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관차- 박관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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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최유정
엮은이 : (재)관현장학재단
책정보 및 내용요약
박관현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박관현 열사의 죽음은 광주의 죽음이다"라고 외치며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를 일주일간 펼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침묵하고 은폐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그의 빈소가 마련된 광주 남동성당을 찾아 조문하고, 박 열사의 처참한 죽음을 알리는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이 책은 1980년 5월 민주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민주화의 들불이 된 박관현 열사의 짧은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당시 우리의 사회현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더불어 한 개인이 자신의 꿈을 접고 5월의 아들, 광주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톺아보며 5.18정신을 되새겨본다.
목차
1장 서장
의혹1|의혹2|의혹3
2장 어린 시절
어머니|할아버지|광주 생활을 시작하다
3장 일상에서 역사로
균형 속의 파격|만남
4장 노동자의 삶속으로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사|헌신, 박관현|변화, 박관현
5장 들불이 되어
강학이 되다|들불야학에 대한 탄압|소용돌이치는 정국|외세의 개입
6장 80년 민주화의 봄, 그리고 결심
제안|학원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다|5월항쟁 전사(前史)
7장 피신
광주를 빠져나오다|서울로|삼양동 시절|체포
8장 1차 단식
장면1|장면2
9장 2차 단식
장면1
10장 3차 단식
장면1|장면2|장면3
11장 광주의 별이 되다
부록
故박관현 열사에게 보내는 편지|故박관현 열사 연보
편집자 추천글
나는 보았습니다 / 낮이고 밤이고 일 년 삼백예순 날 / 햇살 한 줄기 제대로 못 구경하던 그들이 / 푸르고 푸른 오월의 하늘 아래서 / 입이 째지도록 하품을 하고 /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친 듯 기지개를 켜는 것을 //(……) 당신의 죽음으로 박관현 동지여 / 우스운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 만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싸우는 인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故 김남주 시인,「한 사람의 죽음으로-박관현 동지에게」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대중집회에서 박관현 열사의 연설
민주화의 새벽 기관차, 박관현 열사 30주기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박관현 열사 30주기를 맞아 『새벽 기관차-박관현 평전』이 출간되었다. 박관현 열사는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가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자 서울 등지에서 은신하다 1982년 4월 5일 체포돼 내란죄 등으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박 열사는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교도소 내의 반인권적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옥중 단식을 벌였고, 극도로 심신이 쇠약해져 10월 12일 새벽, 전남대 병원에서 사망했다.
박관현 열사의 사망 소식을 접한 광주 시민들은 “박관현 열사의 죽음은 광주의 죽음이다”라고 외치며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를 일주일간 펼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침묵하고 은폐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그의 빈소가 마련된 광주 남동성당을 찾아 조문하고, 박 열사의 처참한 죽음을 알리는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박관현은 광주의 아들이요, 광주의 넋이자 민주화의 새벽 기관차다. 이 책은 1980년 5월 민주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민주화의 들불이 된 박관현 열사의 짧은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당시 우리의 사회현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더불어 한 개인이 자신의 꿈을 접고 5월의 아들, 광주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톺아보며 5·18정신을 되새겨본다.
일상에서 역사로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합격한 박관현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양심적인 법조인이 되어 이 사회와 민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교 시절, 유신 선포의 부당성에 그 누구보다 분노했지만 자신의 작은 외침이나 분노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에 열심히 노력해 큰사람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 말기의 시대 상황은 개인을 일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박관현이 사회 현실에 눈 뜨게 된 계기는 1978년 6·27교육지표 사건이다. 송기숙·명노근·안진오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일어난 이 사건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시기에 참담하기만 한 교육현장에서 지각 있는 교수들이 떨쳐 일어나 학원의 민주화, 인간화, 그리고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실천 투쟁할 것을 밝힌 것이다. 성명서를 발표하자마자 교수 11명은 전원 정보부로 연행되었고, 전남대 학생들은 이에「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을 낭독, 배포하고 ‘민주교육선언 교수 석방, 학원 사찰 중지’ 등을 외치며 시위한다. 6·29시위를 겪으면서 관현은 대학이 배움과 진리 추구의 상아탑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법전만을 들고 이상사회 건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헌신
사회현실에 눈 뜬 박관현이 실천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다지게 된 계기는 1978년 11월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쌀 생산자대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관현은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자각된 민중의 실천투쟁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임을 깨닫는다.
