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제3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안녕하세요, 사계절출판사입니다.
총 96편이 응모된 제3회 박지리문학상은 구병모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윤경희 평론가 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을 공개합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기호 작가가 쓸 수 있는 에너지란 그 질량의 총합이 언제나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 가끔씩 그 한계치를 넘어서는 듯한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내겐 ‘박지리’의 모든 작품이 그랬다.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그의 문장에서 자주 읽혔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작은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이다. 이 작품은 SF이자 판타지적 외향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세계’이다. 이런저런 쓸데없이 너저분한 감상을 단숨에 내쳐버리고, 지금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허튼짓들과 말들을 돌처럼 바라보겠다는 태도. 돌과 같은 심정으로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그 단단하고 굳은 태도가 이 소설의 기본적인 기조이다. 이 소설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퇴장해버린 총체성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주길,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엉망이니까, 세계는 다시 재편되어야 하니까. 나는 이 작품에서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을 읽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에너지를 느꼈다.
 
구병모 이 거친 패기를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라면, 정말이지 우리가 다방면으로 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망해가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이 정도로까지 바싹 코앞에 다가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도무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않으려 들고 최소한의 의사소통 시도조차 거부하는 시대에 필요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소설을 당선작으로 동의하기를 넘어서 지지할 때 나는 가능한 한 호의적인 언급을 아끼는 편이다. 이 난감한 매력을 포착하는 즐거움이 온전히 독자분들의 손과 눈에 달려 있기를 바라서다.
 
윤경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인터뷰를 차용한 형식에 걸맞게 무수한 말들이 쏟아지며 부딪치는 작품이다. 과학기술, 산업과 금융 경제, 행정 정책 등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지식 권력의 근간에 자본주의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을 다시 인식하면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 개개인 및 집단의 도덕의식은 어떻게 조종당하고 영향받는지 수레바퀴라는 가상의 장치를 통해 모의하는 상상력의 규모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심사평
 
이 글은 나의 마지막 <박지리문학상> 심사평이니까, 개인적인 소회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3년 전 처음 <박지리문학상>이 만들어지고 심사를 부탁받았을 때,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박지리’라는 이름이 내 마음에 어떤 감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열렬한 독자 중 한 명이었고, 이제 다시 그의 신작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하고 있었다. 우울했다고 썼지만, 그것도 늘 잠깐이었다. 책장을 둘러보다가 그의 책이 보이면 짧은 한숨이 나오는 정도. 그것이 정확한 내 상태의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오래되어 점점 깊어지는 작가가 있는 반면, 한순간 폭풍우처럼 몰아치고 사라지는 작가도 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작가가 쓸 수 있는 에너지란 그 질량의 총합이 언제나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 가끔씩 그 한계치를 넘어서는 듯한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내겐 박지리의 모든 작품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 좀 슬프기도 했다.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그의 문장에서 자주 읽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박지리문학상>은 그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나만의 애도 방식이었다.

마음은 그랬지만, 1회와 2회 심사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박지리문학상>은 세 명의 심사위원이 예·본심을 모두 책임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예심 과정에서부터 곤혹스러운 순간을 자주 맞닥뜨려야만 했다. 기본기가 탄탄한 응모작들이 다수 눈에 띈 것은 여타 다른 문학상과 다를 바 없었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게 있었다. 이상하게도 낯선 감정을 자아내는 작품이 유달리 많았다. 그것은 다른 세대만의 독특한 감수성이기도 했고, 소수자의 드러나지 않은 마음이기도 했으며, 이곳의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작가가 현호정과 송섬이었다. 나는 그 두 작가의 출발을 한발 먼저 보았다는 은근한 자부를 가지고 있다. 또 지금도 변함없이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독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나는 <박지리문학상>을 통해 또 한 명의 놀랍고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작품을 누구보다 빨리 읽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올해 수상작은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은 날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연구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첫 장을 펼쳤다가 어느 대목부터인가 조용히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스탠드 불빛 각도를 조절했고, 그러다가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를 셈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야 했던 새벽의 시간들. 그 낯선 새벽의 시간을 만든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SF이자 판타지적 외향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세계’이다. 1인칭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숨겨진 주인공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맥거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계’를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소설가의 야심은 무엇인가? 이런저런 쓸데없이 너저분한 감상을 단숨에 내쳐버리고, 지금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허튼짓들과 말들을 돌처럼 바라보겠다는 태도. 돌과 같은 심정으로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그 단단하고 굳은 태도가 이 소설의 기본적인 기조이다(그래서 이 소설에서 인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역사이다). 마치 한 편의 새로운 ‘거대 서사’의 등장을 알리는 듯한 이 소설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퇴장해버린 총체성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주길,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엉망이니까, 세계는 다시 재편되어야 하니까. 나는 이 작품에서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마음’을 읽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 에너지를 느꼈다. 그 에너지를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_이기호(소설가)
 


