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형외과 출입금지 구역 (사계절 아동문고 82)
- 971
저자소개
지은이 : 신지영
그린이 : 정문주
책정보 및 내용요약
아파트도 아니고 주택도 아니다. 나, 이진솔은 이정형외과 3층, 출입금지 구역 구석방에 산다. 반 친구들과 마주칠까 봐 병원 안도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한다. 직원 식당에서 밥 먹는 것도 공동 화장실을 쓰는 것도 불편하다. 미니홈페이지에 있는 미니룸만이 유일한 나만의 공간이다. 그나마 언니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이 낙이고, 가끔 옥상에서 혼자만의 공상에 빠지는 것이 탈출구이다. 그런 나에게 어디 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목차
우리 집
컴퓨터실에서
옥상
빨간 벽돌집 아이
우리 집을 묘사해 보자
에메랄드빛 반지
식당에서 마주치다
사라진 일기장
작은 만찬
동네로 가다
형석이네 집
따뜻한 찻잔
초대
편집자 추천글
낯선 공간, 직원 외 출입금지 구역
전학과 이사는 아이에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통째로 바뀌는 아주 큰 변화 중 하나이다. 그래서 전학을 자주 다니는 아이는 정서적 불안감을 가지기 쉽다고 한다. 『이정형외과 출입금지 구역』의 진솔이는 마당 있는 시골집에서 도시로 이사를 왔다.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인데, 진솔이의 새집은 특이하게 친척 어른이 운영하는 병원 내 ‘출입금지 구역’에 자리한 구석방이다.
시골에서 상경할 때 얻을 수 있는 집이란 대체로 예전 집보다 열악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지하방이나 옥탑방도 아니고 과연 살림이 다 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도 안 되는 병원 한쪽 구석방이라니, 이제 막 6학년에 들어선 진솔이와 한창 예민할 시기인 중학생 언니 진하에게 가혹한 현실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낯설고도 누군가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공간에서 진솔이는 친구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또 그에 따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언니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혼자만의 공상에 빠진다.
가슴이 죄어드는 증상, 공간에 대한 부적응
진솔이네는 시골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이 몇 해 농사를 망쳐 빚이 늘어난 데다 언니가 갈 고등학교도 없는 시골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숙 어른이 운영하는 이정형외과에서 살면서 엄마는 병원 내 식당일을 하고 아빠는 병원의 온갖 허드렛일을 한다.
나는 고향을 떠나는 게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렜다. 내게는 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수업 시간마다 우리가 살 집을 그려 봤다. 무지무지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병원, 아담하지만 산뜻한 살림집, 안방, 우리 방, 아담한 마루……. 마루에 자그마한 소파를 놓고, 우리 방에는 분홍색 침대를 들여놓고…….(28~29쪽)
진솔이는 새집에 대한 꿈을 꾸는 게 좋았다. 하지만 현실로 맞닥뜨린 집은 꿈을 산산조각내고도 남았다. 커다란 간판에 회색 건물, 동굴 같은 출입금지 구역, 단 한 칸뿐인 방. 진솔이는 기대와 상상이 오그라들자 가슴이 텅 빈 듯했다.
그때부터였는지, 진솔이는 가슴이 죄어드는 경우가 잦아졌다. 행여나 병원에서 반 친구들을 마주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언니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창 너머 옆집 아이 소미에게 우유갑을 던져놓고 가슴이 콩닥콩닥거린다. 병원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으며 혼자 라디오 방송국 놀이에 빠질 때 보면 진솔이의 고민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가 작년에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왔는데요, 그때부터 긴장할 일이 많아졌어요. 그럴 때마다 심장이 되게 빠르게, 세게 뛰는 거예요. 그걸 한번 느끼면 더 많이 긴장하게 되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72쪽)
친구와 관계 맺기에 적극적인 언니와 스스로를 출입금지 구역에 봉인하는 동생
혼자 노는 아이, 진솔이는 옆집 아이 소미가 친구하자는 의미로 말을 걸어와도 방어부터 하고 본다. 어쩌면 소미가 처음부터 다 안다는 듯이 “너 어디 살아?” 하고 물어서일지 모른다. 병원 구석방에 사는 걸 알면서 놀리는 것 같아 소미가 처음부터 밉고 싫었다. 아빠, 엄마와 태국 여행 다녀온 얘기를 자랑처럼 늘어놓을 때도 얄미웠다. 짝꿍이 된 형석이와도 어색한 사이라 말도 않고 지낸다. 학교에서 자기네 집을 묘사하는 시간에 진솔이는 얼결에 아주 평범한 집으로 발표를 한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말을 지어내서 발표한 걸 알 것 같은 형석이가 영 껄끄럽다.
