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사전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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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정철
우표, 지우개, 딱지 따위를 모으고 종이사전을 탐독하며 유소년기를 보낸 그는 록 음악을 들으며 사춘기를 통과했고, PC통신이 꽃피던 시기 대학에 들어가 ‘하이텔’ 형들을 따라 레코드판을 사 모으며 20대를 보냈다. 먹고 살 길을 찾던 무렵, 자신의 수집과 정리에 대한 강박을 발휘할 최적의 분야가 ‘사전’이라 판단한 그는 네이버의 문을 두드린다. 종이사전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던 시기이자 웹사전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2000년대 초중반 네이버, 다음을 거치며 한국 웹사전의 기본 틀을 디자인하고, 다양한 콘텐츠로 그 속을 채웠다.
지금은 홀대받는 사전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IT 시대 사전과 교양의 관계’를 고민하며 지낸다. 여가 시간은 여전히 록 음악 듣기와 레코드판 사 모으기에 탕진하고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네이버와 다음에서 한국 웹사전의 초석을 놓은
디지털 시대의 사전 편찬자 정철이 기록한 사전의 몰락 혹은 변신의 여정
인간이 지식을 분류, 정리, 축적하는 가장 정교한 체계로 발전시켜온 사전이 검색 결과의 하나로 전락했다. 이제는 누구도 굳이 두꺼운 사전을 펼쳐보지 않는다. 궁금한 게 있을 땐 PC 혹은 모바일 검색창을 열어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진다. 그렇다면 이제 사전은 무의미한 형식이 된 것일까? 인간은 사전을 내려놓고 검색에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종이사전을 탐독하던 성장기를 지나 네이버와 다음에서 웹사전을 만들고, 위키백과를 통해 미래의 사전을 모색하고 있는 정철이 이 거대한 질문을 파고들었다. 그는 첨단기술인 검색이 실은 인간이 오래전부터 지식을 다뤄온 방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압축과 정제의 세계인 ‘사전’과 제어할 수 없는 무한정의 세계인 ‘웹’을 넘나들며 인간이 지식을 편집해온 역사와 그것이 ‘종이’라는 물성을 잃어버린 후의 변화를 보여준다.
목차
들어가며 _ 나는 왜 쓰는가 12
1장 한 사전 편찬자의 자기 소개서
모아서 정리하니 “보기에 좋았다” 16
소년, 사전을 만나다 20
의미는 축적과 정리에서 나온다 26
아카이빙에 대한 열망 33
수집의 끝판왕, 어휘 수집 37
검색창 ▶ [좌담] 디지털 시대, 사전의 미래를 묻다 43
2장 사전, 죽었니 살았니
지식에 대한 지식 54
한자사전, 2000년 역사의 정교한 체계 61
영어사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였네 66
백과사전, 서구 합리주의의 총체 70
사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종이 시대 73
사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디지털 시대 80
사전은 어쩌다 공공재가 되었나 85
위키백과와 개방형 사전 91
검색창 ▶ 위키백과의 편집 전쟁 98
3장 신이 내린 사전 편찬자들
사전 편찬자는 키워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날 뿐이다 102
드니 디드로와 『백과전서』 103
제임스 머레이와 『옥스퍼드 영어사전』 108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115
건재 정인승과 『큰사전』 120
송산 신기철과 『한국문화대사전』 126
검색창 ▶ 위키백과와 지미 웨일스 130
4장 검색, 사전을 삼키다
사전의 영역, 검색의 영역 136
이어서 읽기 vs 넘나들며 읽기 140
검색의 원리 1: 색인 144
검색의 원리 2: 랭킹 148
검색의 원리 3: 평판과 큐레이션 151
검색 회사에서 사전 만들기: 네이버 158
검색 회사에서 사전 만들기: 다음 163
전체 어학사전을 하나의 그릇에 172
검색창 ▶ 검색 실패어로 사전 보강하기 178
5장 검색창의 안과 밖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184
광고인 듯 광고 아닌 듯, 검색 광고 185
언어학, 과학이 되다 190
뇌의 확장 193
넓고 얕은 지식 197
검색창의 제1언어는 영어 202
검색엔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205
검색창 ▶ 검색이 바꾸지 못한 것 209
6장 검색, 오래된 미래
다시 네이버를 생각한다 214
좋은 검색: ‘믿을 만한 정보로’ 신속하게 220
좋은 검색: 믿을 만한 정보로 ‘신속하게’ 227