극장에 앉아서 한 편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여 관람하는 사람들도 아직 있지만, 코로나 시대와 함께 각종 콘텐츠 플랫폼이 대형 산업이 되면서 이제는 영화를 군데군데 스킵하여 본다. 첫 장면부터 러닝타임 15분이 지날 때까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중간에 정지 버튼을 누르고 이후 다시 열람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색감이나 사운드로 시청각 자극을 보장하는 영화가 이러한 상황인데, 이미지상으론 백지 위의 검은 글자에 불과한 텍스트의 경우는 하물며 어떠할 것인가. 격변한 문화 환경 조건 속에서 꾸준히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으며 쌓아 올린 노적가리를 떼어서 매년 보내주시는 응모자 분들께,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먼저 전한다.

만약 오래 활동한 작가가 발표하는 신작이라고 한다면, 다소 납득이 되지 않거나 타성에 젖어 있더라도 그런가 보다 하고 별다른 감흥 없는 채로 마지막 장을 덮을 것 같은 구조와 완결성을 지닌 소설이, 예심에서 두 편 정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금을 걸고 여는 공모인 만큼, 그런가 보다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장점을 기대함이 인지상정이다. 변화한 시대와 대중 인식을 고려했을 때, 섣불리 발굴 대상으로 삼기가 난감한 지점들을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장점을 지닌 작품 찾기가 쉽지 않고 대체로 단점이 장점을 묻어버리는 수가 많은데, 그중 딱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앞으로의 다수 공모에서는 타인의 신체를 혐오하거나 대상화하는 도구로 삼는 단락이 두드러지는 경우, 웬만큼 혁명적인 서사나 천재적인 발상 내지 탁월한 문장이 수반되는 작품이 아니고선, 심사의 벽을 통과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감히 내다본다.

어렵게 생각할 일도 복잡하게 돌려 말할 일도 아니다. SF 분야의 공모에서는 이미 공공연하게 “섹스 로봇은 웬만하면 쓰지 마시기를”과 같은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해선 안 된다는 당위의 문제나 옳고 그름의 얘기가 아니라, 했을 때 보통은 큰 소득이나 변별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냥 개인적인 집필 발표가 아닌 공모에 응모할 때는, 일종의 소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고자 함이 아닌가. 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은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자의 욕구와 경향을 분석하여 제품을 개발한다. 문학을 하겠다는 이들은 독자의 선호도를 분석하거나 트렌드를 따라갈 필요가 없는 대신, 폐기된 구시대의 패턴을 무슨 금과옥조나 된다고 고집할 이유 또한 없지 않을까. 문학 하는 사람이 글 속에서 무언가를 고집할 때는 주로 그게 자기 필생의 대주제나 신념에 해당할 때일 것인데, 텍스트로 타인의 성을 착취하거나 인격을 훼손함을 대놓고 주요 신념으로 삼는 경우는 흔치 않을 듯하다.

당연히 욕망과 정념을 불태우는 문제는 인간사에 중요하다. 그러나 그 불에 자신을 던져 넣지 않고 타인만을 번제의 희생물로 삼아, 타인의 잿더미를 자신의 글주머니에 전리품처럼 채워 넣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고, 몇 번이든 말할 수 있다.
 

「당나귀 뒤에서」 외 2편에서는 전망 없는 시대와 절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세대의 고통이 드러났다. 고통스럽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서 충분한 고통을 보여주는 필치가 인상적이었고, 각각의 소설에서 사용한 중심 소재들과 상관물들에서 다양한 상상력이 엿보였으며, 그중에는 현시대를 반영하는 시의적절한 소재도 있었다. 분명 다양한 상상이긴 한데 독보적인 상상이라고까지 보기는 어려운 경우, 그 상상의 인물과 상황을 집중하여 계속 따라 읽고 싶게 만드는 글 자체의 힘이 더욱 중요해진다. 현재는 기초 공사가 받쳐주지 않아서 상상력의 빛이 바랜 것이 아쉽다. 아직은 표현력과 서사 전개 능력을 포함하여 글의 힘을 길러나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제의식은 엇비슷한 데가 있으나 그것을 세 편의 소설에서 서로 다른 상상을 동원하여 표현할 의욕이 있는 작가라면, 많이 쓸수록 글쓰기 솜씨는 늘 것으로 기대한다.

