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하는 여자들』 편집 후기



『영화하는 여자들』 편집 후기
영화를 많이 보거나 잘 아는 편은 전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영화와 관련된 책을 세 권이나 만들게 되었다. 노명우 선생님의 『인생극장』을 작업하고, 그 책에 영화 포스터 이미지를 제공해주셨던 영화 자료 수집가 양해남 선생님과 『영화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책 모두에 추천사를 써주신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의 제안으로 『영화하는 여자들』이라는 책을 작업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얼굴』이 출간된 직후(2019년 2월) 양해남 선생님의 인터뷰가 잡혀 조선일보사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막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심재명 대표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보고는 ‘혹시 추천사에 무슨 문제가 있나?’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뜻밖에도 여성영화인모임이 곧 창립 20주년을 맞는데, 그 시기에 맞춰 여성 영화인들의 인터뷰집을 출간하고 싶다고 하셨다. 혹시 같이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사계절출판사에서 낼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너무 좋은 기획이고,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나 혼자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기획안이나 목차, 개요 같은 걸 보내주시면 회사에 들어가 논의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옆자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터뷰에 집중이 잘 안 될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분들이 참여하는 작업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영화 일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재미있는 일일 거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 전화 자체에 반해버렸달까.
심재명 대표님은 사장님하고도 잘 알고 지내는 분이시니 보통 이런 경우 사장님한테 전화가 가고, 위에서부터 제안이나 원고가 내려와 ‘안 할 수 없는’ 작업이 되는 게 일반적인데 실무자인 내게 전화를 해서 정중히 의사를 물어오셨다는 것 자체가 주는 작은 감동이 있었다. 직전에 추천사를 받았기 때문에 마침 내 연락처를 가지고 계셨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그조차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떤 일말의 의심을 지우지 못해 다음 날 사장님 방에 올라가서는 “사장님, 저기... 혹시 심재명 대표님께 무슨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라고 떠보듯이 질문을 했던 이 얄팍한 편집자는 이후 작업이 끝나는 순간까지 수차례 이런 ‘반함’의 순간을 맞게 된다.
심재명 대표님은 이후에도 사진과 관련한 사항은 디자이너와, 마케팅과 관련한 사항은 마케터와 직접 소통하시며 책에 필요한 구체적인 ‘실무’를 직접 챙겨주셨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글을 쓴 두 저자인 한국영상자료원 주진숙 원장님, 영화 연구자 이순진 선생님도 책에 관해서는 편집자가 전문가라는 생각으로 줄곧 편집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신뢰해주셨다. 사실 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은 부담을 가진 채 일을 시작했는데, 두 분 모두 오히려 그렇게 잘 모르는 입장에서 책에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며 편집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주신 덕분에 책이 ‘말의 모음’을 넘어 30년의 ‘역사’를 담은 충실한 텍스트로 정리될 수 있었다.
