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글] 『산책을 듣는 시간』 리뷰 대회 _ 대상 수상작




산책을 보는 시간!

문복례


내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몇 년 전의 사진이지요. 나는 한평생 일만 해 왔습니다. 어릴 적에는 형제 많은 집의 큰딸 역할을 하던 터라 그랬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바삐 살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십 년 전에는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일만 하며 지내다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돈을 벌어야 사는데 일을 그만두어야 하니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그즈음 딸이 결혼하여 손주를 낳았고 일하는 딸 대신 어린 손주를 업고 산책을 다녔습니다. 엄마를 찾아 보채는 손주가 불쌍해서 포대기에 업고 산책을 다녔습
니다.

둘이었던 산책은 몇 년 후 셋이 되었습니다. 연년생 손녀가 태어나면서 저는 손자와 손녀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다녔습니다. 그러다 쓰러졌고 못 일어났습니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막았지만 그 후 병세가 더 나빠져서 지금은 집에서만 지냅니다. 조금만 걸어도 아니 조금만 서 있어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있어서 119를 타고 밤을 달려 생사를 넘나드는 밤도 여러 번 지냈습니다.

그 후로 바깥세상은 제게 그야말로 그림에 떡입니다. 아니 창밖으로 보는 모습은 그저 신이 그려 주신 멋진 풍경이며 이를 감상하는 것만이 제 몫입니다. 진통제도 하루 이틀이지 싶어서 병원에 있는 걸 포기하고 집에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삶은 병원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 집이지만 내 맘대로 걷지 못하고 내 주방이지만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먹지 못합니다. 무엇도 먹고 싶지 않고 무얼 먹어도 마치 전기가 오른 것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하여 먹지도 쉬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육십 중반 노안의 할머니라 책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한 자 한 자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불면의 밤을 무사히 버티고 아침이 오니 제게는 진통제인 셈입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는 소녀와 보지 못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저는 매일 밤 산책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숲을 걷는 것만 같았습니다. 육십 중반의 삶을 살았으니 이제 제법 인생이라는 길에는 통달했다 생각했는데 듣지 못하는 소녀와 보지 못하는 소년은 어찌 그리도 삶이라는 산책길을 제대로 걷나 싶은 생각에 읽고 또 읽으며 여러 번 그들과 산책을 떠났습니다.

책 속으로 떠나는 산책길에서 만난 글귀들은 내게 반갑습니다.

이 세상에는 귀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그건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모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특별히 안 들리는 능력이 더 있는 거니까 신비한 일이라고. 나는 축복받은 거라고. (65쪽)

언제나 진실이 낫다. 설령 그것이 아픈 진실이라도. (67쪽)

“세상에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없어.
대신에 사람마다 행복한 시기와 불행한 시기가 있는 거야.” (130쪽)


나는 내 심장에 구멍이 났다는 말이 부끄러웠습니다. 왠지 장애처럼 내 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돼서 누가 물어도 허리가 좋지 않아 못 걷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 몸 상태를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가난한 집안의 큰딸로 어릴 때부터 많이 배우지 못하고 일을 했고, 결혼하고 홀로 가장이 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주말도 없이 일을 했으니 심장에 무리가 온 건 당연한 건데 나는 왜 내 몸에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했을까요. 책으로 떠난 산책길에서 나 자신을 떠올려 보았네요. 심장이 아픈 건 오로지 나만 그런 것이고 이제는 나이 먹고 버려진 거라는 자책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아픈 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픈 심장 덕분에 누워서 이 나이에 책과 친구가 되었으니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릴 적 내 꿈은 책을 좋아하는 문학 소녀였는데 일하며 책과 멀어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심장이 아파 걸을 수 없지만 흐릿한 눈에 의지하여 다시 책과 벗하게 되었으니 오랜 꿈을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평생 나는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학업을 포기하고 일만 했던 나, 일찍 남편을 잃고 일을 업으로 살아왔던 나, 그런 나는 정말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남편과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고 아이들과 단란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병마와 싸우느라 지쳐 있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내 삶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내 인생의 언제가 가장 행복했을까요? 그건 바로 손자 손녀와 함께 동네 한 바퀴 산책하던 그 시절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는 지금 당장 산책을 떠나고 싶지만 큰 욕심이다 싶어 사진첩에서 이 사진을 찾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걸었습니다.

나는 매일 산책을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언젠가 다시 일어나 이제는 사진보다 더 많이 자라 더 잘 걸을 수 있는 손자 손녀와 다시 산책할 그날을 마음으로 기대해 봅니다. 저 사진 속 그때 그 시절에 저는 손자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좀 업어 주고 또 손녀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또 업어 주고 그랬습니다.

이제 두 아이는 제법 잘 걸을 수 있는데 저만 잘 못 걷게 되었으니 마음으로 생각으로 산책을 하며 건강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던 소녀와 보지 못하는 소년이 산책으로 삶의 희망을 찾았던 것처럼 저 또한 산책을 보는 시간을 통해 희망과 용기, 그리고 손자와 손녀에 대한 사랑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네 한 바퀴, 매일 산책을 보는 시간을 가지며 마음은 마치 동네 한 바퀴를 다 걷고 온 사람 마냥 훈훈해집니다. 아픈 내 심장에까지 그 사랑이 전해져 잠시나마 평온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