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 2025-01-06 15:00:00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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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계절출판사입니다.
총 129편이 응모된 제5회 박지리문학상은 김성중 소설가, 강지희 평론가, 한정현 소설가 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을 공개합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올해 박지리 문학상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이 문장은 방금까지 써온 긴 단락을 지우고 다시 시작한 서두이다. 나의 경우, 2회에 심사에 참여하고 응모작을 다시 만나 읽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시작하는 심사평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삼 년 만에 만난 응모작의 수준은 월등히 상승한 터였다! 수준 이하 작품의 빈도수가 줄어든 자리에는 고르게 역량이 올라간 원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선작들의 수준이 지망생에게 일종의 메시지가 된 것이 아닐까?
다만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올라간 것에 비해 개성 있고 참신한 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아주 못 쓴 작품도 드물고, 아주 빼어난 작품도 드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근래에 심사에 참여하는 곳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상상력이 비슷할 리 없으니 이른바 ‘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척도가 비슷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뭔가를 의식하고 엇비슷하게 잘 쓴 작품들이 나오는 것일까? 미래 작가들에게 좀 더 자신의 힘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다. 힘과 용기, 과감함은 소재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믿고 추진하는데 있다. 동시대 한국문학 작가와 독자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말고 나만의 방식을 파고드는 투지가 필요하다.
본심에 올라온 세 작품은 각각의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은 이야기를 활달하게 만들고 상승하는 힘이 컸다. 도입부를 읽을 때만 해도 뻔한 장르물이 될 거라는 예상에 시큰둥했는데, 서사에 가속페달이 밟히자 흡인력이 대단하여 빨려들게 만든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작가가 주제를 감당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은 삼인용 세계, 세상이 끝나버리기를 욕망하는 세 사람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세 사람이 스스로의 고통을 재해석하고 종말을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내적 성장이 핵심 동력이 될 터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성장보다 설정에 기대어 줄거리가 전개된 감이 적지 않다. 인물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계인데, 욕망의 내부로 들어가기보다 상황들만 강조되니 이야기의 매력이 휘발되어버린다.
<가장 빨간 날개>는 흥미로운 사건이 부비트랩처럼 터져나간다. 낡은 오 층 아파트 빈집에 숨겨진 현금 뭉치 2억을 둘러싼 인물들이 연결망을 이루며 일종의 점묘화를 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하나같이 부서진 삶을 살고 있으며, 사연들은 구체적이나 동일하게 칙칙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발랄하게 읽히는데 초점화자인 유진과 미료의 핑퐁 같은 대화, 현금 다발을 둘러싸고 잠깐 부풀어 오르는 희망 같은 밝은 기운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재독할수록 신선도가 떨어졌다. 서술 일변도의 문장은 리듬이 일정하여,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게 느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잘 썼지만 익숙한 방식으로 잘 썼다는 것이다. 유진과 미료의 관계나 아파트 주민 각자의 사연, 그것이 부딪치거나 맞물릴 때 자아내는 정서가 어딘가 익숙했다.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핍진성, 크게 나아지지 않으나 약간은 밝아진 엔딩, 이 모든 것에서 새로움과 날카로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이 작가가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재능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상에 나와 있는 검증된 서사물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연장을 충분히 잘 다루니 날고기를 뜯어도 되는 사냥꾼이다. 언젠가 그가 자기만의 사냥에 성공하기를 빈다.
<운 좋은 미래>는 앞선 두 편에 비해 장점이 선명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상상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에 닿아 있으면서도 재현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근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신뢰감이 들었다. 조연 하나하나가 각자의 인생과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인물을 도구로 다루지 않았을 뿐더러, 그 장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곳이라 제 발로 들어와 생을 마무리하려는 둘째 딸의 에피소드는 요양병원이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스위트 홈’으로 변경되는 느낌을 자아내며 짙은 페이소스를 발휘한다. 주제에 접근하는 용기도 대단했다. ‘안락사가 과연 좋은 죽음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 무거운 주제에 차근차근 도전하는 점도 높이 사고 싶다. 현재 논의되는 수준에서 한층 과감하고 진보적인 접근법으로 독자를 이끈다는 점에서 시대에 필요한 서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지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결말을 맺는 방식에 있었다.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누구에게 좋은 죽음인가? 사람은 쓸모가 아니라 삶을 누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전달하던 서사는 엔딩에 가서 그 날카로움이 휘어진다. 인구수가 줄어들어 안락사 자체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선택과 그것을 거부한 딸의 선택은 갈등 없이 봉합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결말부에 소설 전반의 문제의식을 뭉개는 설정이 등장했을 뿐더러 가장 첨예한 갈등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서사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리던 충실함으로 모녀의 고뇌를 충분히 다루었어야 한다. 치열한 내적갈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엄마의 유서를 놓아둠으로써 감정적으로 높이 고양되지만, 지금까지 추구해온 방향에는 어긋나는 결말이 되고 말았다.