좋은 사전: 위키백과가 할 수 없는 것 231
검색창 ▶ 검색어 로그라는 공공재 239
나오며 _ 좋은 사전이 좋은 검색을 만든다 243
참고문헌 246
찾아보기 248
편집자 추천글
“당신이 매일같이 쓰고 있는 검색엔진이 사실은 사전이다”
종이라는 옷을 벗고 웹 세계로 스며든 사전의 생존 분투기
사전의 몰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내에 출간되는 사전들은 이미 10년 가까이 개정 없는 증쇄만을 거듭하고 있고, 2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2012년 종이사전 출판을 중단하고 디지털 형태로만 콘텐츠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브리태니커 한국어판은 최근 공식적인 웹 서비스마저 중단했다. 사전 출판사들은 이미 수년 전에 편집팀을 해체했고, 포털 사이트의 사전 서비스는 개정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의 ‘부분 수정’만을 하고 있다. 우리는 클릭 몇 번으로 너무나도 손쉽게 수십 종의 어학사전과 백과사전을 이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전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정철은 현재 IT 기업인 카카오에서 웹사전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콘텐츠는 웹 검색의 결과로 제시되지만, 그는 자신을 ‘사전 편찬자’라고 소개한다. 이는 자신이 다루는 콘텐츠의 원재료인 종이사전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고, 검색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색인인 것처럼 검색이 사전, 즉 지식을 편집해 찾아보기 쉬운 형태로 묶어둔다는 개념에서 기원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사전이 지금처럼 홀대받아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전은 그 자체로도 인간이 정교하게 발전시켜온 귀중한 문화 형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된 검색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으로 가꿔가야 할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자신이 탐구해 알게 된 지식을 분류, 정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사전이라는 형식을 낳고, 몇몇 뛰어난 개인들에 의해 그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는 과정,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종이에서 CD롬, 전자사전, 웹사전, 앱사전으로 계속해서 옷을 바꿔 입는 사전의 생존 분투기가 담겨 있다. 분투 끝에 사전은 전문가들의 손에서 오랜 시간 다듬어지던 시절과는 이별하고, 불특정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검증하고 토론하며 수시로 갱신해가는 위키백과라는 마지막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그사이에 사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취해 발전한 검색은 사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제 사전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사전이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검색의 시대에도 우리가 왜 사전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긴 역사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하고 있다.
“네이버 사전과 다음 사전은 꽤 많이 다르다”
한국 웹사전의 성장과 발전에 관한 최초의 기록
저자는 수천 년 사전 편찬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자칭 ‘최후의 사전 편찬자’이자, 사전이 웹에서 새롭게 얻은 가능성(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언제든 수정할 수 있으며, 무한대로 확장이 가능한)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최초의 웹사전 기획자’이다. 그는 웹사전을 ‘기획’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즉 종이사전의 콘텐츠를 그대로 웹에 옮겨놓기만 했던 2000년대 초반에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오픈형 사전 서비스 기획안을 들고 네이버의 문을 두드렸다.
