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의 비밀 (사계절 아동문고 47)
- 1937
• 지은이 : 김병렬
• 그린이 : 고광삼
• 가격 : 11,000원
• 책꼴/쪽수 :
224*144mm, 176쪽
• 펴낸날 : 2003-02-25
• ISBN : 9788971969410
• 십진분류 : 문학 > 한국문학 (810)
• 추천기관 :
어린이도서연구회
• 태그 : #초등 #고학년 #간도 #역사 #백두산 #청소년
저자소개
지은이 : 김병렬
195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고려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국방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도연구보존협회 이사, 대한국제법학회 이사, 경상북도 독도사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펴낸 책으로는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백두산정계비의 비밀』, 『일본군부의 독도침탈사』, 『독도냐 다케시마냐』, 『이어도를 아십니까』 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펴낸 책으로는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백두산정계비의 비밀』, 『일본군부의 독도침탈사』, 『독도냐 다케시마냐』, 『이어도를 아십니까』 등이 있습니다.
그린이 : 고광삼
1966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습니다. 그동안 그린 책으로는 『겨울방』, 『종이 비행기』, 『아버지를 찾아서』, 『하늘의 별은 몇 개일까?』, 『엄마의 마지막 선물』 들이 있습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백두산정계비의 비밀』은 중국에 빼앗긴 간도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간도 땅을 중국에 빼앗기게 되었을까요? 중국 사람들이 백두산정계비에 간도가 우리 나라 땅이라고 분명히 써 놓고도 뒷날 자기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아득바득 우겼기 때문입니다. 빼앗긴 간도 땅을 되찾아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우리 겨레가 피땀 흘려 일구었던 간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차
1부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 돌골의 겨울
- 옥수수 농사
- 돌무덤
- 불안한 희망, 간도
- 조선 사람들은 떠나라
2부 백두산정계비
- 양반 심마니의 비밀
- 청나라 사신 목극등
- 장군봉으로
- 백두산 호랑이
3부 간도 전투
- 다시 장군봉에 오르다
- 국경 회담
- 백두산 포수대
- 모자산 전투
- 간도군
-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다
- 돌골의 겨울
- 옥수수 농사
- 돌무덤
- 불안한 희망, 간도
- 조선 사람들은 떠나라
2부 백두산정계비
- 양반 심마니의 비밀
- 청나라 사신 목극등
- 장군봉으로
- 백두산 호랑이
3부 간도 전투
- 다시 장군봉에 오르다
- 국경 회담
- 백두산 포수대
- 모자산 전투
- 간도군
-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다
편집자 추천글
1. 기획 의도
> 빼앗긴 간도 땅
언제부턴가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 아래만을 우리 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었다. 특히 간도 땅은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새겨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청나라 사람들은 뒷날 그런 적이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9년 일본이 쳐들어와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 땅을 완전히 청나라에 넘겨 버렸다.
> 간도는 우리 겨레가 피와 땀으로 일군 우리 땅이었다
작가 김병렬 교수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구성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수많은 인물들을 끌어내어 간도를 지키려 했던 우리 겨레의 삶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어 내었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길잡이 노릇을 했던 심마니 김애순이 간도 땅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야기, 두만강을 건너 피와 땀으로 간도 땅을 개척한 영기와 호철 두 가족의 힘겨운 삶의 역경, 청나라 군사의 횡포에 맞서 사설 군대를 조직하여 목숨을 걸고 간도를 지키려 했던 포수대 이야기를 통해 우리 겨레가 간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간도 문제를 다룬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책
안타깝게도 어린이책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간도 문제를 단 한번도 다루지 않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동해’를 ‘일본해’라며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리고 있는 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일본은 자기네 땅도 아니면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명백히 간도가 우리 땅인데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빼앗긴 간도 땅을 되찾아오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 땅이라고 하더라도 지킬 힘이 없을 때는 엉뚱한 나라가 차지하거나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 책은 기획되었다. 또한 이 책은 간도 문제를 다룬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책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작품 내용
>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두만강이라도 건넙시다. 두만강 넘어 간도 땅에 터잡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많대요.” “두만강을 건너다가 포졸들한테 잡히는 날에는 모두 줄초상을 치를 거라는 소리 못 들었소? 이번에 또 끌려가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기사년(1869년) 대가뭄은 함경도 백성의 목숨을 절반 넘게 앗아 갔다. 굶어 죽은 사람들의 앙상한 시체가 실려 나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모질기로 치자면 가뭄과 추위는 벼슬아치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돈을 주고 벼슬자리를 얻은 관리들은 백성들을 쥐어짜서 자기 배를 채우려 들었고 포졸들은 집집마다 들쑤시고 다니며 세금을 내라고 했다. 내년 농사지을 씨앗은 물론이고 돈이 될 만한 거라면 뭐든 가져가 버렸다. 그마저 없는 사람들은 관가에 끌려가 다짜고짜 매질을 당해야 했다. 영기도 세금을 내지 못해 닷새 전에 죽도록 얻어맞고 업혀 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났다. 어쩌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간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농사지으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조그만 더 참아 주게. 조금만…….’ 영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영기도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비대의 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 수비대에 붙잡히기라고 하면 식구들 모두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 “내 며칠 다녀올 데가 있소.”