소설은 재판관이 아니고 모범답안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인물을 입고 세계의 내부로 들어가 몸과 마음으로 문제를 겪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갈등의 세계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마지막 갈등을 겪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적 해결을 했다. 해결 대신 갈등을 파고들었다면 이보다 매끈하지 않더라도 지지했을 텐데 말이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올해의 응모작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은 이 작품이며, 그럼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심사위원들은 ‘당선작 없음’이라는 선택을 했다.
한편으로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이미 이룬 성취가 분명하여 그 분투에 걸맞은 형태로 세상과 만나야 한다고. 올해 당선작이 되지 못하더라도 소설이 할 수 있는 모든 추격을 남김없이 한 끝에 세상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작가의 건투를 빌고 싶다. 투고해주신 모든 응모자들에게도. 이상은 드높고 손끝이 미치지 못하기는 기성작가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 소설의 이데아를 품고 있으니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다음으로 나아가자. 더 낫게 실패하자.
최근에 어떤 심사 후 소회를 나누는 자리에서 빠르게 작품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로 ‘인물 간의 대화’를 꼽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어쩌면 사소한 요소처럼 보일 수도 있을 큰따옴표 안의 말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다. 인물에 대해 직업, 성격, 취미 등 상세한 설정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지의 문제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 대신 말하고 있는 종이 인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도에 미세하게 저항하며 다른 전류를 내뿜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지에 가깝다. 그럴 때 그 존재에 입체감이 생겨나고, 인물 간의 대화는 팽팽해진다. 작가가 만들었으나 그가 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생동하는 힘이 느껴질 때, 독자는 비로소 그 세계의 두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살펴보게 되는 것 같다.
심사를 하며 작년에 비해 단편들을 묶어낸 응모작들이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 편이 연작으로서 기획되거나, 유사한 문제의식이나 세계관 속에서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드물었다. 고심 끝에 본심에 올린 작품은 <그들이 가지 않은 해변들>이었다. 일정 이상의 서사적 밀도를 유지하면서도 가독성 있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세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제시하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세 인물을 축으로 진행된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라는 명제와 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세계 연못의 연꽃 세 송이와 같은 설정들은 마치 판타지 같은 장르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초현실적 장치들에 기대 가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묻는 쪽에 가깝다. 이 세계가 정말 살만한 세계인가, 혹은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세 인물의 사건들 중 일부는 아직 충분히 가공되지 않은 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허구와 현실이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이의 세계와 가닿고 변화시켜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가의 믿음이 이후의 작품에서 더 의미 있는 형태로 제시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가장 빨간 날개>는 낡은 저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그 속에 상주하는 인물 군상을 특별한 온기로 그리는 소설이다. 이를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에서 2억이라는 맥거핀과 같은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보여주듯 인물들은 끈끈함으로 묶이기보다 느슨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렇게 모여 있기에 생겨나는 따뜻함으로 어떻게든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삶을 부드럽게 낙관하는 데 이른다. 그런데 삶의 고단함이 극복되는 전환에 있어 그 지렛대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낙관이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관례적으로 익숙한 순간에 손쉽게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넘어서려면 조금은 더 맥락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운 좋은 미래>는 처음 읽었을 때 앞부분에서 어쩌면 이 소설이 당선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인물을 등장시키는 데 있어 군더더기 설명 없이 그 매력을 보여주는 능숙함이나 작은 반전의 묘미들, 치밀한 현장 조사나 경험을 동반한 듯 요양병원을 그리는 핍진성이 단연 발군이었다. 안락사 서비스라든가 케어를 담당하는 전문 로봇이 등장하며 생겨나는 여러 사건들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이 근시일에 전면으로 맞닥뜨릴 미래처럼 보였다. 치매를 비롯해 노년에 벌어지는 여러 변화와 질병의 문제를 치유의 틀을 통해 보기보다 스펙트럼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소설의 성숙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걸쳐 비용을 따지는 효율성의 반대편에 특정 인물을 두며 휴머니즘적 애상을 부여하는 방식은 다소 난감한 결말에 이른 듯 보였다. 안락사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녀의 갈등은 인물들의 욕망과 분열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최종적 결론에 가닿기보다, 사실상 결정권을 가진 셈인 딸의 욕망과 부합하는 제도가 우연히 건재함으로써 봉합된다. 