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 짧은 시의 미학 김일로 시집 『송산하』 읽기
- 1547
• 지은이 : 김병기
• 가격 : 14,800원
• 책꼴/쪽수 :
128×210mm, 340쪽
• 펴낸날 : 2016-10-04
• ISBN : 9788958289593
• 태그 : #짧은시 #송산하
저자소개
지은이 : 김병기
유년 시절부터 가학으로 한문과 서예를 공부했으며, 1988년 대만중국문화대학에서 「황정견의 시와 서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의 시와 서예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서예와 한지를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미국, 루마니아, 스페인 등지에서 서예를 무대 공연으로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고, 국내에서도 서예와 음악, 무용, 영상을 융합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제1회 원곡서예학술상을 수상했고, 문화재전문위원과 한국서예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아 한국 서예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북경인가 베이징인가』 『아직도 한글 전용을 고집해야 하는가』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사람과 서예』 등이 있다.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의 시와 서예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서예와 한지를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미국, 루마니아, 스페인 등지에서 서예를 무대 공연으로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고, 국내에서도 서예와 음악, 무용, 영상을 융합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제1회 원곡서예학술상을 수상했고, 문화재전문위원과 한국서예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아 한국 서예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북경인가 베이징인가』 『아직도 한글 전용을 고집해야 하는가』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사람과 서예』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짧은 글 긴 울림, 단시短詩의 미학
광주 전남 아동문학 1세대로 평가되는 김일로(1911~1984) 시인은 동시집 『꽃씨』와 더불어 한글시와 한문시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의 시집 『송산하頌山河』(1982년 출간)를 남겼다.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인정人情을 노래한 스무 자 남짓의 한글시와 그것을 이어받는 한 줄의 한문시. 이 소박하고 단아한 정취의 단시短詩 130여 편이 실린 『송산하』는 안타깝게도 지역 사회를 넘어서 널리 읽히지 못했다. 한시 연구자인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병기 교수는 누구나 쉽게 외워 읊을 수 있는 이 짧은 시가 잊히고 만 것은 사람들이 한자와 한문을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이라 여기고 『송산하』의 한문시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고, 매 편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작업을 ‘번역하고 보충하여 서술했다’는 의미로 ‘역보譯輔’라 이름 붙였다. 이 책은 김일로 시집 『송산하』의 원문과 김병기 교수의 역보를 함께 담은 시에세이로, 30여 년 전의 시인과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애독자의 시간을 뛰어넘는 다정한 대화를 엿볼 수 있다.
광주 전남 아동문학 1세대로 평가되는 김일로(1911~1984) 시인은 동시집 『꽃씨』와 더불어 한글시와 한문시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의 시집 『송산하頌山河』(1982년 출간)를 남겼다.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인정人情을 노래한 스무 자 남짓의 한글시와 그것을 이어받는 한 줄의 한문시. 이 소박하고 단아한 정취의 단시短詩 130여 편이 실린 『송산하』는 안타깝게도 지역 사회를 넘어서 널리 읽히지 못했다. 한시 연구자인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병기 교수는 누구나 쉽게 외워 읊을 수 있는 이 짧은 시가 잊히고 만 것은 사람들이 한자와 한문을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이라 여기고 『송산하』의 한문시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고, 매 편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작업을 ‘번역하고 보충하여 서술했다’는 의미로 ‘역보譯輔’라 이름 붙였다. 이 책은 김일로 시집 『송산하』의 원문과 김병기 교수의 역보를 함께 담은 시에세이로, 30여 년 전의 시인과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애독자의 시간을 뛰어넘는 다정한 대화를 엿볼 수 있다.
목차
추천의 글 • 4
들어가며 • 6
원저자 서문 • 15
春 봄 • 19
夏 여름 • 109
秋 가을 • 185
冬 겨울 • 253
나오며 • 324
김일로 약력 • 338
들어가며 • 6
원저자 서문 • 15
春 봄 • 19
夏 여름 • 109
秋 가을 • 185
冬 겨울 • 253
나오며 • 324
김일로 약력 • 338
편집자 추천글
추천의 글
마치 이른 아침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개울가를 산보하는 듯한 청량감으로 가득하다. 김일로의 시를 읽고 누가 시가 어렵고, 책이 재미없다고 할 것인가. 김일로의 시는 대단히 짧다. 자연에서 느낀 시정을 가볍게 던진 외마디의 단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구에 주석을 달듯이 가한 한문 한 구절의 함축적 의미가 절묘하다.
