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철든 날 (사계절 중학년문고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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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시문학회 '2015 올해의 좋은 동시집'
저자소개
지은이 : 이수경
그린이 : 정가애
책정보 및 내용요약
목차
1부 철든 봄
술래가 찾은 것│봄은│봄이 간 곳│봄 조각│술렁술렁 우리 마을│터질똥 말똥│산 할머니│그래도 비│우리 마을 사람들
2부 철든 여름
6월│장맛비│쉬는 시간│산이 되는 시간│낮잠│황소 한 마리 먹기│마중│여름밤과 축구를│콩 까기
3부 철든 가을
반딧불이 숨바꼭질│떡비│사과 한 알│새로 바른 한지 방문│본 척도 못한 가을│나락 말리는 날│벌초하는 날│내 자식인가 해서│보름달의 실수
4부 철든 겨울
서리 내린 아침│우리를 일으키는 말│하나도 안 춥다│비밀│다신 안 가고 싶은 집│겨울잠│멍한 할머니│시골 마을 돋을별│응달에 앉은 새싹
5부 철든 우리
서울내기 미주네│서울 가게 되면│엄마가 모르는 일│나만 혼났다│넌 이제 끝장이야!│이상한 전화│그래도│좋아하게 되면│아무도 신경 안 써│무덤에 누워서도
편집자 추천글
계절과 함께 철들어 가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노래
지난여름, 시인은 아주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지리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 가까이 산자락에 자리한 크고 작은 마을을 돌면서, 각박한 도시 생활로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시심을 길어 올렸다. 그렇게 태어난 동시집이 바로 『갑자기 철든 날』이다. 이 책에 실린 마흔여섯 편의 시에는 지리산에서 나고 자란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 오롯이 묻어 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그 안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 담겨 있다.
총 5부로 구성된 『갑자기 철든 날』은 이른 봄부터 겨울까지 시간의 물살을 타고 펼쳐진다. 1부에서 4부까지는 지리산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시들로 꾸며져 있다.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와 그 변화를 온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을 사람들의 삶을 그린 이야기들이다. 봄은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는 순간부터 꽃이 만개한 때까지, 여름은 아까시나무 꽃향기가 퍼지는 시점부터 여름방학이 끝나는 무렵까지, 가을은 반딧불이 이야기로 시작해 추석 명절을 보내기까지, 겨울은 서리가 내려앉은 때부터 응달 한 귀퉁이에 새싹이 돋는 순간까지, 시간의 흐름 순으로 구성했다. 마지막 5부는 사계절이 분명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하지만 속 깊은 모습들을 담았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땐 마치 시인과 사계절을 함께 겪으며 긴 여행을 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각각의 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존재는 대부분 자연에서 온 것들이다.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면서 시인의 눈길이 다다르는 곳은 겨우내 눈 속에 숨어 있던 왕 구슬과 누나 머리핀을 찾아내는 봄볕이나(「술래가 찾은 것」), 아이들과 함께 축구도 하고 고무줄뛰기도 하는 6월의 찔레꽃 향기(「6월」), 숨바꼭질하다 변소 안으로 숨은 반딧불이와(「반딧불이 숨바꼭질」) 모두 잠든 새벽에 내려와 간장, 된장, 고추장부터 안아 주는 돋을별이다(「시골 마을 돋을별」). 물론 무뚝뚝한 외할아버지 전화를 받은 날엔 “온종일 울먹울먹”거리는 엄마도 있다(「이상한 전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자연의 흐름과 우리가 사는 일상의 모습은 시인의 눈길과 손길을 거쳐 특별한 세계로 탈바꿈한다.
앵두꽃 피었는데도 비 / 산벚꽃 피었는데도 비 / 마늘 밭 흠뻑 젖었는데도 비 / 논물 가득 찼는데도 비 // 우리끼리 베개 싸움 하고 / 치딩굴내리딩굴 / 낮잠 자다 또 자다 / 부침개 부쳐 먹으며 / 비 그치기 기다려도 // 복사꽃 피었는데도 비 / 돌배꽃 피었는데도 비 // 쌩하고 나갈 준비 / 다 된 우리는 못 본 체하고 // 동생 딱지 다 따먹었는데도 비
―「그래도 비」 전문
무엇보다 이 시집의 특별함은 자연과 인간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삶’과 ‘죽음’을 하나로 바라보는 시인의 철학적인 시선에 있다. 시인은 꽃이 피고 지는 일처럼 계절마다 철이 깃들고 빠져나가는 순간을 미사여구 하나 없이 담담히 노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할아버지 / 할머니 산소에 / 큰절합니다. // 막걸리 한 잔 / 따라 놓고 // 어른한테 / 절하듯 / 큰절합니다. // 할머니 살아 계실 때 / “시끄럽다마!” / 눈 부릅뜨던 할아버지 // 이젠 할머니한테 / 큰절하고 / 오래오래 / 엎드려 있습니다. / 일어날 생각을 않습니다.
―「벌초하는 날」 전문
시인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거창하거나 무겁지 않다. 평소 우리들이 마주하는 죽음은 할머니 무덤 앞에 엎드려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벌초 하는 날」), 무덤에 누워만 있기 미안해 엄마가 널어놓은 가지며 나물들을 말리고, 자신을 찾아온 아이들이 행여나 더울까 “막새바람 불러와 부채질해 주시”는 ‘죽어서도 바쁜’ 할머니의 무덤에 있다(「무덤에 누워서도」).
이렇듯 시인은 동시에서 자칫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죽음’이라는 메타포를 온전히 아이들의 동심으로 그려 내고 있다.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어떤 존재와의 작별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니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이 세계의 자연스러운 순환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내면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가 살아 숨 쉬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철든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
『갑자기 철든 날』에서 말하는 ‘철’은 ‘계절’,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를 의미한다. 하지만 시를 찬찬히 읽어 나가다 보면 그것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로 자연스레 이어지다가 둘은 이내 한 몸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철’을 잃어 가고 있다. 사계절의 경계는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쯤은 더 이상 사는 데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시인은 철마다 다른 이야기를 내어 보이는 자연과 그 모습을 닮은 사람들을 시 안에 녹여냄으로써 자연에 깃든 철과 사람에게 깃든 철의 의미를 탐색하고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철든 세상을 바라는 시인의 꿈과 맞물린다.
그랬다. 몸은 비록 도시에 있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지리산이 둥지를 틀고 함께 살고 있었던 거다. 반딧불이가 여름밤과 숨바꼭질하는 순한 지리산과 말이다. 사과밭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을 사슴벌레, 네발나비 맛보고 가고, 살랑바람과 산새도 나누어 먹는 착한 지리산과 말이다. 추위에 덜덜 떨고 다니면 머리에 쓴 보자기와 손에 낀 목장갑을 기꺼이 내어 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지리산과 말이다.
맞다. 사시사철 다른 노래를 불러 주는 지리산을 품고 사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진짜 철이 들었나 보다. 봄을 곰삭혀 여름을 깃들게 하고, 여름을 품어 가을을 빚어내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나도 진짜 철이 든 모양이다.
―‘시인의 말’에서
『갑자기 철든 날』은 이미 어른이 된 시인과 그의 마음속에 사는 어린아이가 만나 이루어 낸 세계에 관한 기록인 셈이다. 독자는 동시집을 읽으며 결국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와 함께 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섭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시로 쓴 동식물도감’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갑자기 철든 날』에는 철마다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네발나비, 긴병꽃풀, 개여뀌, 꽃향유, 층층나무 같은 생소한 이름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 동시집의 큰 매력이다. 아이와 함께 시를 읽은 뒤 시에 나오는 동식물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