짧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자 영기는 광 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옥수수 씨앗을 품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저녁 무렵 영기는 두만강을 지키는 수비대를 피해 강을 건넜다. 사실 영기는 관청에서 두만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두만강 건너 간도 땅도 조선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정에서도 간도 땅이 조선 땅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간도 땅에 청나라 사람들이 자주 들어와 조선 사람들과 사소한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아예 간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영기는 여름 내내 남몰래 두만강을 건너다니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함경도 지방은 여전히 가뭄이지만 두만강 건너 간도 땅은 신기하게도 비가 자주 내렸다. 가을이 되자 옥수수가 여물기 시작했다. 옥수수는 겨우 내내 영기의 가족들에게 훌륭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영기네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웃집 호철이 찾아왔다. “자네 요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자꾸 두만강을 왔다 갔다 하는 까닭이 뭔가?” 영기는 아차 싶었다. “내 관청에 고자질하지는 않겠네. 대신 옥수수 좀 나눠 줘.” 영기는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호철의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해 겨울 호철네는 영기가 나눠 주는 옥수수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기나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듬해 봄부터 영기는 호철과 함께 두만강을 오가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함경도는 3년째 가뭄이 이어졌다. 3년 가뭄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은 간도 땅에서 떠나라 가을이 되자 또 다시 옥수수가 여물기 시작했다. 영기와 호철은 두만강을 건너 가을걷이를 하러 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었다. 두만강을 지키는 수비대들이 영기와 호철을 쫓고 있었다. 잡히는 날에는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지기가 힘들었다. 영기와 호철은 수십 년 동안 살아 왔던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딸린 두 집 식구들이 두만강 수비대를 따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수비대를 유인할 테니 그 틈을 타 다들 강을 건너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기는 수비대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나머지 가족들은 무사히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간도에 닿은 두 식구는 마을 사람들 도움을 받아 아쉬우나마 움막집을 짓고 농기구를 빌려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비대를 따돌리고 돌아오겠다는 영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영기의 아들 종식은 아버지가 물려 준 책을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영기는 본디 심마니였다. 심마니들은 어떤 산의 산세나, 귀한 약초를 캤던 자리를 책에 표시해 두었다. 그 책은 살아생전에는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오직 죽을 때가 되면 자식에게만 물려 주었다. 어느덧 두 식구는 간도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고, 그해 간도에 사는 조선 사람은 어느 새 2만 명을 넘어섰다. 조정에서도 간도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간도로 들어가는 걸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러나 간도 전체를 술렁이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청나라에서 ‘조선 사람들은 떠나라’는 방을 간도 곳곳에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흥분해 떠들어 댔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 종식이 나서며 말을 꺼냈다. “먼저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요.” 종식은 품안에서 아버지가 건네준 책을 꺼내 보였다. “이건 제 육대조 할아버지가 백두산 장군봉에 비석을 세울 때 쓴 책입니다. 그 비석에는 청나라 사신이 압록강과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그 비석의 탁본을 떠 오겠습니다.” 1712년 청나라는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해 사신 목극등을 파견했다. 이때 길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종식의 육대조 할아버지였던 김애순이었다. 김애순은 백두산 곳곳을 떠돌며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였다. 그래서 백두산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은 백두산과 간도 땅을 빼앗기 위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김애순은 목숨을 걸고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김애순의 노력 끝에 생떼를 부리던 청나라 사신 목극등도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애순은 그때 있었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자식들에게 물려 주었다.
과연 종식의 말대로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자 비석이 있었다. 비석에는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의 내용에 따르자면 간도 땅은 조선 땅임이 분명했다. 종식은 비석의 탁본과 함께 ‘토문강 남쪽에 있는 간도는 원래 조선의 땅이다. 그런데 청나라가 간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니 조정에서 이를 명백히 밝혀 달라’는 편지를 조정에 보냈다. 그리하여 1885년 9월 30일 회령에서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조선 쪽에서는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을 보여 주며 간도 땅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청나라 사신은 비문에 나오는 ‘토문’을 트집잡았다. 토문은 두만과 같은 뜻의 만주어이니, 비문에 나오는 ‘토문’은 두만강이라고 했다.