「게임의 이유」 외 2편은 고르게 완성도가 있고 안정적인 소설이었다. 구성과 전개에 있어 오랜 수련의 시간을 짐작게 하며, 서로 다른 연령대와 처지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보내온 것도 작가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요소였다. 특히 함께 응모한 「고엽」은 다소 통속적인 소재와 줄거리인데 비워진 행에 담긴 장면들을 상상하게 한다는 점이 좋았으며, 말하지 않고 생략된 부분들이 가장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장치가 감각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숨죽일 만큼 아름다운 장치와 생략된 서사의 조율이 특정 작가나 특정 소설을 떠올리게 하여, 한번 기시감에 사로잡히고 나자 다른 두 편에서 이에 상응할 만한 강력한 장점을 찾기 위해 재독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 끝에 내려진 결론은, 정교한 작의에 비해 속된 말로 ‘한 방’이라고 하는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하게도 소설에 반드시 ‘한 방’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고, 다른 상황에서라면 개인적으로는 결코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요소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창작 지원 상금이 수여되는 경쟁 공모라는 세속적인 현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작가는 일정 수준의 눈금을 넘어섰고, 우리의 테이블 위에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가 올라와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당선권에 가까웠으리라는 말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담백하고 무난한 정념이 받아들여질 자리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소설의 외피를 빌린 기나긴 독설에 가깝고, 문제 있는 소설인 동시에 문제적인 소설이었다. 모든 게 데이터로 표현 가능하고 우리 자신까지도 데이터로 환산되는 시대에서, 데이터로는 판독되지 않는 어떤 본질들을 ‘수레바퀴’라는 표상을 통해 드러낸다. 적절한 자리에 동원된 텍스트와 각주는 작가의 방대한 독서 이력과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누구도 결론 내리기 어려운 도덕률의 문제를 이분법적인 색과 바늘로 표시한다는 불편한 세계관을 작정하고 펼쳐놓고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정해놓은 결론을 향해 질주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이 소설이 선택한 인터뷰라는 형식과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 독법에 따라선 자칫 여러 모순적인 상황과 질문들을 그 자리에 노골적으로 펼쳐만 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와중에 각 인터뷰이들의 단언적인 태도와 그에 따른 부연 서술이 난무하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스탠스에 다소 의구심을 갖게 되는 단락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이 거친 패기를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라면, 정말이지 우리가 다방면으로 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망해가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이 정도로까지 바싹 코앞에 다가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도무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않으려 들고 최소한의 의사소통 시도조차 거부하는 시대에 필요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소설을 당선작으로 동의하기를 넘어서 지지할 때 나는 가능한 한 호의적인 언급을 아끼는 편이다. 이 난감한 매력을 포착하는 즐거움이 온전히 독자분들의 손과 눈에 달려 있기를 바라서다. _구병모(소설가)

 


작년에 이어 박지리문학상 심사를 하며 늦가을과 겨울의 감각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응모자들이 보내온 원고에는 올해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동안 집중적으로, 또는 이미 수 년 전부터 조금씩 누적한 창작의 의지가 압축되어 담겨 있었고, 독자인 나 역시 그 밀도 높은 시간과 열망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드는 것에는 무엇이든 자연을 바꾸는 요소가 조금이나마 들어 있어서, 따뜻하거나 더운, 응모자들이 생산한 지난 계절의 산물을 연말에 가까이 하니 현실의 건조한 추위가 조금은 덜 느껴졌다.