그 뒤에 자리한 어머니의 편지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목소리로 남아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명제는 정말 시대를 초월해 타당한 것일까. 기후 위기나 챗 GPT와 같은 AI의 대두를 비롯해 인간의 절대적 가치에 여러 의문점을 제기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는 가운데, 이 소설은 이런 까다로운 문제들에 밀착하면서도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옳다고 생각해온 결론을 향해 돌진해버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더 선명한 결론을 다시 쓰기보다 지금까지 해온 질문 위에 한층 더 모호한 질문을 더함으로써 매력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제5회 박지리문학상은 결국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이 상에 대한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본심작에 오른 세 소설을 읽는 시간은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고, 이 작품들을 써낸 작가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총 세 작품이었다. <운 좋은 미래> <가장 빨간 날개>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 이렇게 세 작품으로, 모두 고른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담고 있는 내용과 방향성은 상이했다.
우선 <가장 빨간 날개>의 경우 재개발이 멈춘 지역의 오 층짜리 옥원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같은 건물에 살아도 모두 다른 사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일단 재미있었다. ‘모두가 다 아는 일상 이야기’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모두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장 빨간 날개>에서 유일하게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일이 유진과 미료라는 청소년들을 통해 전개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만 소설의 결말이 다소 급진적인 낙관으로 읽히는 지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의 필력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흡입력 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의 경우 타임리프라는 소재 자체는 신선하거나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들인 태경과 세정, 열무가 가지고 있는 다소 채도 낮고 농도 깊은 사연들은 타임리프라는 것 자체에 대한 숙고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어떤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과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안타까움과 동시에 어떤 사유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정확히 이 소설에 대한 아쉬움으로도 남겨졌는데, 중심인물들의 사연이 피해자의 입장에 집중되어 있다는 지점이다. 윤리적 물음을 할 수 있는 동시에 그 물음 외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겨졌다. 그러나 역시 이런 아쉬움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나는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 윤리적 물음의 작동 방식이 몹시 흥미로웠다. 일단 소설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에 뒷장을 궁금하게 하는 것은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랜 논의의 대상이었던 <운 좋은 미래>는 최근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인 ‘안락사’에 관한 소설이었다. 안락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소설 속 현재에서 근미래, 다시 안락사를 선택의 문제로 옮겨놓는 이 소설은 요양병원이라는 죽음이 필연적으로 닿아 있는 공간에서 이 당연한 죽음에 당도하는 사람들이 실은 모두 다양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음을 과장 없이, 그러나 공들여 보여준다. 주인공이 요양병원의 수간호사라는 설정 또한 이들의 죽음에 가장 근거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소설 속 리얼리티에 자연스러움을 더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역시 안락사라는 주제가 주는 무게감이었던 것 같다. 말미에 주인공의 선택과 주인공의 딸의 선택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조금 더 치열한 사유가 펼쳐졌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또한 이 소설이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특히 읽는 내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장면이 여럿 있었기에 이 소설이 조금 더 이 주제에 대해 나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쉽게도 올해는 수상작을 쉽게 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세 소설의 작가들을 곧 지면에서, 출간된 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총 129편이 응모된 제5회 박지리문학상은 김성중 소설가, 강지희 평론가, 한정현 소설가 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을 공개합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올해 박지리 문학상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이 문장은 방금까지 써온 긴 단락을 지우고 다시 시작한 서두이다. 나의 경우, 2회에 심사에 참여하고 응모작을 다시 만나 읽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시작하는 심사평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삼 년 만에 만난 응모작의 수준은 월등히 상승한 터였다! 수준 이하 작품의 빈도수가 줄어든 자리에는 고르게 역량이 올라간 원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선작들의 수준이 지망생에게 일종의 메시지가 된 것이 아닐까?