말 못할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진솔이는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자칫 잘못했다가 자기네 집이 들통 날 것 같기도 해서다. 그러니 더욱 가슴 죄어드는 일만 늘어날 뿐이다. 그런 진솔이에게 나름의 탈출구는 언니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짜릿함이다. 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혼자만의 공간을 갖지 못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 있다. 얼굴 한쪽에 크게 차지하고 있는 점은 치명적 콤플렉스이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언니의 점은 사람들이 상처라고 부르면서 진짜 상처가 되었다. 이성에 눈뜨고 연예인에 열광할 때, 시골 친구 민기에게 편지를 썼다가 답장도 못 받자 좌절하고 이내 새 학교에서 만난 친구 혜미에게 극도의 관심을 가진다.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동성 친구에게 가지는 동경이다. 진솔이는 그런 언니의 상태를 일기를 통해 고스란히 보고 느낀다.
진솔이는 언니가 친구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현실의 고민을 털어 버리려 애쓰는 것과 반대로 혼자 자꾸만 동굴 같은 출입금지 구역 안으로 들어간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 혼자만의 세계에서 안주하길 바란다. 그래서 미니홈피에 벽난로가 있는 미니룸을 꾸민다. 보라색 책장에 색색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고,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에 분홍 하트 모양의 양탄자가 깔린 방. 책장을 넘기며 차를 홀짝홀짝 마시는 여자 미니미에게 자기를 동일화하고는 머릿속으로 그런 공간을 꿈꾼다. 친구들과 부딪쳐서 의기소침해지는 것보다 혼자 미니룸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출입금지 구역 구석방’이라는 무거운 짐 내려놓기
그런 진솔이에게 새로 옮겨온 공간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그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는, 공상이 아닌 현실감을 획득하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소미가 화장실에 빼어 둔 에메랄드빛 반지를 훔치는 것이 그 계기가 된다. 소미는 평소 그 반지를 자랑했다. 아빠와 함께 간 여행에서 산 거라고. 화장실에서 소미의 반지를 발견하자 진솔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슬쩍 한다. 막상 반지를 갖고 보니,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 진솔이는 반지를 언니에게 줘 버린다. 그러다 결국 소미 엄마인 물리치료사 아줌마가 언니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게 되고 진솔이는 아줌마에게 붙들려 간다.
물리치료사 아줌마가 자그마한 진솔이의 손목을 꽉 붙들고 다그치는 순간 진솔이는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아줌마의 손을 뿌리치고 병원을 뛰쳐나온다. 마침 마주친 짝 형석이를 따라 형석이네 집까지 간다.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만 같던 형석이가 갑작스레 편해졌다. 진솔이는 문득 형석이에게 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집 이야기에서 반지 이야기까지 모두. 차마 입을 열 수 없어 컴퓨터 자판으로 진솔이는 형석이에게 자기 마음을 내보인다. 형석이도 자연스레 자기도 어렸을 적 주인집 아이의 인라인스케이트를 슬쩍 해 본 적이 있다는 얘기를 자판으로 쳐서 들려준다.
비록 반지를 훔치는 행위는 잘못이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진솔이는 형석이와 소미에게 친구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진솔이는 이정형외과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출입금지 구역을 나온 느낌이다. 친구가 생기자 주위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행여 누구랑 눈 마주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 숙이며 걷던 학교 복도에서 이젠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고 슬며시 웃는 여유가 생겼다.
이제 알겠다. 내게 벌어진 일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지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는 ‘이정형외과 출입금지 구역 구석방’을 무거운 짐처럼 등에 지고 있었다는 것도. 그러므로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167쪽)
진솔이는 그제야 얼마쯤의 짐을 내려놓았다. 까르르 웃으며 골목을 달음질쳐 가는 아이들처럼 자신도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만 같다.
공간에 대한 묘한 집착과 그로 인한 성장 이야기
신지영은 신인답지 않게 문장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다듬을 줄 아는 작가다. 그의 첫 책 『이정형외과 출입금지 구역』은 버릴 문장이 별로 없으리만치 공들여 조탁해 온 작품이다. 2003년 사계절문학상 본심에 오른 작품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끊임없이 다듬고 고쳐왔던 것은 작가가 실제로 겪은 경험치를 작품에 녹여내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이 요즘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로 거듭나기 위해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쳤다.
작가는 유독 공간에 집착했다. 진솔이가 고향을 떠나와 첫 번째로 터를 잡은 공간에 대한 생경함, 특이한 상황의 범상치 않은 공간에 대한 이질감을 아주 잘 그려냈다. 그래서 진솔이에게 가상의 인터넷 공간 미니룸이 더없이 소중했고, 병원 바로 옆의 빨간 벽돌집의 소미를 질투와 부러움으로 바라봤다. 학교에서 <우리 집을 묘사해 보자>를 할 때 평범한 공간을 꿈꿨던 일 또한 공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진솔이는 이정형외과 출입금지 구역 구석방을 비로소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하나의 통과의례를 거쳤다. 이제 경쾌한 발걸음으로 성큼 내디딜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