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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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지은이 : 김영종
지은 책으로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발해 건국기를 다룬 역사소설 『빛의 바다』(상·하, 1998)와 현대 문명의 전환과 우리 문화의 뿌리에 천착한 여행기 『티벳에서 온 편지』(1999), 마지막 달동네 난곡 사람들의 이야기를 판소리체 소설로 엮은 사진 소설집 『난곡 이야기』(2004) 등이 있다. 사비나 미술관에서 <난곡 이야기>라는 주제로 사진 99점을 전시하는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옮긴 책으로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를 다룬 『실크로드의 악마들』(2000)이 있다.
그린이 : 김용철
책정보 및 내용요약
현대문명의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이 손은 예컨대 사회를 진보와 보수의 구도 속에 몰아넣고 그 자신은 증발해버린다. 사람들이 기체를 볼 수 없듯이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좌우의 구도만이 전면에 부각된다. 저자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보이지 않는 손’을 똑바로 보고 조롱할 때만이 개인도 사회도 뇌의 통제권을 되찾아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문화, 역사, 예술, 언론, 경제, 정치, 사회 시스템 등을 가로지르며 기존의 관념을 낱낱이 해부하는 저자의 놀라운 통찰력은 현대문명을 통렬히 전복시킨다. 독자는 기존의 가치관이 모조리 뒤엎어지는 카오스의 고통과 자유로움을 향한 재생의 기쁨을 동시에 경험할 것이다.
편집자 추천글
주요 내용
들글 //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간디스토마 유충은 개미의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현대문명 속에서 무엇이 코만도 유충인지 정체를 파헤치고 어떻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 썼다.” _ 8쪽
북아메리카 원주민 축제를 본 소감
“원주민의 축제를 보고서 느낀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나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제의의 축제가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 만약 저 신성한 예비체이가 경연대회가 됐더라면 신과의 관련은 끊어지고 인간의 평가를 기다리는 예능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원주민의 두 축제를 보고 나니 올림픽이든 국제콩쿠르든 신춘문예든 모두 신이 준 재능을 인간의 평가 아래 두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사실 입시제도나 자격제도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_ 25쪽
산조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산조정신은 세계 최고라는 음악가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악(클래식)에 비견되는 ‘세계 중심의 음악’을 조롱하며 그것을 속화시키는 세계 민중의 잡스럽고(그래서 ‘잡악’이라고 불리고) 세속적인(그래서 ‘속악’이라 불리는) 활기 속에 살아 숨 쉰다. 이른바 산조의 세계화는 세계적인 허튼 가락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산조정신의 계승은 세계적인 상아탑에서 창조주적 작가정신으로 무장된 음악가들한테서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_ 33쪽
성기관망파의 예술
“성기관망파 예술가는 마치 예쁜 꽃을 꺾어와 꽃꽂이하듯 바깥의 아름다움을 내면으로 가져와서 창작이라는 것을 한다. 이 예술가에게는 내면이야말로 창작의 요람이며 우주다. 성기관망파 예술가는 심지어 자연을 이념의 외화라고 말한다(헤겔). 예컨대, 노을 질 무렵 저 아름다운 황혼이 이념의 주관성이 결여돼 있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이러한 자연의 결함을 손보아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재창조해야 한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른바 ‘창조주적 작가관’이라고 하는 이것은 오늘날 근대미학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_ 43쪽
검객과 제관
“시대와 사조를 불문하고 예술은 자연에서 활력을 얻으며 중심을 뒤바꾸는 변화는 반드시 변두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중심은 매너리즘이 활약하는 무대이며 우상이 숭배되는 본처다. 예술가가 검객이 되어 중심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예술은 영원히, 비유컨대 죽은 부처, 죽은 예수를 봉향하는 우상숭배를 면할 수 없다.” _ 94쪽
거대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일상은 거대담론이 진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제기하는 새로운 눈이다. 그 눈으로 보는 일상은 진실의 창이자 열쇠다. 그런데 진실은 거대담론의 대상인 세상과 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상이든 거대담론이든 세상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파인더임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해의 출발점은 개인과 세상을 분리하는 데서 온다. 앞서 오피니언 리더들이 사회 전체를 오도한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일상의 깃발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개인과 세상을 마치 이제야 진실에 이른 양 참신하게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리는 일상의 주창자들이 주로 술자리에서 일상적으로 적대시하는 신자유주의의 계략이요 신념이다.” _ 99쪽
소비시대의 미학
“소비시대는 삶의 수동성, 순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황금만능주의를 지탄하고 인간성 회복 따위를 외치면서 적어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작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자각도 질문도 반발도 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가장 첨예해야 할 미학마저 오히려 이를 미화하고 있다. 나는 이 후자, 즉 자각되지 않는 소비시대의 미학을 다루고자 한다.” _ 100쪽
