갔다. 우리는 그네뛰기를 하러 갔다. 역시 단오날이 최고다.
 
7월
과거령이 내려졌다. 철이 오빠도 과거를 보러 갔다. 과거를 보려면 한양(서울)까지 내려가야 한다. 과거란 나라에서 관리를 뽑기 위해 시험(지금으로 말하면 면접)을 치르는 것이다. 시험에서 합격하면 나라의 관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어려워 꽤 글을 읽는 선비들도 낙방하기 일쑤라고 한다. 그래도 철이 오빠라면 당당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빠에게 떡을 줬다. “고맙다” 오빠가 말했다.
 
10월
추수를 했다. 최근에 발명된 측우기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측우기란 강수량을 재는 기구이다. 그것 덕분에 올 해는 풍년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옆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만수와 달구는 메뚜기를 잡아서 구워먹었다. 사실 나도 좀 얻어먹었다.) 우리 여자아이들은 절구로 쌀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께선 키로 겨와 껍질을 날려 보내셨다. 난 하루 종일 서 있다가 다리에 쥐가 났지만 아주 얼굴이 비칠 정도로 하얗게 된 쌀알들을 보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11월
4달 째 소식이 없었던 철이 오빠가 당당하게 급제를 해서 돌아왔다. 사실 어른들께서는 오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제까지 하고서 돌아왔으니 우리 마을에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4달 전 내가 빈 소원이 이루어졌다. 나는 소원을 또 다시 바꿨다. 오빠가 육판서를 거쳐서 정승자리까지 올라가는 소원으로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제 오빠는 충청도 지방의 수령이 되어 경상도에 있는 우리 마을을 자주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우리나라를 팔도로 나눈 것일까?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태종대왕께서 나누신 것이라고 하셨다. 또 태종대왕께서는 호패(지금의 주민등록증)를 만드셨다. 그 덕분에 2년 전에 일어났던 방화사건도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호패 덕분에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어쨌든 오빠가 탐관오리만큼은 안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