이후 관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학내 활동을 시작한다. 1978년 12월 17일부터 1979년 2월 20일까지 약 60일 동안 광천동 지역의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노동자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학습모임이나 운동조직에 가담했던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독서나 토론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지만, 박관현은 실태조사에 참여한 어느 누구보다 성실했으며 책임감과 사명감 또한 컸다. 실태조사를 계기로 노동자 문제, 민중 문제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근본 문제, 사회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개인의 꿈을 접고 거대한 민중운동, 민주운동에 몸을 실었다.
관현은 1979년 4월부터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과 지역 문제를 같이 의논하고 고민하면서 들불야학과 지역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연대하는 공동체의 이상향을 실천했다. 들불야학을 통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고,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에게 헌신하는 박관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신뢰를 심어주었다.
1980년 4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박관현은 유세 때마다 엄청난 인원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관현은 학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박정희 군사독재로, 전두환 신군부의 재집권으로 이어지는 정권의 매판성을 청산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4월 8일 2차 유세에는 전남대 사상 초유의 인원인 1만 명 학생들이 운집해 그의 연설을 들었다.
여러분, 내 꿈은 이제 판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닙니다. 내 꿈은 이제 순임이입니다. 순임이는 내 어머니입니다. 아니,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순임이는 또한 내 누이입니다. 아니,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누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역사는 노동자·농민의 역사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역사의 주체이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희망인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내 어머니인 순임이, 내 누이동생인 순임이를 내 양심으로 삼아 살아갈 것입니다. 순임이의 아픔과 희망을 내 가슴에 끌어안고 여러분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대장정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본문 158∼159쪽
들불야학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 양심을 회복해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관현의 외침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를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만들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영향 받은 ‘사람이 기본이다. 사람이 중요하다’가 그의 인생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만큼 관현은 매사에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했다. 그의 뛰어난 지도력은 인간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나왔다.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교수실 정침식을 행할 때는 분노하기보다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슬픈 현실을 반성하고, 5월초 철야 단식농성 때는 추위에 떠는 후배들을 위해 학생회실 커튼을 뜯어 이불처럼 덮어주기도 했다.
5·18민주항쟁의 선두에 서다
1979년 유신독재 말 상황과 80년 봄이라고 일컬어지는 시기의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다.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전개된 이른바 부마항쟁을 계기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된 박정희 정권은 최후의 발악으로 탄압의 칼날을 광주전남지역으로 돌렸다.
1979년 10월 하순부터 전남대에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6·27교육지표 사건, 인성다방 사건,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등은 전남대의 학원민주화 투쟁의 실천력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이 사건들은 광주전남운동,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실천력이 1980년 5월 18일 시위 약속을 전남대에서만 지킬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운동역량이 월등하지 않던 전남대가 1980년 5·18의 불을 당길 수 있었던 것은 학원민주화 투쟁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바로 그 중심에 박관현이 있었다. 관현을 중심으로 한 비상학생총회는 5월 8일부터 14일까지 학내에서 민족민주화 성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이원집정제 반대·계엄령 해제·유신 잔재 청산·민중의 진정한 민주적 제 권리 쟁취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또한 5월 14일에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하며 민족민주화 성회식을 가졌다. 도청 앞 분수대에는 2만 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이 모였고, 박관현은 탁월한 연설로 대중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5월 14,15,16일 대중집회로 박관현은 ‘광주의 아들’로 거듭나고 있었다. “내일 도청 앞에서 만납시다.”라는 관현의 한마디는 시민들 사이에서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되었고, 시민들은 애국청년 박관현에게서 조국의 희망을 발견하고 관현을 지지하고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교도소에서도 인권을 생각하다
하지만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을 관현은 지키지 못한다. 계엄군에 점령당한 광주를 떠나 수배를 피해 여수와 서울 등지에서 숨어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다. 관현은 1982년 4월 체포될 때까지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동지들에게 떳떳이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내란 중요 임무 종사’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박관현은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40일간 옥중 단식투쟁을 벌인다. 장기간의 단식 과정에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박관현 열사는 1982년 10월 12일 만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박관현
박관현 열사는 야학운동과 5·18민주항쟁뿐만 아니라, 빈민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분야에서도 선구적·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의 발걸음이 바로 광주·전남지역 민주항쟁이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19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80년 5월 18일부터 전두환 일당의 수배를 피해 약 2년간 서울 도봉구 삼양동, 공릉동 등지에서 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다. 그는 1982년 4월 5일 체포, 같은 해 4월 12일에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군사정권은 1982년 9월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그를 철창 안에 가뒀다. 박관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감기간 중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40일간의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목숨을 건 그의 투쟁으로 반인권적 처우가 비로소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단식 과정에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새벽, 심근경색으로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29세의 꽃다운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