세상은 점점 책과 멀어지고, 시와 멀어지고, 한문과는 아주 담을 쌓고 있는데 그 이유는 책은 재미없고, 시는 난해하고, 한문은 더더욱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을 탓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책과 만나게 하는 것이 모름지기 지식인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널리 조명 받지 못한 김일로의 시를 현재로 다시 불러온 김병기 교수의 ‘역보’ 작업은 귀감이 될 만하다.
_ 유홍준(미술사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출간 의의
한글과 한문의 오묘한 계합을 이룬 김일로 시의 세계
김일로의 시집 『송산하』는 마치 일본의 하이쿠와 중국의 오언 혹은 칠언절구가 지닌 절제와 압축미의 절정을 취해 한글시에 녹여낸 듯한 독특한 형식을 보인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자연에서 느낀 시정을 가볍게 던진 외마디의 단상” 같은 스무 자 남짓의 한글시를 일곱 자 내외의 한문시가 절묘하게 받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한문시가 한글시를 그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한글시의 정취를 고스란히 이어가면서도 옆으로 살짝 한 걸음을 떼듯 또 다른 미감을 더한다.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一花難見日常事(일화난견일상사)
꽃 한 송이 보기도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련만
“한국이 지닌 아름다운 산수의 경색과 훈훈한 흙냄새가 몸에 배어 있어 풋고추의 알큰한 맛과 시래깃국이 풍기는 넉넉함을 사랑했”던 김일로 시인은 눈에 비치고 가슴에 고인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망칠까 저어하듯 단 몇 글자로 숨죽여 노래한다. 채 한 문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짧은 노래에는 고요함 속에서도 쉼 없이 변화하는 사계절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 끝에 가만히 놓인 한 줄의 한문시는 말을 아낌으로써 더 큰 의미를 전하는 절제의 미학을 완성한다.
역보譯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징검다리
한시 연구자이자 국내의 손꼽히는 서예가이기도 한 김병기 교수는 자신의 강의와 저서, 그리고 서예 작품 전시회 등을 통해 김일로의 시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글시의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에는 감탄하면서도 한문시 부분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꼈다. 평소 한자 역시 우리 글자나 다름없다는 지론을 펴온 김 교수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써서 특유의 정서와 미감을 만들어낸 김일로 시인의 성취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가장 큰 이유가 한자라는 것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결국 그는 한문시 부분을 번역하고, 한글과 한문의 오묘한 계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간의 해설을 더해 김일로의 시를 새롭게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일로의 시집 『송산하』에 김병기의 ‘번역과 보충 서술’, 즉 ‘역보’가 더해진 이 책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김병기 교수는 자신의 역보 작업이 원작을 훼손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글을 더하면서도, 독자들이 한층 풍부한 이야기 속에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글을 풀어놓았다. 무엇보다 김일로 시인의 자제인 김강 선생을 수차례 만나 시의 창작 배경이나 시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글자 하나, 단어 하나에 고심하던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충실히 옮겨놓았다.
내사
뻐꾸기
벗 삼아
산촌에 살래
뻐꾹
뻐 뻐꾹
山鳩一曲好友聲(산구일곡호우성)
뻐꾸기 노래
한 곡은
좋은 친구의
목소리
“선친은 문인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상경하면 동요 〈고향의 봄〉의 작사가인 이원수 선생만 만나곤 하셨습니다. 나이도 동갑이라 두 분은 더러 장난도 치시며 격의 없이 지내셨습니다. 어느 날 이원수 선생님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셨답니다. 2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다방 여주인한테 이원수 선생이 오시거든 드리라며 쪽지 하나를 건네고 오셨답니다. 그 쪽지의 내용이 바로 이 시입니다.” _ 79~80쪽
또한 한시 연구자로서 김일로 시인의 한문시와 정서적으로 맥이 닿는 한시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시인이 노래한 대상이나 장소에 얽힌 전설이나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시들에서는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서예 작품으로 독자의 감흥을 고양시킨다.
김일로 시인은 『송산하』의 서문에서 “내가 여기 담은 것이 어떤 형태의 틀에 들어갈 것인지 모르나 관여할 생각이 없다. (중략) 그 어느 분이든 내가 바라던 그 하나를 먼저 따내는 분이 계신다면 서슴없이 일어나 진실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드릴 생각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시를 자유롭게 읽고 나눌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김병기 교수는 매우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가볍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그 길을 걸었다. 독자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김일로의 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를 제안하고 있다.