사전이 종이에서 웹으로 옮겨왔다면, 웹의 언어에 맞게 체제와 형식을 바꾸고 종이에서는 구현할 수 없었던 기능들을 새로 만들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네이버 영어사전을 개편할 때는 각기 따로 존재하던 한영사전, 영한사전 및 그 밖의 서브 사전들과 예문까지를 모두 ‘영어사전’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 함께 검색되도록 했다. 또 10만 어휘의 중사전 콘텐츠를 이용하던 네이버 국어사전을 국립국어원과의 지난한 협상을 거쳐 50만 어휘의 『표준국어대사전』으로 교체했다. 그 밖에 경제용어사전, IT용어사전 등을 전문용어사전이라는 하나의 틀로 통합했는데, 이는 지금 ‘네이버 지식백과’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다음으로 자리를 옮긴 후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기존의 웹사전과 다른 콘텐츠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네이버가 『표준국어대사전』을 사용하고 있으니 다음에서는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선택하는 식이다. 또한 그는 영어사전을 개편하면서 온라인상의 수많은 출처에서 100만 건 이상의 예문을 추출하여 종이사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고, 단어의 뜻을 품사가 아니라 빈도수를 기반으로 정렬하는 등 데이터와 언어학 지식을 활용한 서비스를 다수 도입했다. 현재 네이버와 다음이 제공하는 사전들은 원재료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치, 활용하는 방식도 상당히 다르다. 그의 노력으로, 그리고 포털 서비스들이 서로 경쟁한 덕분에 한국어 사용자들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다양한 사전 콘텐츠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 정철의 경력을 따라 읽는 것은 곧 한국 웹사전의 초기 모습과 이후의 성장과 발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사전의 몰락에 대한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바로 이 중대한 변화를 아무도 기록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초조함으로 이 책을 썼다. 그가 ‘온고지신 방법론’이라 불렀듯 사전은 맨 바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참조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웹사전도 앞서 만들어진 수많은 종이사전에 기대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웹사전들을 참조하며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미래의 사전, 나아가 미래의 검색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수집과 정리의 미학, 고상하고 우아한 지적知的 덕질의 극치
사전에 매혹된 한 남자의 ‘덕업 일치’ 스토리
이 책은 모으고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에 태어난 정철은 우표, 지우개, 메모지, 딱지 등을 모으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무엇인가를 모으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류와 정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온갖 자질구레한 수집품들을 색깔별로 혹은 모양별로 정리하며 나름의 미감을 만들어가던 소년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을 보여준 계몽사의 『컬러학습대백과』를 만났다. 일정한 분량의 텍스트와 컬러 도판이 어우러진 백과사전을 탐독하며 그는 사전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가 유소년기를 보낸 1970~80년대는 마침 한국의 백과사전 출판이 전성기를 맞은 시기였다. 여러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다양한 백과사전을 펴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영문판이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사전의 압축적이고 정교한 체계 속을 누비며 그는 자신의 타고난 수집, 정리 벽을 강화해갔다. 그의 다음 수집 대상은 음반(LP)이었다. 특히 재킷 디자인에 공을 들인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을 모으며 그는 자신만의 분류 기준을 세웠고, 음반 리뷰나 뮤지션 정보 등을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할 수 있는 음악 DB를 고민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분류하고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강박이 최종 정착한 곳은 어휘 수집, 즉 사전이었다. 그중에서도 종이사전이 아니라 아카이빙과 데이터베이스화가 한층 용이한 웹사전이었다. 그는 웹사전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자신의 눈에 거슬리거나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을 조금씩 고쳐 나갔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위키백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지식을 좀 더 편리하게 축적하고, 누구나 쉽게 검색해 찾아볼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수집하고 정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성향이 잘 쓰일 수 있는 일을 찾아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 이른바 ‘덕업 일치’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지적 욕구와 수집, 정리 벽이 있었던 선배 사전 편찬자들, 그리고 그들의 후예이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전을 만드는 위키백과 편집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대비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사전 편찬자는 선배들처럼 고독하게 언어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도구와 권한을 부여하고, 많은 이들과 떠들면서 언어가 끊임없이 기술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기획자여야 함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단순히 IT 기업의 지식 서비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긴 사전 편찬의 역사 속에 있음을, 그리고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 한 분기점에 서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의 좌표를 세상 속에 분명히 찍는 것, 이는 자기 일에 애정을 갖고 임하는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은 통찰이다. 이처럼 이 책은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조화롭게 만난 이의 열정 가득한 기록으로도 읽을 수 있다.
# 주요 내용
우리는 왜 중요한 것들을 축적하지 못할까?
