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고조를 찾아서


 


공상과학소설이 어때서!

 

 국립과천과학관장 이정모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옮기던 시절이 있었다. 공상(空想)이란 비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당시 SF 팬들은 Science Fiction이란 단어에 ‘공상’이란 말이 어디 있냐고 따지면서 제발 ‘과학소설’이라고 제대로 불러 달라고 호소했다. SF를 공상이라는 말로 폄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니 ‘공상’이 어때서…”라며 쭈뼛대곤 했다. 당당하지는 못했다. 내가 보기에도 후진국인 우리나라가 얼른 중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온 국민이 부지런해야 하는데 괜히 공상에 빠져서 시간이나 낭비해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상과학소설을 읽는 아이를 보면 핀잔을 주셨다. (그러면서 무협지에는 꽤나 관대하고 자기도 와룡생의 팬이라고 자랑하시던 물상 선생님 성함은 차마 밝히지 않겠다.)

좋다! 그렇다고 하자. 이젠 어떤가? 우리나라도 선진국이다. 여유가 있다. 공상 좀 실컷 해 보면 안 될까? 과학소설보다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단어가 훨씬 매력적이지 않은가. 아무튼 한국의 SF는 과학소설이라는 표현을 넘어 ‘과학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넓고 깊게 발전했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SF가 지금처럼 비중 있게 대접 받은 때는 없는 것 같다. 해외에서도 한국 SF가 책과 드라마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성공은 없다. 어딘가에서 첫발을 힘겹게 내디딘 선배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 SF에는 한낙원(1924~2007)이라는 선구자가 있다. 그는 이름 자체가 유토피아를 그리는 공상과학적이다. 되는 집안은 다르다. 후배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제정했다. 올해 여섯 번째 작품집이 나왔다. 『고조를 찾아서』가 바로 그것. 여기에는 다섯 편의 창작 동화가 실려 있다. 모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SF다. 이전에 출간된 『푸른 머리카락』, 『마지막 히치하이커』, 『세 개의 시간』, 『하늘은 무섭지 않아』, 『안녕 베타』의 전통을 품었지만 무척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이다.

표제작인 「고조를 찾아서」는 「트리퍼」로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이지은 작가의 작품이다. 여기서 고조는 고조할아버지를 뜻한다. 당연히 시간 여행을 한다. 불과 4대 위니까 80년만 앞으로 가면 된다. 목적지는 1942년 9월 2일. 뛰어난 시간여행 또는 타임슬립 작품의 특징은 시간 이동 수단이 아주 단순하다는 것. SF랍시고 시간여행에 온갖 과학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는 그냥 ‘시간 텐트’라는 튜브 속에서 시간 여행을 한다. 어떻게 여행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는 당연히 궁금하다. 주인공이 만난 고조할아버지는 얼마나 멋진 분일까? 아뿔싸! 고조할아버지는 친일파다. 어린이, 청소년 독자들은 우리가 자랑스러운 분이라고 여겼던 조상이 알고 보니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SF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의 대칭성을 이용해 미래로 간다. 거기서는 주인공이 이미 고조할아버지다. 물론 자랑스러운 존재다. 이지은 작가는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며 미래는 현재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E. H. 카의 역사관을 유쾌하게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 슬픈 이야기를 명랑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책에는 이지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아마마」도 함께 실려 있다.

이필원 작가의 「구름 사이로 비치는」에서 독자들은 ‘붉은날개사슴’이라는 외계 생명체를 통해서 실험동물과 연구윤리 문제와 맞닥뜨리고, 이지아 작가의 「우주의 우편배달부 지모도」에서는 손편지라는 아날로그 감성과 함께 태양계에서 지구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은정 작가의 「시험은 어려워」에서는 가상현실과 직면한다.

이런 점에서 『고조를 찾아서』에 실린 다섯 작품 모두 SF는 과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문학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며, 최근 발전하는 한국 SF의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시간 여행을 하고 우주여행을 하고 외계인을 만나고 가상현실을 헤매는 동안 낯선 나를 만날 수 있다. 완벽한 문학으로. 한국 SF는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