주요 내용
21
꽃향기가
하도 매워
시내 찾아
달을 핥는
사슴
한 쌍
花香醉鹿讀半月(화향취록독반월)
꽃향기에
취한 사슴
반달을
읽고 있네
* 역보 *
꽃은 맘껏 향기를 풍기고
사슴은 맵도록 진한 그 향기에 취하여
시냇물을 마시러 왔는데
물에는 또 달이 비쳐
사슴은 물을 마시면서 그 달을 본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지독하게도 다정한 한 쌍의 사슴이.
물을 마시느라 몸을 구부린 채 물속에 잠긴 달을 보는 사슴의 모습을 ‘반달을 읽고 있다讀半月’라고 말한 시인의 참신하고 섬세한 표현력이 감탄스럽다. _ 70~71쪽
32
떡이
좋다는 소리가
진동하는 자리에서
꽃도 좋다는
이내 말은
실낱같은 모기 소리
餠花一致何歲月(병화일치하세월)
떡과 꽃의 가치가
일치하는 때는
과연 언제쯤일까?
* 역보 *
경제의 중요성과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같은 차원으로 인식하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기다리면 언젠가 오기는 오는 걸까?
병화일치餠花一致
떡과 꽃의 가치가 일치하다
돈만 아는 졸부를 나무라는 말로 이보다 절실한 게 또 있을까? 꽃을 보는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만 남겨주고 오로지 경제발전이라니! 돈만 모으는 졸부를 오히려 비호하는 정부를 훈계하는 말로도 이만한 말이 또 있을까?
이 조용한 일침一針의 일갈一喝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텐데. _ 98~99쪽
77
마음은 어린이
놀던 동산이
눈앞인데
흰머리 서로 보며
감긴 세월
풀어보거니
白頭相見相看夢(백두상견상간)
흰머리 되어
서로 만나
그 옛날 꿈을
서로 헤거니
* 역보 *
그저 그만한 추어탕 집에 깍두기 반찬을 가운데에 두고 각기 추어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A : 너 나 안 보고 싶던?
B : 왜 안 보고 싶었겠나?
A : 어디 아픈 덴 없지?
B : 응, 너는? 너도 아픈 데 없지? _ 198~199쪽
90
녹음 속에 앉아
목탁 치는 소리
흐르는 개울물
누가 막으며
인고유장人苦流長
누가 끊으리
山寺木鐸溪聲中(산사목탁계성중)
산사의
목탁 소리는
시냇물에 실려
떠내려가네
늘
그렇게
떠내려가네
* 역보 *
개울물은 막을 수 없다. 막아본들 넘쳐서라도 흐른다. 모든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산사의 목탁 소리도 개울물에 실려 떠내려간다.
흐르고 떠내려가는 것은 흐르고 떠내려가게 해야 한다. 삶이 비록 괴로움이라 해도 흐르는 게 삶이라 그 괴로움을 막을 수 없다. 끝내 흐를 수밖에 없다. 괴롭다 해서 끊으려 들지 말자.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자. 그러면 외려 편안하리라. _ 226~227쪽
105
암자庵子 도량道場에
낙엽이
스산한데
저 혼자
활짝 웃는
국화 한 송이
山中庵前看生滅(산중암전간생멸)
산속
암자 앞에서
생멸의 이치를 보도다
* 역보 *
스산한 가을
한편에서는 낙엽이 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화꽃이 피고.
병원
한편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고.
생멸은 어디에나 있다.
어리석을 손
내게는 영원히 멸滅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
대문 앞이 북망산임을 아는 것이 철드는 것 아닐까? _ 260~261쪽
116
주고
받는 정情이
설야雪夜 속에 훗해
등불이 부처련 듯
합장하는 저 모습
情去情來人間暖(정거정래인간난)
정이
오고 가고
인간 세상은
따뜻해지고
* 역보 *
긴긴 겨울밤을 그냥 새기엔 배가 다소 출출하다 싶으면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는 고구마라도 삶아서 밤참을 먹었다. 더 있는 집에서는 떡을 찌기도 했다. 그렇게 밤참거리를 만들면 결코 혼자 먹지 않았다. 아이들 손에 등불을 들려 이웃집에 떡도 돌리고 고구마도 돌렸다. 한밤에 ‘웬 떡’을 만난 가난한 이웃은 등불을 든 아이를 향해 손을 모으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가난한 이웃의 합장으로 등불을 든 아이는 어느새 부처가 된다. 떡 한 접시, 고구마 서너 알을 주고받는 정이 내 아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 마음을 갖도록 키우는 것이다. _ 284~285쪽
마치 이른 아침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개울가를 산보하는 듯한 청량감으로 가득하다. 김일로의 시를 읽고 누가 시가 어렵고, 책이 재미없다고 할 것인가. 김일로의 시는 대단히 짧다. 자연에서 느낀 시정을 가볍게 던진 외마디의 단상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구에 주석을 달듯이 가한 한문 한 구절의 함축적 의미가 절묘하다.