(특히, 2008년 제1회 창비장편소설 수상작에 대한 ‘심사평’과 ‘작가 데이트’를 비판적으로 거론하며 ‘소비시대 미학’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유언비어의 사회학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군사독재정권이 아니라 합리성의 메커니즘이라고 하면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러나 내친 김에 더 이야기하면 민주주의 이상으로 언론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상과 제도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_ 151쪽
“현대인의 가장 잘못된 생각은, ‘합리성의 메커니즘’은 진실을 추구하는 데 반해 ‘유언비어’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중상모략이다. 유언비어가 중시하는 것은 진실 하나밖에 없다. 유언비어야말로 진실의 배후다. 유언비어는 들개처럼 진실에 굶주려 있어서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다.” _ 176쪽
용산참극과 파우스트
“관객들은 용산참극을 방불케 하는 연극 「파우스트」 5막을 관람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관객들은 지금 간척사업을 하면서 파우스트가 노부부를 강제로 이주시키다가 불에 태워 죽인 사건을 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정말 그게 궁금하다.” _ 188쪽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모두 파우스트 편에 서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파우스트의 만행이 문학계 내에서나 사회적으로나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을뿐더러 어떤 작품해설서건 파우스트를 근대의 거인상으로서 심오성 그 자체로 평가하여 그의 만행을 심오성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뿐이니 말이다.” _ 192쪽
“사실 뉴타운의 청사진은 파우스트가 그의 개간지에 부여한 의의로 가득 차 있다.” _ 196쪽
집이 우주인 사진
“사진을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봐도 집이 우주라는 게 읽힌다. 태아에게 엄마의 자궁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우주가 파괴되는 고통이 느껴진다. 재개발사업은 거주자들의 우주를 파괴하는 범죄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_ 201쪽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그들은 언어 조작술로 성공하였다. 지금까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언어 조작술이야말로 이들이 성공한 비결이었다. 구체적으로 김성수 일파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정통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름과 대상이 일치한다는 오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_ 211쪽
“한 사회에서 국권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우파라 하고 민권론을 옹호하는 세력을 좌파라 할 때 친일파나 민족개량주의자가 우파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그저 매국노일 뿐이다. 그러면 이자들이 우파로 행세하는 데 이용한 환영들을 알아보자.” _ 221쪽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현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현재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즉 진보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 잡힌 사실은 돈의 메커니즘을 보면 잘 드러난다.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돈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가?” _ 231쪽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시무시한 악덕을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금수가 되지 않기 위해 배운다고 하지만 현대는 오히려 배움을 통해 악덕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고 있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내내 시험에 나올 지식 따위를 배우느라 푸릇푸릇 싱그러운 생명의 빛을 지옥에 내던지면서까지.” _ 261쪽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운동권 학생들은 군사독재의 현실 앞에서 개인의 영달이 보장된 미래를 반납하고 민중과 사회를 택했다. 사회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익을 보장해주는 수단인 학벌에 대해서는 좀 더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사회를 계급의 체계로만 봤을 뿐 계급사회를 자발적으로 추종하게 하는 힘이 자본 자체가 아니라 자본을 자본이게 하는, 즉 자본에 ‘인격과 품위를 부여하는 학력/지식’이라는 점은 간과했다. _ 279쪽
“민중운동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엘리트주의?도덕성?헌신성’이 깊이 아로새겨진 플라톤주의를 유전자로 물려받은 근대학문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전문가 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독점하고 사회의 진로를 주도하는 시대가 왔는데도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학력/지식을 우선시하고 출신학교별로 연대를 분명히 해온 것도 사실이다.” _ 296쪽
유토피아야말로 지옥이다
“오늘날 세계평화는 열강들의 유토피아 정책의 일환이다. 약소국가들은 제국주의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불안하게 평화를 맛보고 있다. 한편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힘도 유토피아다. 시민들은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 아로새겨진 돈(빚/신용)의 위력 속에서 하루하루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거대담론의 대상이자 일상의 문제다.” _ 318쪽
날글 // 역사 속으로 동시에 역사 밖으로
“어떠한 역사적 운동도 역사 밖의 꿈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으로 들어가게 된다. ‘역사 속으로’라는 한 방향만으로 갈 때 맞이하는 피할 수 없는 파국이다. 따라서 코만도 유충의 조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_ 3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