> 포수대를 조직하여 청나라 군대와 맞서다
사실 국경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후 청나라는 간도에 사는 조선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청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종식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포수대’를 조직하여 청나라 군대와 맞서기로 했다. 서너 번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포수대가 청나라 군대와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수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09년 9월 9일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 땅을 청나라에 완전히 넘겨 버린 것이다. 그 소식을 듣던 날, 포수대는 홀연히 간도 땅을 떠났다. 처음에는 가끔 간도에 있는 식구들과 연락을 하였지만, 몇 해 뒤에는 아예 소식조차 끊겨 버렸다. 그 뒤에도 간도에는 포수대의 모습을 봤다는 소문이 떠돌 뿐이었다. “포수대원들이 살았던 마을에 일본군이 밀어닥칠 때였어. 그런데 어디선가 하얗게 센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들이 나타났지. 아마 대여섯쯤 되었을 거야. 일본군 수천 명을 온몸으로 맞서 싸웠어. 모두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지. 정말이야. 꼭 장군봉 같았어. 눈이 하얗게 쌓인…….”
> 빼앗긴 간도 땅
언제부턴가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 아래만을 우리 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 땅은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었다. 특히 간도 땅은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새겨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청나라 사람들은 뒷날 그런 적이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9년 일본이 쳐들어와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 땅을 완전히 청나라에 넘겨 버렸다.
> 간도는 우리 겨레가 피와 땀으로 일군 우리 땅이었다
작가 김병렬 교수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구성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수많은 인물들을 끌어내어 간도를 지키려 했던 우리 겨레의 삶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어 내었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길잡이 노릇을 했던 심마니 김애순이 간도 땅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이야기, 두만강을 건너 피와 땀으로 간도 땅을 개척한 영기와 호철 두 가족의 힘겨운 삶의 역경, 청나라 군사의 횡포에 맞서 사설 군대를 조직하여 목숨을 걸고 간도를 지키려 했던 포수대 이야기를 통해 우리 겨레가 간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간도 문제를 다룬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책
안타깝게도 어린이책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간도 문제를 단 한번도 다루지 않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동해’를 ‘일본해’라며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리고 있는 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일본은 자기네 땅도 아니면서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명백히 간도가 우리 땅인데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빼앗긴 간도 땅을 되찾아오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 땅이라고 하더라도 지킬 힘이 없을 때는 엉뚱한 나라가 차지하거나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 책은 기획되었다. 또한 이 책은 간도 문제를 다룬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책이라는 점에서도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작품 내용
>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두만강이라도 건넙시다. 두만강 넘어 간도 땅에 터잡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많대요.” “두만강을 건너다가 포졸들한테 잡히는 날에는 모두 줄초상을 치를 거라는 소리 못 들었소? 이번에 또 끌려가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기사년(1869년) 대가뭄은 함경도 백성의 목숨을 절반 넘게 앗아 갔다. 굶어 죽은 사람들의 앙상한 시체가 실려 나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모질기로 치자면 가뭄과 추위는 벼슬아치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돈을 주고 벼슬자리를 얻은 관리들은 백성들을 쥐어짜서 자기 배를 채우려 들었고 포졸들은 집집마다 들쑤시고 다니며 세금을 내라고 했다. 내년 농사지을 씨앗은 물론이고 돈이 될 만한 거라면 뭐든 가져가 버렸다. 그마저 없는 사람들은 관가에 끌려가 다짜고짜 매질을 당해야 했다. 영기도 세금을 내지 못해 닷새 전에 죽도록 얻어맞고 업혀 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났다. 어쩌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간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농사지으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조그만 더 참아 주게. 조금만…….’ 영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영기도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비대의 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 수비대에 붙잡히기라고 하면 식구들 모두 목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 “내 며칠 다녀올 데가 있소.”