세상은 점점 책과 멀어지고, 시와 멀어지고, 한문과는 아주 담을 쌓고 있는데 그 이유는 책은 재미없고, 시는 난해하고, 한문은 더더욱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을 탓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책과 만나게 하는 것이 모름지기 지식인의 사명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널리 조명 받지 못한 김일로의 시를 현재로 다시 불러온 김병기 교수의 ‘역보’ 작업은 귀감이 될 만하다.
_ 유홍준(미술사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출간 의의
한글과 한문의 오묘한 계합을 이룬 김일로 시의 세계
김일로의 시집 『송산하』는 마치 일본의 하이쿠와 중국의 오언 혹은 칠언절구가 지닌 절제와 압축미의 절정을 취해 한글시에 녹여낸 듯한 독특한 형식을 보인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자연에서 느낀 시정을 가볍게 던진 외마디의 단상” 같은 스무 자 남짓의 한글시를 일곱 자 내외의 한문시가 절묘하게 받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한문시가 한글시를 그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한글시의 정취를 고스란히 이어가면서도 옆으로 살짝 한 걸음을 떼듯 또 다른 미감을 더한다.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一花難見日常事(일화난견일상사)
꽃 한 송이 보기도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련만
“한국이 지닌 아름다운 산수의 경색과 훈훈한 흙냄새가 몸에 배어 있어 풋고추의 알큰한 맛과 시래깃국이 풍기는 넉넉함을 사랑했”던 김일로 시인은 눈에 비치고 가슴에 고인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망칠까 저어하듯 단 몇 글자로 숨죽여 노래한다. 채 한 문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짧은 노래에는 고요함 속에서도 쉼 없이 변화하는 사계절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 끝에 가만히 놓인 한 줄의 한문시는 말을 아낌으로써 더 큰 의미를 전하는 절제의 미학을 완성한다.
역보譯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징검다리
한시 연구자이자 국내의 손꼽히는 서예가이기도 한 김병기 교수는 자신의 강의와 저서, 그리고 서예 작품 전시회 등을 통해 김일로의 시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글시의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에는 감탄하면서도 한문시 부분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꼈다. 평소 한자 역시 우리 글자나 다름없다는 지론을 펴온 김 교수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써서 특유의 정서와 미감을 만들어낸 김일로 시인의 성취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가장 큰 이유가 한자라는 것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결국 그는 한문시 부분을 번역하고, 한글과 한문의 오묘한 계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간의 해설을 더해 김일로의 시를 새롭게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일로의 시집 『송산하』에 김병기의 ‘번역과 보충 서술’, 즉 ‘역보’가 더해진 이 책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김병기 교수는 자신의 역보 작업이 원작을 훼손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글을 더하면서도, 독자들이 한층 풍부한 이야기 속에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글을 풀어놓았다. 무엇보다 김일로 시인의 자제인 김강 선생을 수차례 만나 시의 창작 배경이나 시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글자 하나, 단어 하나에 고심하던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충실히 옮겨놓았다.
내사
뻐꾸기
벗 삼아
산촌에 살래
뻐꾹
뻐 뻐꾹
山鳩一曲好友聲(산구일곡호우성)
뻐꾸기 노래
한 곡은
좋은 친구의
목소리
“선친은 문인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상경하면 동요 〈고향의 봄〉의 작사가인 이원수 선생만 만나곤 하셨습니다. 나이도 동갑이라 두 분은 더러 장난도 치시며 격의 없이 지내셨습니다. 어느 날 이원수 선생님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셨답니다. 2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다방 여주인한테 이원수 선생이 오시거든 드리라며 쪽지 하나를 건네고 오셨답니다. 그 쪽지의 내용이 바로 이 시입니다.” _ 79~80쪽
또한 한시 연구자로서 김일로 시인의 한문시와 정서적으로 맥이 닿는 한시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시인이 노래한 대상이나 장소에 얽힌 전설이나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부 시들에서는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서예 작품으로 독자의 감흥을 고양시킨다.
김일로 시인은 『송산하』의 서문에서 “내가 여기 담은 것이 어떤 형태의 틀에 들어갈 것인지 모르나 관여할 생각이 없다. (중략) 그 어느 분이든 내가 바라던 그 하나를 먼저 따내는 분이 계신다면 서슴없이 일어나 진실로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드릴 생각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시를 자유롭게 읽고 나눌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김병기 교수는 매우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가볍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그 길을 걸었다. 독자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김일로의 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를 제안하고 있다.