인간이 자연을 바꿀 때 그 과정과 결과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동시에 인식하면서, 또한 인간은 착각을 잘하는 동물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으면서, 무언가 창작하고 향유하는 행위가 인간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기후와 날씨에 어떻게 이롭게 쓰일 수 있을지를 이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로움의 측면에서, 우선 향유자에게 기후와 날씨 문제를 있는 그대로 더 첨예하게 느끼게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겸허함을 더 갖추게 하는 창작이 있을 수 있겠다. 또는 인간의 착각 기질을 이용하여 에너지 자원을 덜 소모하면서 혹독한 기후 조건을 견딜 만하게 하는 창작도 있을 수 있다. 연말의 문학상 심사는 후자의 창작을 즐기는 일에 해당한다. 열망, 열의, 열정. 누군가에게는 식상하겠지만, 창작하는 삶을 새로 살려는 인간에게는 분명 이러한 정념이 있고, 그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따뜻하고 뜨거운 에너지는 향유자에게도 전달되어, 우리는 창작과 향유가 조성하는 인공 기후의 환경 안에서 자연을 태워 없애는 짓을 조금은 덜 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제3회 박지리문학상 응모작은 수는 다소 줄었지만 수준은 더 고르게 높아졌다. 그 대신, 최근 문학계에서 널리 읽히거나 화제가 된 기존 작품들의 소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예년에 없이 눈에 띄었다. 이는 특히 SF 경향의 응모작들에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응모작들은 과학과 기술이 현재를 어떻게 바꾸고 있으며 미래에 지구에서의 삶과 그 너머 우주 활동이 어떠할 것인지 과학기술계의 연구에 근거하여 성찰하고 그것을 미적 허구로 재현하려 애쓰는 대신, 기성 작가들이 이미 해놓은 성찰과 상상을, 아니 상황 설정만을 그대로 제 것으로 삼는다는 데서 결격 사유가 되었다. 다른 경향으로, 글쓴이와 서술자의 경계가 거의 느껴지지 않게, 서술자가 자기가 글을 쓰고 있다거나 글을 잘 쓸 수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글쓰기의 자기반영성을 표현하는 응모작도 다수였다. 이러한 응모작들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응모자의 절실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가 무엇이며 그 이야기를 통해 글쓴이는 독자에게 어떤 세계를 새로 알게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글을 쓰고 있다는 글을 쓸 때는 글쓰기란 어떤 행위인지 성찰해야 하고 이야기해주어야 하며, 글을 잘 쓸 수 없다는 글을 쓸 때는 그 곤경과 불가능의 조건이 무엇인지 역시 성찰해야 한다. 그저 글을 쓰고 있다, 글이 안 써진다, 확인하거나 불평하는 것으로 종이 십수 장을 채우면 곤란하다.


90여 개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 셋이 각자 하나씩 본심에 올려, 「당나귀 뒤에서」 외 2편, 「젤리」 외 2편, 그리고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를 읽으며 토론했다.

「당나귀 뒤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동과 상품이 어떤 위상에 처해 있는지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의 가치가 경시되고 노동자가 노동 소득으로써 건강하고 품위 있게 먹고 입고 자면서 내일을 위한 재생산 에너지를 충전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리고 온갖 무용한 물건을 양산하면서 관심 경제의 경향에 따라 새로 가치를 덧입히며 자연 자원을 낭비하는 범속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마치 사금파리 한 쪽이라도 모으려는 듯 쿠폰, 프리미엄이 붙은 중고품, 한정판 명품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그것을 되파는 청년의 서사가 당나귀 환상의 꺼풀 아래 너무나 뼈아픈 현실감과 함께 읽혔다.

「젤리」 외 2편은 오랜 기간 동안 글쓰기를 숙련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소설의 고전적 3요소를 알맞게 설정하고 배치하고,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 사이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감정과 갈등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서술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사랑이라고, 질투라고, 혐오라고, 명확히 이름 붙여 말할 수 없는 뉘앙스를 지닌 정념의 섬세한 양상들에 주목하여, 이러한 마음의 상태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위하기도 어려워지는 모종의 금지와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한 충동의 잔존을 역시나 섬세하게 한 문장 한 문장 이어나갔다. ‘미’ 자 돌림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이름에서 앞으로도 이러한 이야기가 여러 편 이어질 수 있겠다는, 계속 글을 쓰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힘이 있는 작가일 거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인터뷰를 차용한 형식에 걸맞게 무수한 말들이 쏟아지며 부딪치는 작품이다. 과학기술, 산업과 금융 경제, 행정 정책 등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지식 권력의 근간에 자본주의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을 다시 인식하면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 개개인 및 집단의 도덕의식은 어떻게 조종당하고 영향받는지 수레바퀴라는 가상의 장치를 통해 모의하는 상상력의 규모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가상의 장치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뜬금없는 설정에 기대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논픽션을 다독하고, 그것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고, 그리하여 사실과 허구를 잘 혼합하여 세계의 현실과 미래의 가능한 한 양상을 지어내 보였다. 적과 청이라는 단순 이분법 및 적의 결과는 지옥이라는 모호한 종교적 사후 세계의 설정이 작품의 핵심이자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는 모순을,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가장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것을 다음 글쓰기에서 어떻게 돌파할지 기대한다. _윤경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