그렇게 성장해가던 중에 하이텔이 문을 닫는다고 했다. 문을 닫으면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관련 글들은 어디로 가나. 그것들이 사라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며칠 날을 잡고 게시판 전체를 캡처했다. 그렇게 모은 게시물을 뮤지션별로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때 내 관심사는 축적(아카이빙)이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물과 오랜 기록의 전통이 있는데 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축적하지 못할까. 최소한 내가 있는 공간에서만큼은 축적이 안 되어 사라지는 일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축적한 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정리가 필요하다. 즉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야 접근이 가능하고, 새로운 의미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혼자서 데이터베이스를 고민했다. 제목을 어떤 기준으로 적을 것인가, 앨범명이 어떻게 연도별로 나오게 할 것인가, 검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던 중에 ‘제로보드’라는 웹 게시판을 선택해 음반 DB에 맞는 스킨skin을 찾아 적용했다. _ 34쪽
사전은 이미 공공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전에는 사전을 펴놓고 참고하던 것들을 이제는 검색으로 해결하고 있다. 내가 쓴 영어 관용구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된다. 결과가 많이 나오면 안심하고 쓸 수 있다. 개념에 대한 설명도 백과사전의 딱딱한 설명보다는 누가 블로그에 서술해놓은 것이 이해도 쉽고 편하다. 이렇게 검색은 기존에 사전이 해오던 일들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전은 무용지물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검색 서비스들은 대부분 첫 번째 검색 결과로 사전을 내놓는다. 사전은 ‘최소한의 검색’이자 ‘검색 결과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중략)
사전은 이미 공공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누구의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없으면 살기 괴로워지는 것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혹은 언제든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거기에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면 우리는 사전을 공공재로 간주하고, 그에 걸맞게 대응해야 한다. 상대가 국가가 되었든 기업이 되었든 좋은 사전을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_ 86~90쪽
사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종이 시대
누구도 사전을 만들 때 맨바닥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만든 사전을 참조하면서 편찬자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요소를 보태어 기준을 만든 뒤 그 기준에 맞춰 일관되게 기술한다. 그 과정은 저술이기도 하고 편집이기도 하다. 기술하는 동안에도 계속 이전의 사전들을 참조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이것을 ‘온고지신 방법론’이라 부르고 있다. 이전에는 여러 사전을 오려서 항목 단위로 붙여놓고 함께 검토하곤 했다. 새로운 한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두산동아의 ‘먹다’, 금성출판사의 ‘먹다’, 시사어학원의 ‘먹다’ 등을 함께 붙여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이 작업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학생 때 보던 두툼한 사전에 보통 10만 어휘가 실려 있는데, 전체가 아니라 1만 개의 항목만 이렇게 정리한다고 해도 아찔할 정도의 업무량이다. _ 74~75쪽
사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디지털 시대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이 사전을 편집할 수 있다. 예문도 인터넷에서 가져올 수 있으며, 인터넷 말뭉치를 검색해서 빈도와 분포도 확인할 수 있다. 이중언어사전이라면 예문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의 번역문을 기증받아 예문 쌍도 만들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사전을 읽고 제보해주는 오류들을 받아서 내용을 곧장 수정할 수도 있다. (중략)
이제 사전 편찬자는 사전을 편집/집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다수의 참여를 유도하는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도구를 만들고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중략)
디지털 시대의 사전 편찬자는 이전처럼 고독하게 언어의 세계로 침잠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떠들면서 언어가 끊임없이 기술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사람이다. 지난 시대의 편집자들처럼 작업하면 그는 사전을 기술하는 사람일지언정 더 이상 사전 기획자나 편찬자라고 할 수 없다. _ 83~85쪽
함께 만드는 백과사전 ‘위키백과’는 어떻게 가능한가?
1단계는 공명심 때문이다. 아니, 이런 좋은 취지의 학술 아카이브가 있구나, 나도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시작한다. 2단계는 공동 작업의 즐거움 때문이다. 내가 만든 항목이 자고 일어났더니 한층 보강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이 밝아 보인다.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3단계는 중독 때문이다. 눈에 걸리는 오류를 못 참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링크가 안 걸려 있으면 링크를 걸어주고, 출처가 부족해 보이면 찾아 넣고, 문서가 ‘위키적’으로 편집되어 있지 않으면 ‘위키답게’ 작업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_ 98쪽
사전 편찬자는 키워지지 않는다, 단지 태어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뇌 구조가 그냥 DB처럼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식을 쪼개서 정리하고, 정리한 순서에 논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지구력과 의지,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 사전 편찬자가 된다. (중략)
사전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 혹은 상황은 많고도 다양하지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그 사람’이 ‘딱 그 자리’에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 사전이다. 강한 의지를 가진 개인이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지 않는 한 사전을 제대로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사전은 역사가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_ 102~125쪽
검색이 사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사전이라는 형식은 좋은 콘텐츠의 대명사이다. 정보의 순도를 극도로 높이고 건조한 문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2차적으로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콘텐츠이다. 구글에서 영어로 검색어를 입력하면 제일 상단에 나오는 문서가 위키백과인 경우가 많은 이유도 정보의 순도가 높기 때문이다. 논문과 함께 사전이라는 형식은 인간이 지식을 축적하는 가장 정교한 체계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인터넷 등장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검색 서비스는 인물, 엔터테인먼트, 사건 사고 등에는 강하지만 학문이나 순수예술 분야에서는 약한 면이 많다. 아무래도 대중적인 검색어에 특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사전은 여러 분야에 걸쳐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작성된 문서다. 대중적인 콘텐츠에서는 정보량이 적지만 학문이나 순수예술 관련 콘텐츠는 다른 자료들에 비해 강하다. _ 137~139쪽
위키백과에 사전의 미래를 다 맡겨도 될까?