주요 내용
21
꽃향기가
하도 매워
시내 찾아
달을 핥는
사슴
한 쌍
花香醉鹿讀半月(화향취록독반월)
꽃향기에
취한 사슴
반달을
읽고 있네
* 역보 *
꽃은 맘껏 향기를 풍기고
사슴은 맵도록 진한 그 향기에 취하여
시냇물을 마시러 왔는데
물에는 또 달이 비쳐
사슴은 물을 마시면서 그 달을 본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지독하게도 다정한 한 쌍의 사슴이.
물을 마시느라 몸을 구부린 채 물속에 잠긴 달을 보는 사슴의 모습을 ‘반달을 읽고 있다讀半月’라고 말한 시인의 참신하고 섬세한 표현력이 감탄스럽다. _ 70~71쪽
32
떡이
좋다는 소리가
진동하는 자리에서
꽃도 좋다는
이내 말은
실낱같은 모기 소리
餠花一致何歲月(병화일치하세월)
떡과 꽃의 가치가
일치하는 때는
과연 언제쯤일까?
* 역보 *
경제의 중요성과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같은 차원으로 인식하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기다리면 언젠가 오기는 오는 걸까?
병화일치餠花一致
떡과 꽃의 가치가 일치하다
돈만 아는 졸부를 나무라는 말로 이보다 절실한 게 또 있을까? 꽃을 보는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만 남겨주고 오로지 경제발전이라니! 돈만 모으는 졸부를 오히려 비호하는 정부를 훈계하는 말로도 이만한 말이 또 있을까?
이 조용한 일침一針의 일갈一喝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텐데. _ 98~99쪽
77
마음은 어린이
놀던 동산이
눈앞인데
흰머리 서로 보며
감긴 세월
풀어보거니
白頭相見相看夢(백두상견상간)
흰머리 되어
서로 만나
그 옛날 꿈을
서로 헤거니
* 역보 *
그저 그만한 추어탕 집에 깍두기 반찬을 가운데에 두고 각기 추어탕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다.
A : 너 나 안 보고 싶던?
B : 왜 안 보고 싶었겠나?
A : 어디 아픈 덴 없지?
B : 응, 너는? 너도 아픈 데 없지? _ 198~199쪽
90
녹음 속에 앉아
목탁 치는 소리
흐르는 개울물
누가 막으며
인고유장人苦流長
누가 끊으리
山寺木鐸溪聲中(산사목탁계성중)
산사의
목탁 소리는
시냇물에 실려
떠내려가네
늘
그렇게
떠내려가네
* 역보 *
개울물은 막을 수 없다. 막아본들 넘쳐서라도 흐른다. 모든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산사의 목탁 소리도 개울물에 실려 떠내려간다.
흐르고 떠내려가는 것은 흐르고 떠내려가게 해야 한다. 삶이 비록 괴로움이라 해도 흐르는 게 삶이라 그 괴로움을 막을 수 없다. 끝내 흐를 수밖에 없다. 괴롭다 해서 끊으려 들지 말자.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자. 그러면 외려 편안하리라. _ 226~227쪽
105
암자庵子 도량道場에
낙엽이
스산한데
저 혼자
활짝 웃는
국화 한 송이
山中庵前看生滅(산중암전간생멸)
산속
암자 앞에서
생멸의 이치를 보도다
* 역보 *
스산한 가을
한편에서는 낙엽이 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화꽃이 피고.
병원
한편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고.
생멸은 어디에나 있다.
어리석을 손
내게는 영원히 멸滅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
대문 앞이 북망산임을 아는 것이 철드는 것 아닐까? _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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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받는 정情이
설야雪夜 속에 훗해
등불이 부처련 듯
합장하는 저 모습
情去情來人間暖(정거정래인간난)
정이
오고 가고
인간 세상은
따뜻해지고
* 역보 *
긴긴 겨울밤을 그냥 새기엔 배가 다소 출출하다 싶으면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는 고구마라도 삶아서 밤참을 먹었다. 더 있는 집에서는 떡을 찌기도 했다. 그렇게 밤참거리를 만들면 결코 혼자 먹지 않았다. 아이들 손에 등불을 들려 이웃집에 떡도 돌리고 고구마도 돌렸다. 한밤에 ‘웬 떡’을 만난 가난한 이웃은 등불을 든 아이를 향해 손을 모으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가난한 이웃의 합장으로 등불을 든 아이는 어느새 부처가 된다. 떡 한 접시, 고구마 서너 알을 주고받는 정이 내 아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 마음을 갖도록 키우는 것이다. _ 284~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