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처럼 살아 봤어요 (사계절 중학년문고 25)
- 1112
저자소개
지은이 : 조은
그린이 : 장경혜
책정보 및 내용요약
편집자 추천글
텔레비전을 사수하라!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무색한 시절이다. 수업시간에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으로 늘 첫손에 꼽던 게 ‘사계절의 뚜렷한 구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봄, 가을은 실종되었고, 점차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있다. 작년 9월 15일엔 폭염으로 인한 에어컨 사용량 급증으로 전력공급량이 부족해 대규모 지역에 정전이 돼 큰 혼란을 불러온 ‘블랙아웃’ 사태가 있었고, 올해도 어김없는 때 이른 더위로 전력공급량이 불안하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상기후 현상은 단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가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파괴, 에너지 낭비로 후폭풍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대안이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것도 아니다. 2011년 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한다. 거창하게 접근하지 않더라도,『옛날처럼 살아 봤어요』의 지열매네 가족을 보면 조금은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래 희망이 작가인 지열매는 텔레비전을 통해 두루 견문을 넓히며 작가 수업을 하는 아이다. 지열매의 최대 적은 이열매로 드라마에서 말하는 ‘악연’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1학년 때부터 지금껏 한 반이었다. 성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나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늘 한 쌍 취급을 받아 매사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될성부른 나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이열매는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마저도 “이열매 같은 아들”만 낳을 수 있다면 아이를 하나 더 낳겠다고 말할 정도로 ‘엄친아’다. 지열매는 이열매가 자기네 엄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고, 지열매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놀리는 것도 기분 나쁘고, 아빠는 일류대학을 나왔는데도 집에서 노는 날이 더 많다고 놀리는 것도 기분 나쁘다. 이열매와 관계된 건 다 기분 나쁜 지열매는 단지 이열매가 회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런데 다른 후보 아이가 기권하는 바람에 ‘자기 이름을 써 내면서까지 회장이 되지는 않겠다’고 한 공약을 어기고 자기 이름을 썼다가 반 아이들 모두에게 들키기도 한다. 아빠는 좋은 조건만 좇아 이 회사 저 회사 계속 옮겨 다니다가 회사에서 왕따로 찍혀 지금은 집에서 놀고 있다. ‘작은 약속도 잘 지키자’ 주의인 엄마는 선생님답게 “회사에도 가정에도 또 자기 자신에게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빠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또 열매에게는 텔레비전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엄마를 속이고, 공부도 대충대충하고 친구들에게도 성실하지 않다고 비난한다.
지열매네 엄마 아빠는 “골목 문화를 지켜야 한다며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론 ‘걸핏하면 노는 아빠’, ‘세상 이치도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들 취급을 받기도 한다. 아빠는 홈쇼핑 중독자이고 열매는 채널을 계속 바꿔 가며 보는 스타일이라 둘은 늘 텔레비전 앞에서 채널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다. 텔레비전 홈쇼핑을 보면서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아빠와 텔레비전을 안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딸. 부전여전답게 텔레비전 때문에 둘은 큰 사고를 친다. 열매는 텔레비전을 자기 방으로 옮겨 놓고 밤새도록 보다가 엄마한테 들키고, 아빠는 ‘키높이 구두’ 등 홈쇼핑에서 주문한 물건들이 속속들이 쌓이며 엄마의 분노를 산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그건 정말 나쁜 징조였어요. 지금껏 엄마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안 했거든요.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엄마가 중얼거렸어요.
“이렇게는 안 돼……. 정말 이렇게는 안 돼……. 안 돼, 안 돼……. 이건 정말 아니야.”
엄마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엉엉엉 우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한동안 꼼짝 않던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우리 집에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엄마는 아빠와 나를 번갈아 가며 노려봤어요.
“옛날처럼 살아야겠다.”
아빠와 나는 눈을 마주쳤지만, 엄마의 말뜻은 짐작도 할 수 없었죠.
“열매 여름방학 때만이라도…….”
이렇게 말할 때까지도요.
엄마는 달려가 두꺼비집을 내려 버렸어요. 그 순간부터 우리 집은 암흑 세상이 되었답니다. 시원하게 돌아가던 에어컨도 멈춰 버렸고요. 냉장고 소리까지 멎자 우리 집은 순식간에 고요 속에 잠겨 버렸어요.