짧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자 영기는 광 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옥수수 씨앗을 품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저녁 무렵 영기는 두만강을 지키는 수비대를 피해 강을 건넜다. 사실 영기는 관청에서 두만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두만강 건너 간도 땅도 조선 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정에서도 간도 땅이 조선 땅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간도 땅에 청나라 사람들이 자주 들어와 조선 사람들과 사소한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아예 간도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영기는 여름 내내 남몰래 두만강을 건너다니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함경도 지방은 여전히 가뭄이지만 두만강 건너 간도 땅은 신기하게도 비가 자주 내렸다. 가을이 되자 옥수수가 여물기 시작했다. 옥수수는 겨우 내내 영기의 가족들에게 훌륭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영기네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웃집 호철이 찾아왔다. “자네 요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자꾸 두만강을 왔다 갔다 하는 까닭이 뭔가?” 영기는 아차 싶었다. “내 관청에 고자질하지는 않겠네. 대신 옥수수 좀 나눠 줘.” 영기는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호철의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해 겨울 호철네는 영기가 나눠 주는 옥수수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기나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듬해 봄부터 영기는 호철과 함께 두만강을 오가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함경도는 3년째 가뭄이 이어졌다. 3년 가뭄은 임금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은 간도 땅에서 떠나라 가을이 되자 또 다시 옥수수가 여물기 시작했다. 영기와 호철은 두만강을 건너 가을걷이를 하러 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었다. 두만강을 지키는 수비대들이 영기와 호철을 쫓고 있었다. 잡히는 날에는 두 사람 다 목숨을 건지기가 힘들었다. 영기와 호철은 수십 년 동안 살아 왔던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딸린 두 집 식구들이 두만강 수비대를 따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수비대를 유인할 테니 그 틈을 타 다들 강을 건너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기는 수비대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나머지 가족들은 무사히 두만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간도에 닿은 두 식구는 마을 사람들 도움을 받아 아쉬우나마 움막집을 짓고 농기구를 빌려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비대를 따돌리고 돌아오겠다는 영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영기의 아들 종식은 아버지가 물려 준 책을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영기는 본디 심마니였다. 심마니들은 어떤 산의 산세나, 귀한 약초를 캤던 자리를 책에 표시해 두었다. 그 책은 살아생전에는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오직 죽을 때가 되면 자식에게만 물려 주었다. 어느덧 두 식구는 간도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고, 그해 간도에 사는 조선 사람은 어느 새 2만 명을 넘어섰다. 조정에서도 간도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간도로 들어가는 걸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러나 간도 전체를 술렁이게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청나라에서 ‘조선 사람들은 떠나라’는 방을 간도 곳곳에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흥분해 떠들어 댔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때 종식이 나서며 말을 꺼냈다. “먼저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해요.” 종식은 품안에서 아버지가 건네준 책을 꺼내 보였다. “이건 제 육대조 할아버지가 백두산 장군봉에 비석을 세울 때 쓴 책입니다. 그 비석에는 청나라 사신이 압록강과 토문강을 국경선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그 비석의 탁본을 떠 오겠습니다.” 1712년 청나라는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해 사신 목극등을 파견했다. 이때 길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종식의 육대조 할아버지였던 김애순이었다. 김애순은 백두산 곳곳을 떠돌며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였다. 그래서 백두산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청나라 사신 목극등은 백두산과 간도 땅을 빼앗기 위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김애순은 목숨을 걸고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김애순의 노력 끝에 생떼를 부리던 청나라 사신 목극등도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애순은 그때 있었던 일들을 꼼꼼히 기록하여 자식들에게 물려 주었다.
과연 종식의 말대로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자 비석이 있었다. 비석에는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의 내용에 따르자면 간도 땅은 조선 땅임이 분명했다. 종식은 비석의 탁본과 함께 ‘토문강 남쪽에 있는 간도는 원래 조선의 땅이다. 그런데 청나라가 간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니 조정에서 이를 명백히 밝혀 달라’는 편지를 조정에 보냈다. 그리하여 1885년 9월 30일 회령에서 국경선을 확정 짓기 위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조선 쪽에서는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을 보여 주며 간도 땅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청나라 사신은 비문에 나오는 ‘토문’을 트집잡았다. 토문은 두만과 같은 뜻의 만주어이니, 비문에 나오는 ‘토문’은 두만강이라고 했다.
> 포수대를 조직하여 청나라 군대와 맞서다
사실 국경 회담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후 청나라는 간도에 사는 조선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청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종식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포수대’를 조직하여 청나라 군대와 맞서기로 했다. 서너 번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포수대가 청나라 군대와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수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09년 9월 9일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간도 땅을 청나라에 완전히 넘겨 버린 것이다. 그 소식을 듣던 날, 포수대는 홀연히 간도 땅을 떠났다. 처음에는 가끔 간도에 있는 식구들과 연락을 하였지만, 몇 해 뒤에는 아예 소식조차 끊겨 버렸다. 그 뒤에도 간도에는 포수대의 모습을 봤다는 소문이 떠돌 뿐이었다. “포수대원들이 살았던 마을에 일본군이 밀어닥칠 때였어. 그런데 어디선가 하얗게 센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들이 나타났지. 아마 대여섯쯤 되었을 거야. 일본군 수천 명을 온몸으로 맞서 싸웠어. 모두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지. 정말이야. 꼭 장군봉 같았어. 눈이 하얗게 쌓인…….”