다만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올라간 것에 비해 개성 있고 참신한 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아주 못 쓴 작품도 드물고, 아주 빼어난 작품도 드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근래에 심사에 참여하는 곳마다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상상력이 비슷할 리 없으니 이른바 ‘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척도가 비슷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뭔가를 의식하고 엇비슷하게 잘 쓴 작품들이 나오는 것일까? 미래 작가들에게 좀 더 자신의 힘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다. 힘과 용기, 과감함은 소재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믿고 추진하는데 있다. 동시대 한국문학 작가와 독자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말고 나만의 방식을 파고드는 투지가 필요하다.
본심에 올라온 세 작품은 각각의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은 이야기를 활달하게 만들고 상승하는 힘이 컸다. 도입부를 읽을 때만 해도 뻔한 장르물이 될 거라는 예상에 시큰둥했는데, 서사에 가속페달이 밟히자 흡인력이 대단하여 빨려들게 만든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작가가 주제를 감당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은 삼인용 세계, 세상이 끝나버리기를 욕망하는 세 사람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세 사람이 스스로의 고통을 재해석하고 종말을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내적 성장이 핵심 동력이 될 터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성장보다 설정에 기대어 줄거리가 전개된 감이 적지 않다. 인물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계인데, 욕망의 내부로 들어가기보다 상황들만 강조되니 이야기의 매력이 휘발되어버린다.
<가장 빨간 날개>는 흥미로운 사건이 부비트랩처럼 터져나간다. 낡은 오 층 아파트 빈집에 숨겨진 현금 뭉치 2억을 둘러싼 인물들이 연결망을 이루며 일종의 점묘화를 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하나같이 부서진 삶을 살고 있으며, 사연들은 구체적이나 동일하게 칙칙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발랄하게 읽히는데 초점화자인 유진과 미료의 핑퐁 같은 대화, 현금 다발을 둘러싸고 잠깐 부풀어 오르는 희망 같은 밝은 기운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재독할수록 신선도가 떨어졌다. 서술 일변도의 문장은 리듬이 일정하여,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게 느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잘 썼지만 익숙한 방식으로 잘 썼다는 것이다. 유진과 미료의 관계나 아파트 주민 각자의 사연, 그것이 부딪치거나 맞물릴 때 자아내는 정서가 어딘가 익숙했다.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핍진성, 크게 나아지지 않으나 약간은 밝아진 엔딩, 이 모든 것에서 새로움과 날카로움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이 작가가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재능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상에 나와 있는 검증된 서사물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연장을 충분히 잘 다루니 날고기를 뜯어도 되는 사냥꾼이다. 언젠가 그가 자기만의 사냥에 성공하기를 빈다.
<운 좋은 미래>는 앞선 두 편에 비해 장점이 선명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상상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에 닿아 있으면서도 재현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근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신뢰감이 들었다. 조연 하나하나가 각자의 인생과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인물을 도구로 다루지 않았을 뿐더러, 그 장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곳이라 제 발로 들어와 생을 마무리하려는 둘째 딸의 에피소드는 요양병원이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스위트 홈’으로 변경되는 느낌을 자아내며 짙은 페이소스를 발휘한다. 주제에 접근하는 용기도 대단했다. ‘안락사가 과연 좋은 죽음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 무거운 주제에 차근차근 도전하는 점도 높이 사고 싶다. 현재 논의되는 수준에서 한층 과감하고 진보적인 접근법으로 독자를 이끈다는 점에서 시대에 필요한 서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지지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결말을 맺는 방식에 있었다.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누구에게 좋은 죽음인가? 사람은 쓸모가 아니라 삶을 누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전달하던 서사는 엔딩에 가서 그 날카로움이 휘어진다. 인구수가 줄어들어 안락사 자체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선택과 그것을 거부한 딸의 선택은 갈등 없이 봉합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결말부에 소설 전반의 문제의식을 뭉개는 설정이 등장했을 뿐더러 가장 첨예한 갈등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서사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리던 충실함으로 모녀의 고뇌를 충분히 다루었어야 한다. 치열한 내적갈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엄마의 유서를 놓아둠으로써 감정적으로 높이 고양되지만, 지금까지 추구해온 방향에는 어긋나는 결말이 되고 말았다.