-본문 50~51쪽
옛날처럼 살아 본다고?
엄마가 내린 극약 처방은 바로 ‘옛날처럼 살아 보기’다. 열매는 처음엔 몇 시간 그러다 말겠지 하고 엄마한테 질 수 없다 생각하고 자기 방 문을 꼭 닫고 들어가 불이 켜질 때를 기다리며 버틴다. 하지만 이삼일이 지나도 엄마의 계획엔 변함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옛날처럼 살기로 한 거, 물도 길어다 먹자며 동네 반장 집에서 물을 길어다 먹기로 하고, 화장실도 그 집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한다. 아빠 휴대전화도 압수요, 수도꼭지도 죄다 빼 버렸다.
이제 장난이 아니란 걸 알게 된 열매와 아빠는 전기 없는 집에서 견디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건 바로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 두꺼비집을 올리고 맘껏 에어컨 바람을 쐬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열매는 엄마에 대한 복수로 동냥하듯 친구네 집을 전전하며 텔레비전을 보러 다니고, 텔레비전을 사려고 모아둔 돈은 아이스크림 사 먹는 데 갖다 바친다. 어둠도 더위도 힘들지만 열매에게 가장 큰 시련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열매는 저녁 시간 골목의 집집마다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오면 불행한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아빠도 열매도 지은 죄가 있는 터라 둘은 엄마의 화가 풀릴 때까지 비위를 맞춰 주기로 한다. 열매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 아파트에서 살았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예전의 아파트 생활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엄마는 열매와 아빠가 상한 음식을 먹어 병원 신세를 지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빠는 더는 참지 못하고 보란 듯이 두꺼비집을 올리고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고 수도꼭지를 사다 끼우고 샤워를 하며 열매와 함께 ‘오늘날’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파티를 연다. 하지만 엄마의 의도를 알고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옛날처럼 살아 보기’에 적극 동참한다.
하지만 아직 엄마의 의도를 모르는 열매는 아빠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열매는 텔레비전을 볼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나무에 올라타 이웃집 창 너머로 보이는 텔레비전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엄마가 잘 모르는 친구 도우네 집에서 맘껏 텔레비전을 보며 갈증을 해소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나는 분명 엄마 아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두 사람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또 이상하죠? 책에서는 누구든 한번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그때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나는 전깃불이 안 들어오는 집에서 궁상맞게 사는 게 싫었고, 더운 게 싫었고, 마당에서 흡혈귀가 튀어나올 것 같은 깜깜한 밤이 싫었고, 무엇보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어 화가 났어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켜지는 저녁 시간이 되면 심지어 불행한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 본문 111~112쪽
어느 날 도우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아빠가 들이닥친다. 엄청 혼날 줄 알았던 열매는 “이 사실을 알면 너희 엄마, 병나 눕는다.”라며 비밀로 하자는 아빠의 말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정말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 열매는 모든 일이 심드렁하게 느껴지는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
아빠와 엄마는 옛날처럼 살면서 얻게 된 시간으로 골목 청소도 하고, 쓰레기 분리도 철저히 하고, 동네를 돌며 꽃에 물을 주기도 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가 열매네 집까지 올라오기까지 덥고 힘든데도 앉아서 쉴 곳이 하나 없어 고생한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마을 어른들을 위해 손수 의자 만들기에 나선다. “돌상에서 연필을 집어 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육체노동이라곤 안 해 본” 아빠가 말이다. 아빠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열매를 부추겨 이것저것 시키며 같이 의자를 만들어 나간다. 마을 곳곳에 벤치가 놓이자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열매네 집을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열매는 이열매에게만 따라다니는 칭찬인 줄 알았던 “떡잎부터 다른 아이”라는 말을 듣고 엄청난 뿌듯함을 느낀다.
옛날처럼 살아 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것들
이제 열매도 ‘옛날처럼 살아 보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나 보다. ‘방학 끝날 때까지만’이라고 마음을 바꾸자 하루하루 보내는 게 한결 편해졌다. 열매는 날이 저물기 전에 그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열매는 어려서부터 자기 방에서 혼자 자 버릇해 온 가족이 붙어서 함께 자는 걸 오히려 불편해했는데, 캠핑 온 사람들처럼 마당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면서 행복함을 느끼기도 한다. 엄마 말대로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된 것 같다.”