소수의 전문가들이 지식을 쌓아 올리던 백과사전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위키백과가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한다. 같은 영역에서 같은 것으로 경쟁하면 도저히 위키백과만큼의 결과를 낼 수 없다.
1. 항목 수에서 경쟁이 안 된다면 좀 더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개념들로 한정해 집필 대상의 수를 줄여야 한다. 대신 이 백과사전에 기고하는 것 자체가 학자들에게 명예가 되어야 한다. (중략)
2. 전공자들이 자기 이름과 전문성을 걸고 관점을 담아 논의를 전개해야 하며, 한쪽에서는 그에 대한 토론이 오가야 한다. (중략) 너무 객관만을 지향할 필요는 없다. 필자의 개인성이 드러나도 좋다.
3. 학파가 되어야 한다. 디드로가 『백과전서』로 하고자 했던 일은 종교와 권위의 시대에 대한 이성의 도전이었고, 이런 흐름은 백과전서파라고 불렸다. (중략) 백과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은 주기적인 학회와 토론회를 열어 그 결과물을 온라인 백과사전과 온오프라인 단행본에 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_ 232~233쪽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통계는 사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인문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해당 시대의 사회상을 개괄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 시대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가 바로 검색어 사용 빈도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지난 수년간 매년 발행해온 ‘네이버 트렌드 연감’의 인기 검색어 통계도 이런 역할을 해왔다. 한국어 사전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특정 어휘의 검색 빈도가 평탄하지 않고 출렁인다면, 그 어휘의 용례에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신호다. 그 출렁이는 시기의 사회상을 살펴 해당 어휘의 의미를 수정해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전에 실시간성을 부여하려면 검색어 통계는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 자료다. _ 240쪽
# 추천의 글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내가 정철을 처음 본 것은 10여 년 전 국립국어원에서 열린 사전학회 세미나에서였다. 네이버에 근무하는 한 청년이 자기가 생각하는 사전의 미시 구조에 대해 발제를 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편집해온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의 엉뚱한 발상은 학계의 정설과도 맞지 않아서 속으로 흉을 좀 보았다.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검색이 사전을 삼켰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사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질문에 대한 기나긴 탐구 끝에 오래전 정철의 제안에 놀라운 통찰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겸손한’ 나는 곧바로 깊은 반성을 하고, 더덕 막걸리와 커피와 음악을 마시며 정철과 친구가 되었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는 사전을 검색에 담는 고된 노동을 통해 축적된, 그리고 더덕 막걸리와 커피와 음악을 통해 걸러진 사전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또한 자기 일에 애정을 갖고 임하는 이의 소박하지만 가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한 권의 책에 지식에 대하여, 사전의 본질과 역사에 대하여, 첨단 검색의 원리와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허허실실에 대하여 이만큼 담기는 쉽지 않다.
또 하나, 고백하건대 다시 보아도 이 책의 제목은 옳다.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도 사전과 함께 검색이라는 고래에게 삼켜지고 말았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고래도 환경이 나빠지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포경선의 작살에 맞은 채 육지로 끌려 올라와 해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사전을 삼킨 고래에 대해 원망 따위는 하지 않겠다. 그저 고래라도 자유롭게 너른 바다를 오가며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_ 장경식(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전 한국브리태니커회사 대표)
하나의 서비스를 10년 이상 하면 그 분야에 철학이 생기는 모양이다. 인터넷 회사에서 사전 기획자로 오래 일해온 정철은 사전이 오랜 세월 인류에게 주었던 가치와 그것을 이어받은 검색이 우리의 일상에서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는 가치를 한 권의 책에 잘 담아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정보의 유통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인 검색에 대해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근간이 되었던 사전의 중요성을 되새기며 앞으로 검색이 어떻게 발전해야 할지를 고민해볼 수 있었다.
_ 김병학(카카오 검색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