소설은 재판관이 아니고 모범답안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인물을 입고 세계의 내부로 들어가 몸과 마음으로 문제를 겪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갈등의 세계라고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마지막 갈등을 겪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적 해결을 했다. 해결 대신 갈등을 파고들었다면 이보다 매끈하지 않더라도 지지했을 텐데 말이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올해의 응모작 가운데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은 이 작품이며, 그럼에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심사위원들은 ‘당선작 없음’이라는 선택을 했다.
한편으로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이미 이룬 성취가 분명하여 그 분투에 걸맞은 형태로 세상과 만나야 한다고. 올해 당선작이 되지 못하더라도 소설이 할 수 있는 모든 추격을 남김없이 한 끝에 세상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작가의 건투를 빌고 싶다. 투고해주신 모든 응모자들에게도. 이상은 드높고 손끝이 미치지 못하기는 기성작가인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 소설의 이데아를 품고 있으니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다음으로 나아가자. 더 낫게 실패하자.
-김성중(소설가)
최근에 어떤 심사 후 소회를 나누는 자리에서 빠르게 작품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로 ‘인물 간의 대화’를 꼽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어쩌면 사소한 요소처럼 보일 수도 있을 큰따옴표 안의 말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달한다. 인물에 대해 직업, 성격, 취미 등 상세한 설정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지의 문제는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 대신 말하고 있는 종이 인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도에 미세하게 저항하며 다른 전류를 내뿜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지에 가깝다. 그럴 때 그 존재에 입체감이 생겨나고, 인물 간의 대화는 팽팽해진다. 작가가 만들었으나 그가 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생동하는 힘이 느껴질 때, 독자는 비로소 그 세계의 두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 작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쳐냈는지 살펴보게 되는 것 같다.
심사를 하며 작년에 비해 단편들을 묶어낸 응모작들이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세 편이 연작으로서 기획되거나, 유사한 문제의식이나 세계관 속에서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드물었다. 고심 끝에 본심에 올린 작품은 <그들이 가지 않은 해변들>이었다. 일정 이상의 서사적 밀도를 유지하면서도 가독성 있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세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제시하며 시작되는 이 작품은 세 인물을 축으로 진행된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라는 명제와 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세계 연못의 연꽃 세 송이와 같은 설정들은 마치 판타지 같은 장르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초현실적 장치들에 기대 가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묻는 쪽에 가깝다. 이 세계가 정말 살만한 세계인가, 혹은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세 인물의 사건들 중 일부는 아직 충분히 가공되지 않은 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허구와 현실이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이의 세계와 가닿고 변화시켜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가의 믿음이 이후의 작품에서 더 의미 있는 형태로 제시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가장 빨간 날개>는 낡은 저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그 속에 상주하는 인물 군상을 특별한 온기로 그리는 소설이다. 이를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에서 2억이라는 맥거핀과 같은 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보여주듯 인물들은 끈끈함으로 묶이기보다 느슨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렇게 모여 있기에 생겨나는 따뜻함으로 어떻게든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삶을 부드럽게 낙관하는 데 이른다. 그런데 삶의 고단함이 극복되는 전환에 있어 그 지렛대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작가가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낙관이 소설의 진행 과정에서 관례적으로 익숙한 순간에 손쉽게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의구심을 넘어서려면 조금은 더 맥락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운 좋은 미래>는 처음 읽었을 때 앞부분에서 어쩌면 이 소설이 당선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소설이었다. 인물을 등장시키는 데 있어 군더더기 설명 없이 그 매력을 보여주는 능숙함이나 작은 반전의 묘미들, 치밀한 현장 조사나 경험을 동반한 듯 요양병원을 그리는 핍진성이 단연 발군이었다. 안락사 서비스라든가 케어를 담당하는 전문 로봇이 등장하며 생겨나는 여러 사건들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이 근시일에 전면으로 맞닥뜨릴 미래처럼 보였다. 