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편집자의 시대_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이승우(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45년 12월 창립한 미스즈출판사는 1900년대 초반 설립되어 이미 명성을 구가하던 이와나미출판사(岩波書店), 헤이본샤(平凡社)와 더불어 일본 인문/학술 출판의 3대 메카라 불릴 만하다. 특히 미스즈출판사는 1950년대부터 인문/사회과학 중심의 서양 번역서를 집중적으로 출판함으로써 전후 일본 정신문화에 서양 사상을 접목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책은 일본 출판의 벨 에포크 시대 한가운데서 35년 동안 편집자로 책을 만들었던 가토 게이지(可藤敬事)의 건조하지만 담담한 문체로 써내려간 회고록이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책으로 가는 문’이 곧 ‘세계로 가는 문’임을 체험한 그는, 막연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편집자’라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출판계에 입문한다. 그의 예리하고 섬세한 편집 감각으로 만들어진 목록을 보면 같은 편집자로서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중국사와 한국사 등 동아시아 역사서는 물론, 오규 소라이 전집, 버트런드 러셀 저작집, 그리고 일본 정치학계의 거장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을 비롯해 후지타 쇼조, 한나 아렌트, 카를 슈미트, 에드워드 사이드 등 사상가의 만신전에 오를 만한 인물의 책들이 수두룩하다. 더욱이 서구 일변도의 번역서가 소개되던 당시 일본에서 ‘이슬람’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선구적으로 소개한 점은 편집자가 얼마나 ‘보편 교양인’―가토 게이지 역시 편집자는 스페셜리스트라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으로서 세상물정 모든 것에 감각적인 촉수를 곧추세우고 있어야 하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초짜 편집자 시절, 그를 지금에까지 이르게 하는 데 각별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초대 사장 오비 도시토(小尾俊人)―둘의 관계는 독일 유수의 주어캄프출판사 창업자인 페터 주어캄프(Peter Suhrkamp)와 제2대 사장을 역임한 지크프리트 운젤트(Siegfried Unseld)를 연상케 한다―였다. 민주적인 편집회의의 무용론을 넘어 ‘편집장 독재론’을 옹호한 그는 미국 출판인 제이슨 엡스타인이 말한 “출판은 본래 오두막 산업(cottage industry)”을 실천해 보이기라도 하듯, 출판사 건물이 무너질 것 같다는 관할 경찰서의 연락을 받을 때까지 낡고 궁벽한 곳에 편집자들을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가토는 그 건물과 그 시절을 “책 만드는 일에 홀렸던 사람들의 꿈의 흔적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건물은 일본의 다른 출판사에서 『미스즈 출판사의 구사옥』(2016)이라는 사진집으로도 나왔는데, 흑백사진으로 꾸며진 면면을 보면 굴속 같은 편집부 풍경과 온갖 책들 속에 파묻힌 편집자들을 볼 수 있다. 출판사 명성에 비해 허름한 사옥에 놀란 기자의 질문에 오비 씨는 “책은 건물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한 저자에게 “정신은 새롭게, 건물은 낡았지만”이라고 말한 것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미스즈출판사 사람들은 ‘정신의 풍요’와 저자, 번역자들과의 ‘정신적 교류’에서 편집자로서의 삶을 만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인, 특히 편집자의 회고록이 학자들의 공식적인 문화사, 지성사 책들과 다른 특장점이 하나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면은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동양사 전공자답게 가토는 중국의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숨겨진 역사를 보여주는데, 「당신은 이 세상 사월의 하늘: 중국의 국장을 디자인한 여성」이 그러하다. 이런 장면이다. “쓰촨성의 리좡은 이른바 20세기의 제자백가라 할 수 있는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지배와 전쟁을 피해 도망가 은둔해 살던 땅으로 지금은 그들이 살던 누옥(陋屋)이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199쪽). 이 글에는 중국 당대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존 킹 페어뱅크, 조지프 니덤 등 서양 학자들과의 지적 네트워크도 들여다볼 수 있는, 즉 정사(正史)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야사(野史) 같은 정사가 묘사되어 있다. 역시 이와나미출판사 편집자 출신으로 대표를 역임했던 오쓰카 노부카즈(大塚信一)의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송태욱 옮김, 한길사, 2007)와 더불어 책장 한켠에 두고 종종 꺼내볼 수 있는 편집자 회고록이다.

작금의 출판 현실은 일본이나 우리나, 아니 전 세계적으로 ‘책의 전성시대’가 지나간 것처럼 을씨년스럽다. 그럼에도 가토 게이지 같은 편집자들이 ‘텍스트’로 세상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다. 아직도 ‘편집자의 시대’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