『영화하는 여자들』은 1990년대 이후 영화 현장의 각 분야에서 활약한 여성 20인을 인터뷰한 책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자주 만나는 감독과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 촬영, 조명, 미술, 편집, 마케팅, 사운드, 다큐멘터리, 영화제 프로그래밍과 저널리즘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의 여성 창작자들을 만나 그들의 일과 삶, 영화에 관한 생각들을 담았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공고한 현실에서 여성 감독의 숫자는 여전히 10퍼센트 내외를 차지할 뿐이고, 현장 스태프들의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더욱이나 주목받기 어렵기 때문에 영화 일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역사’로 기록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여성영화인모임에서는 ‘작가’로서의 남성 감독 위주로 구성되는 영화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묻고 듣고 기록하기로 했다. 세상이 안 써주면 우리가 쓴다는 생각으로. 참여한 영화인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저자(인터뷰어): 주진숙, 이순진
기획: (사)여성영화인모임
인터뷰이: 심재명(제작), 안정숙(저널리즘), 임순례(연출), 박곡지(편집), 채윤희(마케팅), 전도연(연기), 문소리(연기·연출), 강혜정(제작), 류성희(미술), 최은아(사운드), 남진아(조명·촬영), 신민경(편집), 박혜경(마케팅), 김영덕(영화제 프로그래밍), 제정주(제작), 엄혜정(촬영), 김일란(다큐멘터리), 윤가은(연출), 전고운(연출), 천우희(연기)
나 역시 이 책을 작업하기 전까지는 카메라나 조명 기기를 만지는 여성, 전쟁영화의 미술을 담당하는 여성, 영화의 사운드를 다루는 여성을 잘 떠올리지 못했다. 원고를 여러 차례 읽고, 이들이 참여한 영화의 목록을 확인하면서 레드 카펫에 서는 영화인들 이외에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키며 ‘영화’라는 꿈이자 생활이고, 예술이자 직업이기도 한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한 단체에서 기획하고,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그들의 소속사, 영화사...)이 참여하는 작업이라면 연락이 안 되는 사람, 마감이 늦는 사람, 의견이 다른 사람, 소통이 안 되는 사람 등등 예상치 못한 난관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마지막 컨펌 과정에서는 “이견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로 오케이를 해주시는 분부터 단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시는 분, 인터뷰를 통째로 수정하시는 분 등 여러 경우가 있었지만 한 분의 예외도 없이 작업 자체를 고마워하고, 늦는 것을 미안해하고, 자신이 이렇게 수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성의껏 설명해주셨다. 쉽게 말해서 편집자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수정사항이 많은 것은 심호흡 한 번 하고 하면 되는 일이니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큰 탈 없이 작업이 가능한 분들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자신의 현장을 지킬 수 있었고, 이런 책도 기획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안에 담고 있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한 분야에서 일해온 여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연대를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지난 2000년에 설립된 여성영화인모임은 1950년대에 영화 일을 시작해 1980년대 최초의 여성 영화인 모임인 ‘영희회’를 조직했던 이해윤과 이경자의 뒤를 잇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설립 이듬해 『여성영화인사전』을 통해 1950~1980년대에 등장했던 모든 여성 영화인의 이름과 활동을 밝혀 적었다. 그리고 이번 책을 통해서는 1990년대 이후 맞이한 두 번째 30년의 역사를 정리하며 ‘영화하는 여자들’의 뚜렷한 계보를 그려 보였다.
영화계에 어떤 중대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자기 일을 내려놓고 달려 나와 머리를 맞대던 여성 영화인들은 2018년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개소라는 큰 성취를 이루어낸다. 모든 산업 분야를 통틀어 처음으로 민간이 주도해 공기관과 함께 업계의 성 평등을 위해 일하는 기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심재명, 임순례 등 현역 영화인들이 자기 시간을 쪼개어 새로 공부하고 토론하고 싸워가며 각각의 사안에 대응하고 있다. 그런 끈끈한 연대가 부럽기도 했고, 나도 어느새 출판계에서 일한 지 15년이 넘었는데 과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몰려오기도 했다. 마지막에 오케이지를 확인하시던 우리 사장님도 여성 영화인들의 오랜 연대와 실질적인 성과를 보면서 여성 출판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 책이 영화 현장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한 산업 분야 안에서 여성들이 오랜 기간 이어온 단단한 연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래 사진은 영화를 많이 좋아하고 깊이 알아 작업 내내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준 우리 디자이너 홍 님께서 제공해주신 것. 편집 후기에 사진을 쓰고 싶다고 하니 컬러칩에도 없는 보라색을 내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꼭 넣어달라고 했다. 워낙 얽혀 있는 사람이 많고(게다가 영상을 다루는 사람들! 그런데 좋은 (개인) 사진이 없어!), 내가 자꾸 이런저런 의견을 물어 부담이 컸을 텐데 중심을 단단히 잡고 일을 잘 마무리해주어 고마운 마음이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