치매를 비롯해 노년에 벌어지는 여러 변화와 질병의 문제를 치유의 틀을 통해 보기보다 스펙트럼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소설의 성숙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걸쳐 비용을 따지는 효율성의 반대편에 특정 인물을 두며 휴머니즘적 애상을 부여하는 방식은 다소 난감한 결말에 이른 듯 보였다. 안락사라는 문제를 둘러싼 모녀의 갈등은 인물들의 욕망과 분열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최종적 결론에 가닿기보다, 사실상 결정권을 가진 셈인 딸의 욕망과 부합하는 제도가 우연히 건재함으로써 봉합된다. 그 뒤에 자리한 어머니의 편지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목소리로 남아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명제는 정말 시대를 초월해 타당한 것일까. 기후 위기나 챗 GPT와 같은 AI의 대두를 비롯해 인간의 절대적 가치에 여러 의문점을 제기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는 가운데, 이 소설은 이런 까다로운 문제들에 밀착하면서도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옳다고 생각해온 결론을 향해 돌진해버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더 선명한 결론을 다시 쓰기보다 지금까지 해온 질문 위에 한층 더 모호한 질문을 더함으로써 매력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제5회 박지리문학상은 결국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이 상에 대한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본심작에 오른 세 소설을 읽는 시간은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고, 이 작품들을 써낸 작가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강지희(평론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총 세 작품이었다. <운 좋은 미래> <가장 빨간 날개>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 이렇게 세 작품으로, 모두 고른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담고 있는 내용과 방향성은 상이했다.
우선 <가장 빨간 날개>의 경우 재개발이 멈춘 지역의 오 층짜리 옥원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같은 건물에 살아도 모두 다른 사정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일단 재미있었다. ‘모두가 다 아는 일상 이야기’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모두가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장 빨간 날개>에서 유일하게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일이 유진과 미료라는 청소년들을 통해 전개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만 소설의 결말이 다소 급진적인 낙관으로 읽히는 지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의 필력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흡입력 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그들이 가지 않는 해변들>의 경우 타임리프라는 소재 자체는 신선하거나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들인 태경과 세정, 열무가 가지고 있는 다소 채도 낮고 농도 깊은 사연들은 타임리프라는 것 자체에 대한 숙고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어떤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과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안타까움과 동시에 어떤 사유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정확히 이 소설에 대한 아쉬움으로도 남겨졌는데, 중심인물들의 사연이 피해자의 입장에 집중되어 있다는 지점이다. 윤리적 물음을 할 수 있는 동시에 그 물음 외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겨졌다. 그러나 역시 이런 아쉬움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나는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 윤리적 물음의 작동 방식이 몹시 흥미로웠다. 일단 소설은 재밌어야 하기 때문에 뒷장을 궁금하게 하는 것은 큰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랜 논의의 대상이었던 <운 좋은 미래>는 최근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인 ‘안락사’에 관한 소설이었다. 안락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소설 속 현재에서 근미래, 다시 안락사를 선택의 문제로 옮겨놓는 이 소설은 요양병원이라는 죽음이 필연적으로 닿아 있는 공간에서 이 당연한 죽음에 당도하는 사람들이 실은 모두 다양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음을 과장 없이, 그러나 공들여 보여준다. 주인공이 요양병원의 수간호사라는 설정 또한 이들의 죽음에 가장 근거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소설 속 리얼리티에 자연스러움을 더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역시 안락사라는 주제가 주는 무게감이었던 것 같다. 말미에 주인공의 선택과 주인공의 딸의 선택이 교차하는 부분에서 조금 더 치열한 사유가 펼쳐졌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또한 이 소설이 갖는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특히 읽는 내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장면이 여럿 있었기에 이 소설이 조금 더 이 주제에 대해 나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쉽게도 올해는 수상작을 쉽게 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세 소설의 작가들을 곧 지면에서, 출간된 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한정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