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부는 바람』 휘리 작가 인터뷰

『천천히 부는 바람』
2025 인터뷰 : 휘리 편


“제가 체험한 바람, 풍경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고 네모난 종이 바깥의 세상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2016년에 출간한 독립출판물을 9년 만에 다시 작업해서 내셨는데요. 좋은 점과 아쉬운 점 하나씩 말해 본다면?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생각과 그림이 달라졌다는 건 좋은 점이자 아쉬운 점이에요. 그림은 늘었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까지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좋은 점. 하지만 어떤 그림은 다시 못 그린다는 게 아쉬운 점입니다. 시기마다 할 수 있는 작업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어요.  ‘무언가를 그려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지 않으면 그 생각도, 마음도 사라져 버린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수채 물감과 연필을 자주 쓰시는데 두 재료를 대하는 마음이 다를 것 같아요.
 
수채 물감은 제 작업에서 기본이 되는 재료입니다. 가장 익숙하고, 표현법이 다양해서 좋아요. 한번 칠하면 되돌아갈 수 없다는 특성에서 나오는 신중함, 혹은 실수를 보완하면서 생기는 우연성도 좋고요. 그에 반해 연필은 가장 쉽고 빠르게 그리기를 시작할 수 있는 재료예요.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대상을 빠르게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 순간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연필의 강점이 있고요.
실은 연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쓰게 된 계기가 있는데, 2016년 『천천히 부는 바람』을 작업하기 직전이었어요. 당시 살던 집이 아주 시원해서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그해에 엄청난 더위가 지속되었고, 더 이상 집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근처 카페에 가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고, 재료의 단순화가 필요해서 연필을 적극적으로 쓰게 되었어요. 그 시점을 계기로 연필의 강점을 더 잘 알게 되어 즐겨 쓰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의 풍경 중 작가님의 경험이 담긴 장면이 있을까요?
 
흐릿한 기억에 남아 있는 경험, 평소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해 온 관찰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정확히 ‘이 일이 있었다.’라고 말하긴 어렵지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제가 그 안에 등장하는, 혹은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그리곤 해요.

일상생활이나 여행을 다닐 때나 드로잉을 하시죠? 요즘 가장 많이 그리는 대상은?
 
요즘은 나무와 사람, 그리고 개를 자주 그려요. 생각해 보면 모두 스스로 혹은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는 대상들이지요. 저는 (아주 미세할지라도)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것을 볼 때 눈을 떼고 싶지 않아요. 또 그리고 싶어져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자기소개 문장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어요. “살아있는 것의 힘, 그 빛깔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목이 곧 책 전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목을 처음 지었던 때를 떠올린다면?
 
제목은 떠오르는 직관에 따라 빠르게 짓는 편이에요. 『천천히 부는 바람』도 그랬고요. 다만 느슨하게나마 제 안에서 기준은 세우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로 이해되는 서사가 있으면 한 번 더 생각하게 짓는 편이고, 『천천히 부는 바람』처럼 서사가 숨겨진 책은 제목이 쉬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은 ‘천천히 부는 바람’에 관한 책이에요.”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주제를 명확히 알리고, 책을 열었을 때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쪽을 택한 제목이에요.

바람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을까요?
 
이 책을 열었을 때 독자가 바람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림을 보았을 때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바람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해 봤는데, 결론은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토대여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독립출판물 작업할 때 그린 그림은 직접 본 장면보다 간접적으로 얻은 이미지가 많았어요. 남에게서 얻은 이미지 자료는 잘 찍혀 있어서 그리기에 편하고 정확도도 높지만, 체험과 감각은 빠져 있지요. 반대로 직접 본 것은 주변 상황이 변하는 탓에 정확도가 낮지만, 시야가 넓고 감각은 더 풍부하게 남아요. 그래서 이번에 작업할 때는 체험한 바람, 풍경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고, 직접 관찰한 넓은 시야를 기본으로 네모난 종이 바깥의 세상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이 그린 그림에는 놀이터와 아이들이 자주 나와요.
 
저는 아이가 가진 '몸의 자유'를 좋아해요. 성인이 하는 몸짓과 표정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의미를 갖게 되지만, 어린이의 몸은 사람들의 판단에서 자유롭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 데서나 잠이 들거나, 길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뜬금없이 춤을 추어도 아이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지요. 인간에게 자기 존재 그대로 이해받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고 귀해요. 저는 제 그림에 등장하는 ‘어린이’ 모습을 한 존재를 볼 때 어떤 판단이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잘생겼다거나, 체형이 어떠하다거나, 예쁜 옷을 입었다거나… 그림 속에 나오는 아이들은 때로 여아인지 남아인지, 기쁜지 어떤지도 구분이 안 되게 그릴 때도 많지요. 그 누구도 아니면서, 누구든 될 수 있는 존재. 기쁠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는 마음. 외형에 관한 판단을 배제하고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존재로 그려 내고 싶어요.



독립출판물을 펴내는 아티스트,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여러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하시는데요. 어떤 일이 가장 즐겁나요?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꾀하고 있지만, 저의 원형은 ‘화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전히 그림 자체로 무언가를 경험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그러다가 그림 한 장을 여러 장으로 나누고 싶거나, 더 넓고 다양한 대상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면 그림책을 만들어요.
꾸준히 하는 ‘독립출판물’ 작업은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가장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즐거워요. 책을 제작하고 배포하기까지 여러 단계가 있는데 그 모든 걸 혼자 잘할 수는 없기에 완벽하게 만들기 어렵다는 게 아쉬운 점이긴 해요. 그에 반해,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때 출판사를 통해 ‘그림책’을 만들거나 ‘삽화가’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각자 맡은 분야를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할 때 오는 새로운 시각들이 좋고, 또 소중해서 오래 하고 싶은 일입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면을 꼽는다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유난히 초록빛이 많이 도는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발목까지 잠긴 얕은 물에서, 손에 있는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는 모자 쓴 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에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거나, 물이 일렁이거나, 모닥불이 탈 때 눈을 떼지 못한 경험이 누구나 있지요. 저는 그런 경험들이 갈수록 적어지는 걸 절감해서, 그 순간이 오면 최대한 길게 체험하려고 노력해요. 이 그림 속 인물이 딱 그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가장 마음이 가는 그림입니다.

그림 그리기 말고 젤 좋아하는 일은?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일들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기,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여행 가기. 그 후에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블로그에 생각이나 여행기 쓰기. 그러다가 다시 누군가와 ‘함께’하기.

최근 재밌게 본 콘텐츠를 추천해 주신다면?
 
「EBS 다큐프라임: 계곡을 잇는 비행, 케이블 마을의 여름」이라는 오래전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콜롬비아의 작은 산간 마을에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였는데,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이 길고 험해 케이블을 이용해 이동하는 아이가 등장해요. 케이블은 위험하지만 그것을 타지 않으면 수시간 동안 먼 길을 돌아 걸어가야 하고요. 다큐멘터리 안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케이블 타기가 무서워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딸을 아버지가 설득해 태우고, 손을 잡고 먼 길을 함께 가 주는 장면이었어요. 고립된 마을의 불편함, 그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아이들의 모습이 좋아서 깊이 빠져들어 보았습니다. 얼마 전 다녀온 남미 여행의 풍경과도 겹쳐져 더 마음을 두고 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다음 작업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연말에 출간 예정인 독립출판물이 있습니다. 작년 남아메리카 여행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그리고 모아 드로잉 북을 만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