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리뷰 대회 _ 대상 수상작




아파도, 약해도, 못해도 괜찮아

안희제

이 책에 대해 “삶으로 쓴 글”이라는 평을 읽었다. 이에 격하게 공감한다. 올해에 읽은 모든 책들 중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장들이 살아서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나를 끌어안는다. 이 책은 제목처럼 실격당한 자‘들’을 위해 쓰였지만, 나에게는 이 책이 마치 나만을 위해 쓰인 것만 같았다. 나의 사적인 순간들을 따뜻하게 비춰 주었기 때문에.

“질병이 위기적인 다음에 만성적인 것이 될 때조차도 환자나
주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과 비교해서 환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
도 환자이다.”
- 조르주 캉길렘, 『정상과 병리』, 이광래, 한길사, 1996, 1판, 149쪽

과거 체육관에서 날아다니던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의 모습을, 나의 하이클리어와 스매싱을 보며 감탄하던 사람들의 표정을, 거기서 느끼던 내 몸의 기능에 대한 만족감을 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과거의 기능과 끝없는 성취에 대한 집착은 나의 지금의 신체를 내가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들었다. 고3 때에도 운동을 했던 나는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2014년 4월에 항문 근처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뛰지 못하게 됐다. 재수술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옮긴 큰 병원에서 7월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고, 그 이후로 나는 약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거의 가장 작은 키로 가장 예리한 각도의 스매싱을 꽂아 넣던 내 모습을 현실적으로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에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 Chris Marker, , 02:25

평상시에 나는 이러한 나의 과거를 쉽게 떠올리지 않는다. 이제는 나의 현실과 너무나도 멀어졌기 때문에.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뒷부분으로 가면서 눈물이 고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굉장히 따뜻하고 큰 품에 안긴 것 같았다. 이 글은 내 과거, 내 과거에 대한 나의 당시/지금의 감정을 끄집어냈다. 이 글은 내가 쓴 것도 아니고, 나와 ‘동일한’ 질병을 가진 사람이 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에 적혀 있는 삶의 흔적들은 나의 상흔들처럼 느껴졌다. 그 상흔들은 나의 ‘건강’하던 과거,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그리워한 순
간들을 내가 추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고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을까? 당신은 (…) 스스로를 당당하게 수용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강렬한 투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실격당한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곧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도 연결되는 것일까?” (295쪽)

“장애를 가진 내가 잘못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우리는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자신을 보듬고 돌보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종종 실패한다.” (305쪽)

최근에 나는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을 읽었다. 그 책의 저자는 만성질환의 경험을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과 이론적 토대들을 통해 질병과 장애에 대한 생각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정리했다. 만성질환자인 나에게 그 글은 나 자신을 ‘설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경험이 아주 사적이고 사소한 일이 아님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나는 그 책을 통해 나의 질병/장애를 ‘수용’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약에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약한 인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만 하면 염증이 생겨서 멈추거나 쓰러져서 혼자 움직이지도 못하는 약해 빠진 인간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면역억제제를 복용함으로써 ‘적당히 약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안 아픈, 그러니까 아프기 위해서 약해져야 하는 딜레마 속에 살며 무력함에 빠진다.

많은 장애인권 이슈에서 나는 소외를 느꼈다. 자신의 장애를 긍정하고 사회 제도와 시설을 바꾸는 게 장애인권 운동과 당사자들의 핵심적인 과제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 어디에도 일상적인 통증은 없는 것 같았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시설이 아무리 완비된다 하더라도 내 수술 부위 근처에 염증이 생길 위험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내 복통과 두통, 어지러움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에게 나의 장애는 통증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고, 장애인권 담론에 통증은 없는 것 같았다. 현상학적 관점이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모델이 가장 지배적인 것 같았다. 나의 통증은 나만의 문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작은 통증 하나하나를 긍정하는 느낌이었다. 그 통증을 사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의 긍정이 아니라, 그 통증이 존재함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일상은 경사로와 문자통역과 점자유도블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만성적인 통증들, 보조기구의 특성상 생기는 불편함들, 아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인간관계에서의 고민들까지, 그 수많은 ‘작고 사소한’ 요소들 또한 장애인들의 일상을 구성한다. 경사로와 문자통역 등은 법에 적혀 있는 것처럼 가장 기본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정당한 편의’일 뿐이다. 그 일상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해 주는 책인 것 같다. 내가 나의 고통을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책이다. 그 하나하나의 통증, 고통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의 일상이 존중될 때, 통증으로 가득한 와중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고 싶은 나의 존재 또한 긍정될 수 있다. 갑자기 아파서 약속을 취소하는 나도, 그럴까 봐 약속을 잡지 못하고 연락을 하지 못하는 나도, 나가서 아플까 봐 혹은 내일 아플까 봐 아프지 않은 날에도 나가지 못하는 나도 긍정될 수 있다.

‘부족하다’와 ‘못하다’라는 말에는 항상 ‘충분’이 전제되어 있다. 왜 무엇은 충분하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가? 왜 나는 언제나 당신의 기준에서 충분히 건강하고, 충분히 잘해야 하는가? 무엇이 충분한지는 내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우선 “못해도 돼”라는 말을 하기로 했다. 못해도 괜찮다면, 못하는 것도 충분한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자신 있게 못해도 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곁의 누군가가 아파하고 좌절할 때에 나는 그에게 한 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
대로 괜찮아요. 아파도 돼요.”

한병철이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이야기했듯, 현대의 피로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다. 나 또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는 성과주체이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몇 번이고 되새긴 후에도 아직 나의 무능을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무능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그것을 사방에 고백하다 보면 어느 날에는 기어코 나를 ‘못해도 괜찮은’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성과주의를 넘어 나를 내 세상의 기준으로 세우게 될 것이라 믿는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하니까. 누구도 나를 실격시키지 못하니까. 무언가를 실격시킬 권한은 어디에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