아빠는 가끔 기타를 쳤는데, 악보를 다 외우고 있어서 어둠은 문제도 안 되었죠.
여태껏 나는 미지근한 과일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어느덧 없어서 못 먹을 정도가 되었어요.
밤마다 우리 가족 그림자를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우리가 떨어져 앉아 있어도 그림자끼리는 바짝 붙어 있기도 했어요. 뚝 떨어져 있는 그림자를 보면 우리가 더 좁힐 수 있는 거리가 보이기도 했어요. 그럴 때면 나는 옆에 있는 엄마나 아빠를 꼭 껴안았답니다.-128쪽
열매가 ‘옛날처럼 살면서’ 얻은 것은 바로 ‘가족의 발견’이었다. 밤새 잠도 안 자 가며 부채질을 해 주는 엄마와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방학을 누리라며 집안일을 떠맡는 아빠. 그리고 어둠 속에 온 가족이 누워 나누는 속 이야기들. 열매는 아빠는 아빠대로 삶의 고민이 있고, 엄마는 엄마대로 힘든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엄마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심이 깊고 남”다르다는 칭찬까지 받을 정도로 마음이 자랐다. 물론 이열매를 이해하는 건 여전히 너무 어려운 문제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방학 내내 텔레비전을 보며 지냈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이렇게 옛날처럼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이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하니까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서 열매는 집에 있는 책을 몽땅 읽어 치우고, 포기하려고 했던 방학 숙제도 며칠 만에 다 해 버리고, 일기도 그날그날 썼다. 방학 마지막 날, 옛날처럼 살아 보기가 끝나고, 두꺼비집을 올리고 수도꼭지를 끼워 문명의 편리함을 다시 누리게 되었을 때 열매의 기분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탓에 물이 약하게 나왔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목욕탕으로 달려 들어갔죠. 그러곤 찬물을 끼얹으며 꺅꺅 비명을 질렀어요. 나는 세계아동문학전집을 다 읽었을 때보다도, 일등 했을 때보다도, 생일 때보다도, 상을 탔을 때보다도 훨씬 기분이 좋았어요.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그 기분은 방학 내내 텔레비전을 보며 지냈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뿌듯한 성취감이라는 사실을요!
-160쪽
그런데 이 동네에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 생겼다. 열매네 가족이 옛날처럼 산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나둘 두꺼비집을 내리고 열매네처럼 살아 보기로 한 것이다. 과연 다른 집들도 성공할 수 있을까? 또 한 사람, “이십일 세기에 사대문 안에서 전깃불도 없이 여름을 난” 열매 아빠는 방학이 끝나갈 무렵 취직을 했다. 아빠에겐 어떤 변화가 찾아왔을까?
사라져 가는 것들에 애도를 표하며
글쓴이 조은은 열네 평이 채 못 되는, 서울 사직동의 오래된 한옥에서 유기견을 보살피며 시를 쓰는 시인이다. 동시에 1999년 첫 동화책 『햇볕 따뜻한 집』을 시작으로 틈틈이 동화를 써온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궁핍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작가는 사직동 가파른 언덕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사라져 가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이웃한 동네들의 크고 작은 오래된 한옥들이 재개발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몰개성의 높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제 사직동도 곧 재개발에 들어가 정겨운 골목들과 살아 숨 쉬는 오래된 집들도 다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이를 알았는지 사람 같은 개 ‘또또’는 작가와 함께한 17년 생을 마감하고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화가 장경혜는 원고를 읽고 처음 발견한 사직동 골목길을 여기저기 쏘다니다 광화문 한복판에 존재하는 정겨운 과거의 시공간에 반해 버렸다. 몇 차례 사직동과 작가 조은의 집을 오가며 책 곳곳에 곧 사라질 이 동네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두 작가가 빚어낸 『옛날처럼 살아 봤어요』는 골목의 정서가 살아 있는, 이웃과의 정이 살아 있는, 우리 시대 도심의 마지막 정서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지열매처럼 옛날처럼 살아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모든 조명을 끄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지낸다면 지구의 수명이 조금은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부모들은 ‘골목’이 뭔지 모르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사직동처럼 골목이 남아 있는 동네들을 찾아가 같이 둘러봐도 좋을 듯하다. 엄마 아빠 어렸을 때 이야기도 들려주고, 골목과 함께 사라진 옛 놀이들 하나쯤 아이들과 즐기고 오면 두고두고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